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_2011.05.29.
요즘 교사모임 때 ‘영적침체’란 주제에 대해 교사들과 묵상을 나누고 있다. 이 주제가 가지는 가치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이란 것이며 또한, 이 슬럼프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도다운 삶의 매력과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침체되는 원인과 이유의 다양성은 탐색해볼수록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지만 분명 하나의 공통된 요소를 찾을 수는 있다. 불만족.
문득 오늘 이 주제는 왜 의미 있는 것일까?
대개 어떤 문제란 것을 갖고서 상담을 요청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현재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과 상태, 환경과 조건에 대해 전적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야기되는 갈등과 고민 때문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방향과 방법에 대한 분명한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지와 우유부단함 때문에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또 누구는 그릇된 결정 때문에 근심한다. 또 한편에선 보다 더 주님을 잘 섬기고 싶은, 더 완전해지고 싶은 자신의 갈망을 이룰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불만족한다.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그러므로 그 불만족은 근심을 야기시키고 우리는 침체되어 간다.
선한 갈망이든 그릇된 욕망이든 선악의 유무를 막론하고 우리가 만족할 수 없을 때 우리가 한결같이 근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의 만족은 무엇일까? 정직하게 말해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이기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기심을 채울 수 없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증거한다. 더불어 우리는 ‘주님’의 존재를 가장 비중 있게 인정한다. 그러나 솔직한 나의 고민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주님을 인정하고 싶은 걸까?
이번 주 청년회 묵상이 로마서 4장18-21절 말씀이다. 그 묵상조차 지금 내가 말하는 주제의 한 맥락에 재료를 제공해준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고 의심치 않고 견고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확신했다고, 그것이 ‘의’로 여김을 입었다고.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안다. 기근을 피해 약속한 땅을 떠났고, 두 번 씩이나 아내를 부인했으며, 처음 이삭을 약속받았을 때 그가 하나님께 했던 말은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주소서.’ 바로 그것이었음을.
아브라함의 확신,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믿음의 깊은 실패와 좌절을 맛봤다. 그가 자기나 사라나 그 육체의 소망이 끊어짐을 알고 이삭의 출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처음 회의적이었을 때, 그러나 정녕 그 이삭을 껴안았을 때 받았을 충격, 그 깊은 회개와 각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그것을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바뀔 때 믿음이 약하여지고 만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한다. 불만족스럽다. 확신하지 못한다. 의심한다. 그러므로 견고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영광은 실추된다. 의로 여기심을 입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아브라함의 그 믿음. 그것은 그냥 하늘로부터 던져준 믿음이 아니란 것. 그가 그 모리아 산에서 조금도 두려움 없이 나아가 이삭의 머리 위에 칼을 드리울 수 있을 만큼 믿음의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믿음의 훈련 없이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훈련 받은 믿음의 진수!’
그리고 우리가 다룰 문제도 바로 여기서 발견된다. 견고한 믿음은 우리가 꿈꾸는 갈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훈련?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에 부합되지 않는다. 훈련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우리를 근심에 빠트리는 것이며, 종종 우리가 침체되는 이유조차 되기까지 한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익히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훈련을 싫어한다. 우리는 이기심을 이루길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싶어하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고백한다. 때때로 나는 차라리 내 삶의 주인이 나였으면 싶다고. 미안하지만 이것이 나의 정직이다.
주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을 포기해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굴복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굴복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인정해야 된다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정답을 말해줄 자격이 부족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결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근심과 침체의 근원적인 이유 중 하나는 분명 불만족이다. 그리고 그 불만족의 동기는 또한, 굴복하지 못함이다. 우리는 바울이 정말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는 십자가 외에는 모두 배설물로 여겨졌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그 많은 환란과 곤혹스런 환경 속에서도 기뻐했던 이유가 이상하고 되물을 필요가 없다. 바울의 고백은 정직했다.
다만, 우리의 마지막 남은 고민은 우리의 만족 역시 굴복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제쯤 굴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