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나타나야할 근심_2011.04.13.

(고후 7:10-12, 개역)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일반적으로 근심이나 염려는 덕이 아니다. 그럼에도 옳은 근심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그러나 이 근심은 생각처럼 흔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덕이 되지 않는 근심에 줄곧 노출된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참된 근심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면밀히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가운데 유발되는 신령한 근심이며, 주의 뜻 앞에 올바르지 못한 자신에 대한 가책과 발견이다. 이 근심이 가지는 특징은 이미 11절부터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특징은 이와 같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만든다. 낮아지고, 마음이 깨지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절히 사모함으로 구하게 된다. 또한, 변명한다.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잘못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그릇되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오류에 대해 읊조리기 시작한다. 또, 분노한다.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해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더 멀리 떨어져 나갈까봐 두려하고 떤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간절히 사모한다.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와 소망을 간절히 갈망한다. 열심을 품는다. 신령한 열정, 회복에 대한 근신에 대한 열심을 품는다. 그리고 벌한다. 자신의 그릇됨에 대해 스스로 책망하고 자신을 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지혜로워질 것을 권면한다.

 결국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철저히 반성하고 뉘우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온간 거짓과 위선과 허영과 명예욕과 교만과 오만으로 얼룩진 자신이 씻겨져 가고 하나님 앞에서 일절 깨끗함을 찾아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이러한 신령한 근심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의 잘못, 자신의 실패와 그릇됨에 대해서... 그러나 정작 하나님 앞에서 깨지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피상적인 후회와 반성에 머무를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근심이 아닌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러한 근심은 일절 깨끗함이 되어지는 근심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회개와 정직함, 간절함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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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연보의 비밀_2011.04.13.

(고후 8:2-3, 개역)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연보에 대한 권면을 한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도 연보를 준비하고 있었음으로 바울은 그들의 준비가 부족하지 않도록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을 인용해 고린도 교인의 헌신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고린도는 잘 발달된 항구도시이자 문화와 문물의 교류가 합류되는 지역이으로 굉장히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음란하고 방탕함으로 인해 ‘고린도식으로 산다.’라고 말하면 ‘매춘행위를 한다.’ ‘방탕하다’란 의미로 사용될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풍부하면서도 방탕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반해 마게도냐 성도들은 환난과 많은 시련, 극한 가난과 씨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통해 많은 교회의 본이 되었고,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위한 자극제로 바울이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마게도냐의 풍성한 연보에 대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배경과 두 가지 상태를 언급해주고 있다. 배경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이다. 그들의 환경은 결코 안락하지 못했고, 여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심한 박해와 핍박과 고난 속에서 힘든 신앙의 여정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들의 마음은 그로 인해 깨어 있었고, 방심할 수 없었고, 물러서 잠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근신하고 깨어 신령한 두려움과 간구함 속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또한, 그들의 두 상태는 첫째, 넘치는 기쁨의 상태이었고, 둘째, 극한 가난이었다. 뭔가 모르게 극명하게 대조적인 이 상태가 진실로 마게도냐 성도들의 상태였다. 그들은 환경적으로도 고난 속에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심한 가난과 곤핍 속에서 넉넉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한 가지의 능력이 있었는데 ‘넘치는 기쁨’에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마게도냐 성도들이 직면한 환경과 그들의 두 상태를 언급하면서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풍성한 연보’를 가능케 한 비결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은 심한 박해와 고난, 극한 가난 속에서 조금도 여유롭지 못했고, 안심할 수 없었고, 풍요롭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깨어 바라보고 경외함으로 인해 ‘넘치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모든 성도를 섬기는 일에 철저히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깨닫게 되는 교훈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왜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가난해서가 아니며, 우리가 고난과 곤란 속에 있어서가 아니며, 오직 우리는 ‘넘치는 기쁨’이 턱없이 부족한 것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고린도식처럼 살아가면서 세속에 물들고, 세속에 기뻐하고, 경건한 기쁨과 성령의 기쁨을 너무나 잊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풍성한 희락이 없음으로 해서 우리가 더 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면서 헌신하지 않는다. 아직 육적인 부족을 더 채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변명하면서 영적인 연보를 좀 먹는다.

사실 신앙의 모든 능력과 헌신과 동기부여의 그 바닥에는 ‘기쁨’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들도 고난 중에 전도하면서도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행 13:50-52, 개역) 『[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51]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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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더러움_2011.04.13.

(고후 7:1, 개역)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더러움은 누구나 선호하지 않으며, 그것은 피하고 거부하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두 가지 더러움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더러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그 더러움의 정체는 ‘육적 더러움’이다. 이는 다르게 표현할 때 정욕적인 더러움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종종 육신적인 것이 정욕적인 것과 일맥상통하게 쓰여 진다. 이 육적 더러움도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이것은 성적(性的)인 부분에서의 본능적이고, 원색적이며, 색욕적인 더러움을 말한다. 성경이 정죄하는 음란, 호색, 음심 등 이다. 베드로전서는 이런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 말한다.
(벧전 4:3, 개역)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둘째, 이것은 세상을 좇는 것이다. 세상적인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방향. 그것은 ‘육적 더러움’이다. 보다 나은 집, 차, 옷, 유행에 부합하는 헤어스타일, 멋. 세상적인 허영심과 부귀영화에 대한 목적과 갈망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더러움이다.
(요일 2:16, 개역)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셋째, 이것은 자기 내면에 있는 이기심과 허영심, 명예욕 등의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더러움이다. 사람은 언제나 이기적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원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주님은 위대하지만 겸손히 낮아지셨고, 완전한 빛이시지만 죄인보다 처참해지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기심을 뛰어넘은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를 교훈 받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이기심이 자기를 움직이고 있을 때 그것은 ‘육적 더러움’이다.
(유 1:16, 개역)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약 4:1, 개역)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다음으로 더러움의 정체는 ‘영적 더러움’이다. 이것은 주로 영혼 안에 있는 더러움이라 생각할 수 있으며, 외적인 행위로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정도 오염되면 필연적으로 외적으로도 표출되게 된다.

첫째, 이것은 모든 교만의 부류들이다. 교만, 오만, 거만, 자만, 고집 등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더러움’중에 하나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실패한 이유와 천사 루시퍼가 타락한 원인도 바로 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에게 영적으로 치면적인 실패와 멸망을 일으키는 지독한 더러움이다.
(약 4:6, 개역)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잠 18:12, 개역)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둘째, 이것은 영적 무기력이다.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근신시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안에서 깨어서 행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인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그들은 신령한 것을 알 지각이 부족하며, 영적으로 무지하다. 그들은 많은 사안에서 영적으로 분별하여 선택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영적으로 어두운 것이다.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전 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셋째, 이것은 우상이다. 우상숭배는 영혼의 더러움 그 자체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탐심조차 우상숭배이다. 또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이다.
(행 15:20, 개역)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넷째, 이것은 그 무엇보다 ‘거짓된 교리’이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대부분의 많은 교회들에게서 이 거짓된 교리의 미혹과 도전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성도들의 영혼이 더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갈 1:6, 개역)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요이 1:7, 개역)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종류의 대표적인 더러움이 있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과 가치관과 우리의 영혼에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되는 더러움들이며, 위험들이다.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당연히 받아들여질만한 더러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서 구별되어 ‘교회’(에클레시아)로 불려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 더러움이 남다르다. 우리를 너무나도 쉽게 더럽히게 하는 이 악한 세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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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성공이 가져다 준 오만_2011.04.09.

(창 16:4, 개역)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고대로 갈수록 여자에게 있어 잉태와 생산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임무였다. 그러므로 무자(無子)하다는 것은 여인에게는 수치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죄로 인한 징벌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이는 무자(無子)한 여자에게는 안팎으로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사라역시 무자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남편 아브라함과 더불어 살았지만 그녀에게는 희한하게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이는 아브라함의 가계(家繼)에서 보자면 단순히 묵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라는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되는 결손을 보충하기 위해 인간적인 방편을 선택했다. 이는 애굽 여종 하갈을 통해 대신 아들을 얻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주효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필요 없이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집안의 가계(家繼) 문제는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또 그것은 다른 문제의 시작이란 것을 이내 알게 해주었다. 하갈이 득남하기 전까지 비록 사라에게 아들은 없었지만 그것이 하갈의 비웃음을 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갈이 주인의 아들을 얻게 되자 여주인 사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종으로 사라의 수하에서 그저 고분고분히 시키는 일에 순종하고, 굽신거렸던 하갈이 이제는 주인의 아들 젖을 먹여야 한다고 시키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방안에 앉아 젖을 물리며 사라의 부름에 그다지 적극적이고 공손히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틈만 나면 아들 핑계를 대며 사라의 수하에 복종하는 것보다 주인의 귀한 아들을 양육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라고 둘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라는 부애가 나기 시작했고, 차츰 그것은 어느 정도의 히스테리적인 경향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사라는 하갈을 학대함으로 참다 못한 하갈이 사라의 수하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얻음으로 사라를 멸시했다. ‘주인 아브라함의 대를 이을 아들도 못낳는 여주인이라니... 나 봐. 몇 번 아닌데도 바로 주인님의 아들을 잉태했잖아. 이제 이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이 주인님의 대를 이을 아들이 되는 거라구!’

그러나 그 아들 이스마엘은 그토록 위대한 아들이었을까?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비록 하갈은 아브라함의 첫 아들을 생산했지만 사실 그 아들은 언약의 아들이 아니었으며, 육신에 속한 자를 표상하고, 율법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했다.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 아브라함의 믿음의 혈통을 이을 아들은 여전히 사라의 태를 통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갈은 보다 크고 넓은 하나님의 계획과 자신의 근본적인 처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오만과 방자함에 빠졌던 것이다. 여주인 사라의 태를 통해 얻을 이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지 못한 채 얄팍한 성공에 마음이 높아져 여주인을 멸시한 하갈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하갈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교훈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얄팍한 성공에 도취되어 자기를 높이고 오만방자하게 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보다 무엇이라도 하나 좀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재능이든 육신적인 배경이나 조건이든 좀 나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내 정도 수준이면 이런 이런 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 이런 정도의 밸류는 갖춘 것이 필요하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 말로 하갈의 오만함과 일치한다.

하갈이 아무리 사라를 멸시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라는 여전히 여주인이란 사실이며, 하갈은 여전히 사라의 수하에 있는 여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아무리 하갈이 우선적으로 이스마엘을 잉태했을지라도 여전히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아들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에게는 그 어떤 언약도 약속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하갈이 오만방자해진 것은 여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아들을 여주인 보다 먼저 임신했다는 그 자부심 하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원대하신 계획이 여전히 여주인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 100세 때 얻을 이삭을 통해 예정되어 있음을 하갈이 알았더라면 과연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렇게 크게 하나님 앞에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육신적으로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보기에 좀 부족해보이는 형제, 자매님이 있다고 그것을 자기 수준에는 안 맞게 생각하고, 멸시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하갈식 오만’에 빠진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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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때를 극복하는 법_2011.04.01  


(창 12:10, 개역)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부르심을 받아 위대한 여행을 시작한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오래지 않아 기근이 찾아왔다. 이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고난이었다. 그 먼 거리를 동족과 모든 혈연을 포기하고 떠나왔건만 고작 기근이라니... 그러므로 아브람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납득할 것이었다. 그러나 애굽에서 그는 사래를 누이라 속임으로 바로에게 아내를 뺏기고 말았다. 그는 더 큰 시련을 만났던 것이다.

분명, 애굽을 선택한 것은 아브람의 실수요 믿음의 부족이라 생각되면서도 동시에 마치 이것은 아브람을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숨은 의도와 목적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기근을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근을 보내심으로 가나안에 머물러야 되는 아브람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으며, 그로 하여금 애굽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의지를 시험하셨다. 그때 아브람은 그 시험에 반응하였다.

(창 16:8-9, 개역)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사래가 무자(無子)할 때 하갈은 아브람의 씨를 이을 아들을 낳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오만방자해졌고, 심지어 사래를 비웃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사래의 질투심과 분노에 불이 붙었고, 그는 사래의 학대를 당하게 됨으로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갈의 정신적 고통이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은 비통한 말씀하신다. 다시, 사래의 수하로 돌아가 괴로움을 당하라고 말이다.


앞서의 두 사례가 알려주는 공통된 교훈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과 고난, 시련과 시험의 때에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이다. (아마,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싶어하실 것이다.) 결론은 고난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하갈은 사래 밑으로 되돌아갔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 사래의 밑에서 내어쫓김을 당했다.(창21:10) 결국 아브람 역시, 애굽에서 가나안의 벧엘로 되돌아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창13:3-4) 하나님 계신 벧엘이 때로는 기근이 있는 고난의 장소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험의 때를 우리가 어떻게 보내고 극복해야 할 것인지 배우게 된다. 그것은 피하고 싶은 그 현실을 피하지 않는 것이며,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그만이라고 하실 때까지.

(약 1:12, 개역)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는 말한다. 시험의 때 그 시험을 이기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신다. 죄의 유혹과 같은 시험은 이겨야할 시험이지만 고난의 시험은 참아야 될 시험이다. 그 시험을 잘 참을 때 하나님께 인정함을 얻고 약속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되 옳다 인정하심을 얻기까지 참아야 하는 것이다.


(약 1:2-4, 개역)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난의 시험을 참는다는 것은 곧, 고난의 때를 인내함이다. 하나님은 이 고난의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이 시험이 인내를 유도하며, 이 인내를 이룰 때 보다 완전하고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즉, 고난 중의 인내는 성숙의 씨앗인 셈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 자체가 곧, ‘인내하라’란 것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허락하신다. 그 시험을 통해 인내함을 배우고, 인내함을 통해 약속된 복을 받으며, 그 인내함을 통해 더욱 온전하게 성숙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의 때를 극복하는 방법이란 어떤 특별한 진통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내’ 그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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