이기적인 경배_2011.06.05.

(출 20:23, 개역)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시내산 위에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십계명을 전수해 주신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부탁은 이와 같은 것이다.

‘너희는 지금 무형의 하나님을 음성을 통해 만나느니라. 나는 무형이니라. 그러니 부디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 유형의 하나님을 빗어 만들지 말아라.’

우리는 실물의 존재이다. 사실 인간에게 실존이란 실물에 거의 가까운 의미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강한 의심과 거부반응을 일으키곤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 실물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무형이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매우 불리한 조건이며, 불만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섬기고 싶은 신(神)은 실물하는 신(神)일 때 더욱 좋은 법이다.

역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욕망을 통찰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무형의 존재로 만족하지 않고, 유형의 존재로 재창조해 낼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경계시키셨다.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시도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정의 내리신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형의 하나님을 유형화 시켜서 경배하는 의도와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 자신을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무엇을 통찰할 수 있을까?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유형화 시켜서 경배하였음을 증언한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금송아지 우상을 하나님으로 섬겼다. 그들은 진정 하나님을 섬겼다. 여호와를 섬기는 예식을 전적으로 뒤집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갈망하는 하나님의 무형을 유형화 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일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방법론이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그들의 기질에 유리하고 부합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을 선택함으로써 무형의 하나님을 섬기는 본질적인 방식을 거부해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불편하지만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적인 편리의 방법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란 의미이다.

이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경적인 방법과 원리들을 끊임없이 교훈 받는다. 그러나 수없이 그 방법들과 부딪히며 논쟁하며, 다툼으로 소모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따름이다. 시내산에서 음성으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오늘 내 손안에 놓여진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너의 이기적인 원리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고난에 참예하며 희생하며 너 자신을 굴복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이다. 본연의 하나님을 섬기라고, 거짓의 유형화 된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기려 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내 앞에 있는 하나의 기괴한 현상을 발견한다. 탁자 위엔 대가리가 박살난 금송아지가 놓여있고, 방 주위엔 파편과 동강이 난 수많은 금송아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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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_2011.05.29.

요즘 교사모임 때 ‘영적침체’란 주제에 대해 교사들과 묵상을 나누고 있다. 이 주제가 가지는 가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이란 것이며 또한, 이 슬럼프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다운 삶의 매력과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침체되는 원인과 이유의 다양성은 탐색해볼수록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지만 분명 하나의 공통된 요소를 찾을 수는 있다. 불만족.

문득 오늘 이 주제는 왜 의미 있는 것일까?

대개 어떤 문제란 것을 갖고서 상담을 요청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현재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과 상태, 환경과 조건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갈등과 고민 때문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방향과 방법에 대한 분명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지와 우유부단함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또 누구는 그릇된 결정 때문에 근심한다. 또 한편에선 보다 더 주님을 잘 섬기고 싶은, 더 완전해지고 싶은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불만족한다.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 불만족은 근심을 야기시키고 우리는 침체되어 간다.

선한 갈망이든 그릇된 욕망이든 선악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가 만족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한결같이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의 만족은 무엇일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기심을 채울 수 없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증거한다. 더불어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가장 비중 있게 인정한다. 그러나 솔직한 나의 고민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주님을 인정하고 싶은 걸까?

이번 주 청년회 묵상이 로마서 4장18-21절 말씀이다. 그 묵상조차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의 한 맥락에 재료를 제공해준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의심치 않고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확신했다고, 그것이 ‘의’로 여김을 입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안다. 기근을 피해 약속한 땅을 떠났고, 두 번 씩이나 아내를 부인했으며, 처음 이삭을 약속받았을 때 그가 하나님께 했던 말은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주소서.’ 바로 그것이었음을.

아브라함의 확신,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봤다. 그가 자기나 사라나 그 육체의 소망이 끊어짐을 알고 이삭의 출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처음 회의적이었을 때, 그러나 정녕 그 이삭을 껴안았을 때 받았을 충격, 그 깊은 회개와 각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그것을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바뀔 때 믿음이 약하여지고 만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불만족스럽다. 확신하지 못한다. 의심한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영광은 실추된다. 의로 여기심을 입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 그것은 그냥 하늘로부터 던져준 믿음이 아니란 것. 그가 그 모리아 산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나아가 이삭의 머리 위에 칼을 드리울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믿음의 훈련 없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

그리고 우리가 다룰 문제도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견고한 믿음은 우리가 꿈꾸는 갈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훈련?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에 부합되지 않는다. 훈련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우리를 근심에 빠트리는 것이며, 종종 우리가 침체되는 이유조차 되기까지 한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익히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훈련을 싫어한다. 우리는 이기심을 이루길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어하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고백한다. 때때로 나는 차라리 내 삶의 주인이 나였으면 싶다고. 미안하지만 이것이 나의 정직이다.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을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굴복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굴복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인정해야 된다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정답을 말해줄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결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근심과 침체의 근원적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불만족이다. 그리고 그 불만족의 동기는 또한, 굴복하지 못함이다. 우리는 바울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모두 배설물로 여겨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그 많은 환란과 곤혹스런 환경 속에서도 기뻐했던 이유가 이상하고 되물을 필요가 없다. 바울의 고백은 정직했다.

다만, 우리의 마지막 남은 고민은 우리의 만족 역시 굴복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쯤 굴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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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나타나야할 근심_2011.04.13.

(고후 7:10-12, 개역)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일반적으로 근심이나 염려는 덕이 아니다. 그럼에도 옳은 근심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그러나 이 근심은 생각처럼 흔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덕이 되지 않는 근심에 줄곧 노출된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참된 근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면밀히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가운데 유발되는 신령한 근심이며, 주의 뜻 앞에 올바르지 못한 자신에 대한 가책과 발견이다. 이 근심이 가지는 특징은 이미 11절부터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특징은 이와 같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만든다. 낮아지고, 마음이 깨지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절히 사모함으로 구하게 된다. 또한, 변명한다.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잘못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그릇되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 읊조리기 시작한다. 또, 분노한다.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해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더 멀리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하고 떤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간절히 사모한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와 소망을 간절히 갈망한다. 열심을 품는다. 신령한 열정, 회복에 대한 근신에 대한 열심을 품는다. 그리고 벌한다. 자신의 그릇됨에 대해 스스로 책망하고 자신을 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혜로워질 것을 권면한다.

 결국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철저히 반성하고 뉘우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온간 거짓과 위선과 허영과 명예욕과 교만과 오만으로 얼룩진 자신이 씻겨져 가고 하나님 앞에서 일절 깨끗함을 찾아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러한 신령한 근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 자신의 실패와 그릇됨에 대해서... 그러나 정작 하나님 앞에서 깨지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피상적인 후회와 반성에 머무를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근심이 아닌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러한 근심은 일절 깨끗함이 되어지는 근심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회개와 정직함, 간절함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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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연보의 비밀_2011.04.13.

(고후 8:2-3, 개역)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연보에 대한 권면을 한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도 연보를 준비하고 있었음으로 바울은 그들의 준비가 부족하지 않도록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을 인용해 고린도 교인의 헌신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고린도는 잘 발달된 항구도시이자 문화와 문물의 교류가 합류되는 지역이으로 굉장히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음란하고 방탕함으로 인해 ‘고린도식으로 산다.’라고 말하면 ‘매춘행위를 한다.’ ‘방탕하다’란 의미로 사용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풍부하면서도 방탕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반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과 많은 시련, 극한 가난과 씨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통해 많은 교회의 본이 되었고,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위한 자극제로 바울이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마게도냐의 풍성한 연보에 대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배경과 두 가지 상태를 언급해주고 있다. 배경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이다. 그들의 환경은 결코 안락하지 못했고, 여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심한 박해와 핍박과 고난 속에서 힘든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들의 마음은 그로 인해 깨어 있었고, 방심할 수 없었고, 물러서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근신하고 깨어 신령한 두려움과 간구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또한, 그들의 두 상태는 첫째, 넘치는 기쁨의 상태이었고, 둘째, 극한 가난이었다. 뭔가 모르게 극명하게 대조적인 이 상태가 진실로 마게도냐 성도들의 상태였다. 그들은 환경적으로도 고난 속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심한 가난과 곤핍 속에서 넉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한 가지의 능력이 있었는데 ‘넘치는 기쁨’에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마게도냐 성도들이 직면한 환경과 그들의 두 상태를 언급하면서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연보’를 가능케 한 비결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은 심한 박해와 고난, 극한 가난 속에서 조금도 여유롭지 못했고, 안심할 수 없었고, 풍요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깨어 바라보고 경외함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모든 성도를 섬기는 일에 철저히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깨닫게 되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왜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가난해서가 아니며, 우리가 고난과 곤란 속에 있어서가 아니며, 오직 우리는 ‘넘치는 기쁨’이 턱없이 부족한 것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고린도식처럼 살아가면서 세속에 물들고, 세속에 기뻐하고, 경건한 기쁨과 성령의 기쁨을 너무나 잊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희락이 없음으로 해서 우리가 더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헌신하지 않는다. 아직 육적인 부족을 더 채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변명하면서 영적인 연보를 좀 먹는다.

사실 신앙의 모든 능력과 헌신과 동기부여의 그 바닥에는 ‘기쁨’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들도 고난 중에 전도하면서도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 13:50-52, 개역)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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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더러움_2011.04.13.

(고후 7:1, 개역)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더러움은 누구나 선호하지 않으며, 그것은 피하고 거부하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두 가지 더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그 더러움의 정체는 ‘육적 더러움’이다. 이는 다르게 표현할 때 정욕적인 더러움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육신적인 것이 정욕적인 것과 일맥상통하게 쓰여 진다. 이 육적 더러움도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성적(性的)인 부분에서의 본능적이고, 원색적이며, 색욕적인 더러움을 말한다. 성경이 정죄하는 음란, 호색, 음심 등 이다. 베드로전서는 이런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 말한다.
(벧전 4:3, 개역)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둘째, 이것은 세상을 좇는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방향. 그것은 ‘육적 더러움’이다. 보다 나은 집, 차, 옷, 유행에 부합하는 헤어스타일, 멋. 세상적인 허영심과 부귀영화에 대한 목적과 갈망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러움이다.
(요일 2:16, 개역)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셋째, 이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이기심과 허영심, 명예욕 등의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더러움이다. 사람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주님은 위대하지만 겸손히 낮아지셨고, 완전한 빛이시지만 죄인보다 처참해지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뛰어넘은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를 교훈 받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이기심이 자기를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은 ‘육적 더러움’이다.
(유 1:16, 개역)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약 4:1, 개역)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다음으로 더러움의 정체는 ‘영적 더러움’이다. 이것은 주로 영혼 안에 있는 더러움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외적인 행위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정도 오염되면 필연적으로 외적으로도 표출되게 된다.

첫째, 이것은 모든 교만의 부류들이다. 교만, 오만, 거만, 자만, 고집 등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더러움’중에 하나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실패한 이유와 천사 루시퍼가 타락한 원인도 바로 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치면적인 실패와 멸망을 일으키는 지독한 더러움이다.
(약 4:6, 개역)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잠 18:12, 개역)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둘째, 이것은 영적 무기력이다.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근신시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안에서 깨어서 행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그들은 신령한 것을 알 지각이 부족하며, 영적으로 무지하다. 그들은 많은 사안에서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택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영적으로 어두운 것이다.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전 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셋째, 이것은 우상이다. 우상숭배는 영혼의 더러움 그 자체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탐심조차 우상숭배이다. 또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행 15:20, 개역)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넷째, 이것은 그 무엇보다 ‘거짓된 교리’이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에게서 이 거짓된 교리의 미혹과 도전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성도들의 영혼이 더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요이 1:7, 개역)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종류의 대표적인 더러움이 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과 가치관과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되는 더러움들이며, 위험들이다.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질만한 더러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구별되어 ‘교회’(에클레시아)로 불려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 더러움이 남다르다. 우리를 너무나도 쉽게 더럽히게 하는 이 악한 세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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