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화살에는 초점이 없다_2012.03.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5.)

 

(삼상 4:5-11, 개역)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법궤를 빼앗긴 기막힌 사연을 만난다. 법궤의 신적권위와 능력의 임재를 상기해볼 때 법궤가 이방인의 칼날에 뺏겼다는 것은 상상불허의 사건. 그 사건의 전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맞섰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에벤에셀의 곁이었고, 블레셋의 진영은 아벡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패했던 것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진영이 에벤에셀의 곁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부여를 주는 것만 같다. 훗날 블레셋을 쳐부쉈을 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해서 에벤에셀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그 도우심을 빗겨 진쳐있었다.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다. 무려 4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단의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결국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진영의 안으로 모셔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전투의 열세 중에 왜 법궤를 찾았던 것일까?

 

언약궤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물리적인 증거였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는 모든 백성의 앞에서 나아가 강물을 갈랐고, 강의 중간에서 이스라엘이 모두 건너기까지 기다렸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언약궤와 더불어 성을 돌았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한다는 것은 사실적인 하나님의 임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의 현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쟁의 열세 속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언약궤의 필요를 직감했던 것이다.

 

언약궤가 실로에서부터 전장의 진영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이 이미 승리라도 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가 얼마나 컸던지 블레셋의 진영에서조차 언약궤의 입성을 눈치챌 정도였다. 그리고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블레셋은 용감했다. 사실은 무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용감한 꼴이 되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혼신을 다해 전쟁에 임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물리쳤고, 덤으로 생각지도 않은 언약궤마저 손아귀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날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차 전투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무려 3만명의 보병이 사망했다.

 

전투의 몰패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은 이내 이스라엘에 퍼져나갔다.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꼬꾸라져 목이 부러진 채 죽었다. 그의 며느리는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쇼크사했다. , 그 위대한 언약궤. 하나님의 현현을 실감케 했던 그 신적 권위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 할 뿐더러 블레셋의 더러운 손에 빼앗기다니! 도무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극단의 현상 속에서 심장이 떨리는 소리가 울리고, 턱이 덜덜거렸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언약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관념은 재정립되어야만 했다. 먼저, 언약궤가 그들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늘 언제나 그들을 지켜주는 신적 권능의 발현이 될 수 없다라는 것.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언약궤는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능력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언약궤를 소유하는 문제가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라는 것. 그럼 본질은 무엇이었던가?

 

언약궤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서 능력의 근원이 아니었다. 유능함이 아니었다. 언약궤가 신적 권능으로 그들 가운데 임할 수 있음에는 그들의 삶의 정신과 예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을 때라는 그것. 그렇다. 그들이 요단을 건널 때 그들의 믿음은 약속의 땅을 정복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때 언약궤는 권능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온통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언약궤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실로에 언약궤를 모셔놓았을 뿐. 예배하는 정신을 버렸다.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제사를 버젓이 자행했다. 이스라엘의 예배하는 정신과 초점이 완전히 휘어져버렸다. 마치, 쏴서 날아가는 화살이 그 힘을 잃고 공기의 저항에 휘어지듯이. 그러므로 더 이상 언약궤는 무능해져버렸다. 그제서야 언약궤가 그 자체로서 유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 충격적인 패배의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한 복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출석하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수행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아래에 있다는 완전한 증거가 아니었다. 몸은 예배의 장소에 있음, 수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예배의 정신에 있어서 만큼은 잃어버린 언약궤와 다를 바 없는 우울한 실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능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기까지 했다. 나에게 살아 숨쉬는 예배하는 정신이 없다라면 그것이야 말로 언약궤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초유의 사태는 그 날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 이가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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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답습_2012.03.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4.)

 

(삼상 3:13, 개역)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자가 가져온 제물을 마음대로 취했다.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는 솥이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걸려 나오는 것을 맘대로 취했다. 때로는 제물을 태워 드리기도 전에 날 것을 원한다며 빼앗아 갔다. 그러나 율법은 제사장의 몫은 오직 고기의 가슴과 우편뒷다리였음을 명시했다. 최초 성막이 지어지고, 제사에 대한 규례가 선포되었던 출애굽기나 민수기의 장면을 되뇌어볼 때, 엘리 아들들의 이러한 파렴치한 행동은 극악무도한 것이다.

 

그러나 비단 엘리 아들들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불량자들의 문제가 바로 제사장 엘리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제사장 엘리 가문이 그 아들들의 저주와 죽음을 기점으로 몰락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영영할 제사장의 직위도 더 이상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엘리의 명백한 잘못의 정곡을 찌르셨다.

 

네가 네 아들들의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도다.’ 엘리는 그들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로 키워버렸다. 엘리는 자식들의 잘못과 그릇된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는 그것을 다스려야만 했으며, 제어해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그러한 의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하지 않았다. , 엘리는 방관하였던 것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인 의무는 특별한 책임이다. 그러나 엘리는 자식들의 불량한 신앙에 대해 올바른 훈계를 겸하지 않고, 어떤 구심점을 제공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나무라지도 제어하지도 않았다. 그 모든 방관자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자녀들이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불량자로 자랐음에도 여지없이 제사장의 가문이라는 혈통에 근거해 직분을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완전히 짓밟히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폐단에 대해 하나님은 특별히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어 엘리의 잘못과 그 자식과 가문의 몰락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엘리는 사무엘에게 직접 그 예언을 전해듣게 된다. 그때 사무엘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처음엔 말을 하지 못했으나, 엘리가 있는 그대로 다 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길 원한다고 촉구함으로써 떨리는 심정으로 낱낱의 예언을 전했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은 흘렀다. 예언대로 제사장 엘리 가문은 몰락했고, 사무엘은 차기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를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사무엘은 최초의 순회 설교자로서 매년 벧엘과 길갈, 미스바로 순회하며 설교했다. 그의 주거처는 라마였고, 그곳에 선지자학교를 세워 후임을 양성했다. 사무엘은 유능한 사사이자, 존경 받는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예기치 않은 사무엘의 무모함을 발견케 된다.

 

사무엘이 늙고 그 아들들이 사사의 직분을 이어받았다. 요엘과 아비야.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제 우리에게 왕이 필요하다라고 말이다.

 

사무엘의 무모한 답습은 그렇게 이뤄졌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그가 어려서 제사장 엘리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하나님의 음성이 자식에 대한 신앙의 올바른 교훈을 충분히 하지 못한 엘리 가문의 몰락으로 경고되었음을 직접 들었었다. 그 두려움과 떨리는 심정으로 엘리 앞에서 고백했던 그 사무엘. 그러나 사무엘 역시 자신의 아들들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 앞에 나아와 그 아들들의 허물에 대해 호소할 때 사무엘의 심장은 떨려야했지 않았을까?

 

사무엘만큼 신앙의 2세대에 대한 1세대의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듣고, 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역시 그 책임에 완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무모함은 삶의 수많은 영역에서 우리 역시 답습하고 있는 무모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과 진리, 순종과 불순종의 기로, 겸손과 오만, 참된 의무와 가치, 징계와 회개.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빨리 순결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과오의 고통과 수치를 망각한 채 무모한 답습을 해버린다. 올바른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궤도를 이탈해버리면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을 잃어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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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하나님_2012.03.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3.)

 

(삼상 2:6-8, 개역)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 역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한나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찬송을 드리기까지 그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한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큰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브닌나에게는 큰 고통인 동시에 심한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브닌나에 비해 한나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부족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그 제물이 나올 때마다 브닌나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 한나는 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은 브닌나의 입장에서는 깊은 슬픔이었다. 브닌나는 자식도 낳아주었지만, 한나는 무자했다. 그러므로 브닌나의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브닌나는 한나의 무자함을 물고 늘어져 고통을 주려고 했다. 한나가 무자함으로 인해 받는 고통은 그녀의 가장 큰 고통인 동시에 거의 유일한 결핍이었다. 마치, 사랑 받는 라헬이 무자하였던 것처럼.

 

만약, 한나가 자식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결핍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유능할수록, 사랑을 받는 자일수록 결핍을 경험해보는 것은 가장 필요한 경험이다. 한나에게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매우 교만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릴 사무엘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큰 결핍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게 했다. 한나가 말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한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그녀가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통회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는 무사안일과 만족의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는 서글픈 신앙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부족함과 결핍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한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고, 그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이다. 늘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려가고, 만족스러워질 때 우리는 거의 그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높아지고, 오만방자해져서 객기를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로 하여금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고, 어떤 특정 부분에서는 한나와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부족과 고통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정직해지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나를 사랑하셨다. 그녀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완벽한 그녀가 가지게 될 유일한 결핍이 도도함과 간구하지 않는 심령임을 아셨다. 사람은 어딘가에서는 결핍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우리도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결핍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안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통 받는 하나의 마음이 무르익어 가던 찰나 그 마지막에 도달했다. 해마다 실로의 하나님 집에 제사를 하러가던 한 날이었다. 실로의 전에서 결국 그 마음이 완전히 깨져 쏟아졌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 기도와 간구. 그 모든 것이 깨졌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한나의 결핍과 고통 받는 심령이 무르익어갔던 것이다. 이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기가 온 것.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통 받는 마음은 무르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와 고통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신음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가눌 수 없는 호소의 때가 온다. 그 시간이 무르익기까지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며, 힘든 연단의 시간들이다.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쏟아졌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음성을 들으셨다. 물론, 이미 들으셨지만 열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의 호소가 하나님께 열납될 시간이 왔다. 하나님은 그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아들을 얻기를 구하기까지 그녀를 짓누르셨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한나를 통해 그녀의 태를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뤄갈 종을 세우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의 넓이는 얼마나 큰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만 구하게 되기를. 우리 상심의 마지막은 이기적인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잉태한 한나가 서원대로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쳤다. 그때 그녀의 고백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간곡히 구했던 그녀는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셨다. 주신 하나님께 그러므로 자신도 다시 돌려드린다고.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와 외침이 정말 정직한 그 절정까지 도달했음을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그녀는 정말 벼랑끝까지 가서 자신을 포기하고 구했던 것이다. 브닌나를 위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의 참된 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승화된다.

 

모든 서원하던 바들이 종지부를 찍었다. 한나는 그녀를 짓누르던 가장 큰 결핍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우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황홀한 심정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의 소리를 듣는다. 2장에서 시작되는 한나의 찬송소리와 기쁨의 기도소리가 하늘을 울린다. 한나가 누린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엄청나고 컸는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삼상 2:1-3, 개역) [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그녀의 결핍과 고통, 고통의 무르익어감, 상한 심령과 깨어짐,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 한나의 찬양과 기쁨.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그리스도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보았는가. 마지막 그녀의 격앙된 찬양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한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케 되었다는 것이다. 결핍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으로 인해 상한 심령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할 보석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항상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나님의 긍휼과 채우심을 맛보는 동시에 입술로만 알았고, 성경의 글귀로만 알았고, 지식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의 놀라움을 실제로 체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한나의 찬양소리가 그냥 찬양의 감탄이 아니다. 그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한나의 놀라운 간증이다. 상한 심령의 깊은 곳까지 치료시켜주시는 하나님. 울부짖던 마음의 깊은 곳까지 기름과 기쁨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변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 크고 위대하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참된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진정한 체험과 고백. 바로 그것이 참된 그리스인에게 필연적인 체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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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그녀는 순수하다_2012.03.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2.)

 

( 3:5, 개역) 『룻이 시모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기의 매력은 시적이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와 더불어 분명하고 충분한 교리적 뼈대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2장부터는 룻의 러브스토리가 싹트게 되며, 신앙의 비전을 따라간 룻의 정직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의 백마 타신 보아스 왕자님은 백마 타신 예수님의 정확한 모형이다. 모압여인이면서 이방여자로서 은혜와는 멀어져 있는 그녀가 믿음으로 보아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 자체가 은혜에서 멀었던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을 잘 보여준다. 룻은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던가. 그녀는 이방여인이지만 믿음으로 다윗의 조모요, 그리스도의 직계 혈통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하게 되었다.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큰 일을 이룰 수 있는가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제 그녀의 러브스토리를 조금 감상해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한때 결혼까지 했던 젊은 룻이란 여인의 순박함에 매료될 것이다. (좀 차갑게 표현하면 그녀는 과부이지만)

 

늙은 시모를 쫓아 낯선 이방의 땅 베들레헴으로 이주해온 모압여인. 남편까지 읽은 과부의 신세요, 늙은 시모를 모셔야 하는 처량함. 조금이라도 세상을 안다라면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만 했다. 초라하고, 불쌍하고 자기 신세가 안타까웠을 것이다. 더구나 이방여인이기에 사람들의 숨은 천대와 무시는 더 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절박한 환경이었다. 솔직히 나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그러나 룻은 말했다. 어머니 저로 밭으로 나가서 이삭을 줍게 허락해주세요. 누군가가 은혜를 베푼다면 제가 이삭을 주울 수 있을 거예요.’(2:2) 충격이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부두막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여리지만 강인한 그녀의 순수한 삶에 대한 열정과 애착은 스스로를 밭으로 나가게 종용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순박한 여자였다.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초라하게 보이고, 보잘 것 없이 보여지든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시어머니와 신앙의 땅으로 왔으며, 이제 베들레헴이 그녀가 정착하고 늙은 시모와 재기해야 할 땅이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히 모질고 독한 마음을 품은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덤덤히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그만큼 룻, 그녀는 순박하고 꿋꿋하고 겸손했다. 결국 그녀는 영악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세대가 주는 서글픔이 무엇일까? 우리가 너무 약았고, 영악해졌다는 사실이다. 철저한 미래지향적인 사고방식, 현실적인 비전에 대한 많은 비중,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양식. 똑똑하고 유능한가 아닌가의 판단, 보여지는 것에 대한 의미부여. 그러므로 늘 우리를 싸고 있는 위선의 포장. 최종 잃어버린 순수함과 순박함. 아마,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가식의 문제는 그 옛날 바리새인의 위선의 문제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그것 역시 마찬가지.

 

룻은 종용하며, 소박하며, 순박하고, 겸손하며, 꿋꿋한 여자였다. 나오미가 그녀에게 은혜를 입도록 돕기 위해 보아스의 곁에 머물도록 조언했다. 심지어 보아스가 근족이자 유력한 자로써 잃어버린 자기 기업을 되사서 무를 수 있는 사람임을 생각했을 때, 나오미는 적극적으로 룻으로 하여금 보아스에게 다가서야 될 것을 가르쳤다. 그때도 룻은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그 어느 날, 나오미는 룻에게 말했다. 오늘 밤 보아스가 눕는 자리를 보아둬서 그곳에 가서 함께 누우라고 말이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발라 깨끗이 단장을 한채로 그의 눕는 자리에 같이 누우라고 말이다. 그때도 룻은 순종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나오미의 요구는 룻에게 매우 곤란한 요구임이 틀림없었다. 결코 쉬운 요구는 아니었다. 룻은 모압여자였다. 이방여자이면서 동시에 한때 결혼해서 남편을 둔 유부녀였다. 현재는 남편과 사별하고 과부의 신세이다. 고작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 밑바닥에 있는 처지였다.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나오미의 요구는 자칫 일이 그릇될 경우 룻으로 하여금 심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방여인 주제에 부정을 시도한 죄로 몰릴 수 있고, 생계의 유일한 수단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맞아 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보아스의 룻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이고 친절을 베풀었으며, 그가 기업을 무를 자격이 있음을 감안할 때 용기를 얻었겠지만 그렇다할찌라도 용기를 내기 쉽지는 않을만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녀는 여러 말이 필요 없이 그저 종용한 목소리로 단 한 마디를 내뱉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그녀의 종용함과 소박한 성품, 믿음이 반짝반짝 빛나지 않을 수 없는 한마디.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며, 겸손하고 순박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말했다. ‘이 성읍 사람들 모두가 너의 현숙함을 안다.’라고 말이다. 그녀는 빛나는 보석이었다. 또한, 보아스는 말한다. ‘네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젊은 남자를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3:10) 그러한 사실과 생활 속에 보여진 룻의 단아함은 모든 성읍사람들의 마음 적셨다.

 

분명, 룻은 성경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가장 실제적인 모형일 것이다. 그녀가 이방여인이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녀는 가장 순수한 성품과 고결함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순박함이 우리의 마음마저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분명 우리 역시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룻의 소박하고 순박한 믿음과 겸손은 필요한 것임을. 그리스도인면서도 너무나 이기적이었고, 영악하고 계산적이었던 많은 모습들을 부끄럽게 한다. 위선의 많은 가면들을 불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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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vision, 비전 없는 과녁의 정중앙에 활을 꽂다_2012.03.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1.)

 

( 1:11, 개역) 『나오미가 가로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의 태중에 너희 남편될 아들들이 오히려 있느냐

 

계속해서 룻기 1장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삶의 윤리가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의 일에 대해 두려워한다. 현재의 상태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현재의 상태가 곤란하다면 우리는 거의 필연적으로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엘리멜렉이 그러했다. 현재의 베들레헴의 닥친 흉년이라는 곤란이 계속해서 베들레헴에 머물렀을 때의 미래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근심하던 그는 모압으로 가는 것이 미래에 대한 올바른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회사를 선택할 때, 배우자를 선택할 때 등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떤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반드시 그것이 제시하는 미래의 가능성, 비전에 대해 심도 있게 살펴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룻의 선택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이 엘리멜렉과 룻의 삶의 윤리가 분명히 대조된다는 의미이다.

 

모압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돌이켜 베들레헴으로 복귀하려고 했다. 그것은 방향을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나오미의 깊은 회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큰 고통을 경험하며, 그들이 나아온 모압이 하나님 앞에 틀린 것임을 알았다. 어쩌면 나오미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완고했을 것이다.

 

막상 베들레헴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고 났을 때, 나오미는 두 며느리가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함께 살아온 가족이기에 두 며느리도 함께 시어머니를 쫓아 베들레헴으로 가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정작 그들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다한들 별다른 대책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아직 젊은 두 며느리, 재기할 기회가 있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찾아 헤어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권유를 하게 되었다. 분명, 그 마음이 쉴사이 없이 아팠을 것이다.

 

( 1:13, 개역)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말했다. 너희들도 각자 너희 백성과 너희 신()에게로 돌아가라고. 나를 따라와봐야 너희 남편이 되어줄 아들들이 없다고. 나는 여기 모압으로 내려와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하게 돌아가고 있다라고. , 나에겐 아무런 비전도 없으며, 그러므로 너희에게 비전을 줄 수도 없다고.

 

이는 얼마나 나오미가 낮아진 마음과 순결한 며느리에 대한 긍휼, 안타까움으로 권면해주는 진심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으로 해서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을 수긍했다. 오르바는 결코 잘못된 며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가 룻보다 특별히 며느리로써 부족했다든지 순종적이지 않았다고 추측하려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일지 모른다. 다만, 오르바는 보다 현실적이었고, 현재의 비전에 대해 더 밝았다. 또한, 무엇보다 오르바는 여호와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오르바는 적어도 삶의 비전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는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르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현실적인 비전을 앞세우는 삶의 윤리를 가졌는지 반성해볼 때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놀라운 룻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윤리를 거스려 NO VISION을 선택했다. 나오미는 늙었고, 그들의 가족은 신앙에서 실패했으며, 징계받았고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 어떤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보장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저 캄캄했다. 그러나 룻은 아무런 비전 없는 그 미래에 자신을 던졌다. 왜냐하면 여호와 신앙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말리려고 할 때 룻의 대답은 분명 이것이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어머니께서 죽어 장사되는 곳에 나 역시 장사될 것인데, 죽음이 아닌 다른 이유로 어머니와 이별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시길 원합니다.’

 

신앙에 실패한 엘리멜렉 가정에 이방신을 섬기던 이방여인이 시집을 와서 여호와의 신앙을 확신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어두운 미래에 자신의 삶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사무엘과 같이 신앙으로 무장한 가정에서도 불신앙으로 죽임을 당하는 아들이 나왔던 것을 생각해볼 때, 룻의 신앙은 사막의 붉은 황무지에서 피어 오른 더 짙은 한 송이 장미였다. 정말 이것은 가능한 일이었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룻의 믿음과 신앙, 그의 삶의 윤리가 가져온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선택을 놓고 생각해볼 때 우리 삶의 윤리에서 차지하는 비전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분명 엘리멜렉과 룻을 함께 놓고 비교해보아야 할 것이다. 전적으로 다른 삶의 윤리를 지니 두 사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지 말이다.

 

엘리멜렉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이고 육신적인 가치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러나 룻의 삶의 윤리는 그의 앞날의 비전을 선택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우리 삶의 윤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한가지 되새겨야 할 교훈이 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미래 비전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시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학교, 직장, 결혼, 가정 모든 삶의 중대한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너무 비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함으로 인해 엘리멜렉과 같은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압으로 갔다. 우리는 룻과 같지 않았다. 보라,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갔지만, 룻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갔던 사람이었음을. 이제 우리의 비전 역시 신앙의 확신과 신앙의 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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