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가자_2012.04.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7.)

 

(삼상 6:7-10, 개역)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언약궤를 강탈한 블레셋은 그 언약궤로 인해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이 다치고,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독종이 발해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소유한 것이 재앙이 되었음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것인지 알아보기로 시험코자 했다.

 

그들은 암소 두 마리를 준비했다. 언약궤와 금독종 다섯마리, 금쥐 다섯마리를 싣고 이스라엘 지경인 벧세메스로 실어갈 암소였다. 특별히 이 암소 두 마리는 젖 나는 암소들로서 새끼를 먹이는 어미 암소들이었다. 그들은 이 어미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수레를 지고 벧세메스로 향하게 하되 그 새끼들을 떼버림으로써 과연 이 암소들이 새끼를 버리고 벧세메스로 향할 것인지 여부를 통해 시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암소에게 수레를 메여 보냈을 때 그 암소들은 울면서 벧세메스로 곧 바로 나아갔다.

 

(삼상 6:11-12)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들은 새끼들을 떼어버리고 나아감으로써 울었다. 모성본능. 암소들이 울면서도 나아간 이유가 있었다. 언약궤를 강탈해 소유한 블레셋이 겪은 재앙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재앙임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그 짐승들도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성적 본능을 울면서까지 제어하고 순종했다.

 

그리스도인도 울면서 가야 할 때가 있고, 그 길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본성이나 인정을 포기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순종해야 할 시기와 의무가 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을 두었기에 갈등이 있고, 그래서 부모님이라는 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미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전도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갈등도 마다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치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모습과 같을 것이다.

 

울면서 가야된다는 것은 고난이기도 하다. 많은 고난의 길을 우리는 울면서 간다. 편한 길이 있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 없기에, 세상과 타협할 수 없기에 융통성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곧이 곧대로 울면서 벧세메스로 향해 간다.

 

삶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보다 안정된 것이 무엇인지. 할 수만 있으면 갈등을 적게 겪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쉼이라든지 안식이란 단어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마치 새끼를 떼버리고 벧세메스로 울면서 가야하는 암소들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에게 우리의 의지에 대해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 곁길로 가고 싶은 욕망, 새끼들에게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저기에 우리의 새끼들이 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존재, 우리를 만족시키는 그 어떤 이기적인 소망들.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계획, 자아. 그 모든 새끼들이 내 마음을 애타게 한다.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련을 품게 한다. 내 눈을 곁눈질 하게 하고, 때때로 당장이라도 돌이켜 되돌아가게 하고픈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그래서는 안 되기에 벧세메스로 발걸음을 옮기되 울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만 한다. 아무리 울찌라도 그 발걸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지켜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신앙에 대한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온다. 때로는 신앙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회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한없는 자기 무존재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의 신앙적인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겪기도 한다. 많은 어려움들이 방해를 더 한다. 그때일지라도 그 발걸음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결국 놓았고, 포기해버렸던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직장의 분주함. 시간과 여유의 턱없는 부족. 그 가운데서 끊임 없이 되묻는 자기성찰들.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 던져보기도 하고, 나의 잘못과 실수들을 반성해보기도 한다. 지금은 많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잠시 머물면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고, 지금 선 곳이 어딘지 살펴보며,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어보는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들처럼 꿋꿋이 가야 할 것이거늘.

 

그리고 회사의 팀장님을 생각해본다. 상무님의 학대를 당하시는 분. 어떤 이유가 되었든 , , 돼지새끼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호로 새끼란 수모도 당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분이시다. 상무님을 볼 때는 율법을 깨닫는다.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완벽에 대해 말하시는 분. 하나라도 틀리면 바보가 되는 분. 그리고 팀장님을 볼 때면 벧세메스 암소가 생각난다. 울면서 꿋굿이 그 길을 가시는 분. 더불어 고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인내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나는 고난을 얼마나 견뎌내지 못했었는지. 고난을 인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과 교훈을 주곤 한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울면서 그 길을 곧장 나아갔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의 본성과 욕망, 자기의 이상과 소망을 포기하면서 까지 꿋꿋이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그 모든 것이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도 벧세메스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울어야만 한다. 울지 않고 갈수 있다면 그건 고난의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자기를 쫓는 길은 울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다. 자기를 버리고, 자아를 포기해서 가야 하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다. 울면서 가자. 벧세메스로 향하는 발의 걸음을 돌이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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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최상단의 원형부는 오랜 세월 가운데 파손된 것이 아니라, 처음 축조 당시 파손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도무지 재분리해서 다시 수정할 수 없었기에 그냥 둘 수 밖에 없었다.)

 

 

 

 

터치고 뿜어지다_2012.03.2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6.)

 

 

석굴암은 통일신라 751년에 김대성이란 인물을 통해 창건되었다. 무려 1200년이 훌쩍 지난 유구의 세월을 간직한 문화재이자 세계문화유산이다. 몇 해 전, 모처럼 찾은 석굴암에 들어가 부처상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한참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매, 콧등, 입술, 가부좌를 튼 다리, , 옷자락. 그리고 그 불상을 둘러싼 12지상들. 1200년의 세월 속에 분명 처음의 그 섬세함과 날카로운 묘사는 무뎌졌지만 그래도 세월을 무색케 하는 불상의 정교함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분이 안 되는 시간 불상을 쳐다보고 지나칠 때, 나는 혼자 20분이 넘게 뚫어져라 그 불상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있었다.


저 엄청난 돌덩어리를 이 높은 곳에서 다듬고 다듬었다니


1200년 전, 김대성과 그의 석공들은 장구를 꾸려 이곳에 올라왔다. 아무 것도 가꾸어진 적 없는 이곳에서 울창한 나무들을 쳐내고, 터를 만들고 집을 지었다. 장작을 패서 불을 떼우고, 먹을 것도 실어 날랐다. 그리고 토굴을 파서 그곳에 저 단단한 화강암을 깍아서 그들이 갈망하는 신을 모신 것이다. 그 섬세한 석굴과 덩치 큰 불상이 무려 1200년의 세월이 무색하도록 견고히 앉아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직 김대성과 석공들의 열망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작업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단시간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김대성은 그의 생전에 석굴암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분명, 그들은 토함산의 그 높은 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을 보내면서 매일 일정한 작업시간을 거쳐 그의 신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무겁고 단단한 화강암을 정을 때리고 쪼을 때 전해졌을 강한 진동이 손목을 저리도록 전해져왔다. 그 돌깨는 소리와 다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겨울이 다가올 때는 산의 그 무서운 추위와 냉기, 눈발이 날려서 때로는 작업을 충분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와 바람. 여름의 잔인한 열기가 그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랜 시간을 그 간절한 염원과 기도, 신앙의 숭고한 정신 속에서 부처상을 다듬고 만들었다.


내가 조롱해 온 한낱 돌덩어리 우상 하나가 나를 심오한 사색 안으로 이끌고 있었다. 한 눈에 봐도 너무나 많은 수고가 들어갔을 석굴, 너무나 무거워 보이는 불상. 이 높은 산에서 그 오랜 계절과 수난과 의식주의 불편, 짐승들의 위협 그 모든 것을 무릎 쓰고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에 불타오르는 신앙심과 종교적 열망을 따라 그 모든 것을 표출하고 표현해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1200년이란 장구의 세월이 흘러 지금 내 앞에도 견고하게에 버티고 있었다.


인간의 가슴속에 담긴 종교적 감수성과 그 뜨거운 열망. 한낱 우상을 섬기면서도 표출되는 그 놀라운 신앙심의 발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을 향한 갈망과 염원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 그것은 그렇게 이 높은 산에서 저 거대한 석굴을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종교적 갈망은 그렇게 위대한 희생과 숭고한 갈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상상 해보았다. 석굴이 완성되고 그들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 어느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새벽이었을 것이다. 산 속의 야생짐승들이 울부짖고, 멀리서 희미하게 동트일 준비를 하면서 승려의 제복을 입은 그들은 비를 맞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석굴 앞으로 다가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순결하고 뜨거웠던 걸까.


그리고 그곳에 선 우상의 전각지기 앞의 부끄러운 그리스도인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나에게 어떤 신앙심과 종교적 감수성이 있는 걸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표현하고 표출해내고 있는 걸까? 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그토록 간절하고 뜨거울 수 있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내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왜 내겐 그것이 없을까? 그렇게 나는 쓸쓸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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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화살에는 초점이 없다_2012.03.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5.)

 

(삼상 4:5-11, 개역)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법궤를 빼앗긴 기막힌 사연을 만난다. 법궤의 신적권위와 능력의 임재를 상기해볼 때 법궤가 이방인의 칼날에 뺏겼다는 것은 상상불허의 사건. 그 사건의 전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맞섰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에벤에셀의 곁이었고, 블레셋의 진영은 아벡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패했던 것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진영이 에벤에셀의 곁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부여를 주는 것만 같다. 훗날 블레셋을 쳐부쉈을 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해서 에벤에셀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그 도우심을 빗겨 진쳐있었다.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다. 무려 4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단의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결국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진영의 안으로 모셔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전투의 열세 중에 왜 법궤를 찾았던 것일까?

 

언약궤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물리적인 증거였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는 모든 백성의 앞에서 나아가 강물을 갈랐고, 강의 중간에서 이스라엘이 모두 건너기까지 기다렸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언약궤와 더불어 성을 돌았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한다는 것은 사실적인 하나님의 임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의 현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쟁의 열세 속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언약궤의 필요를 직감했던 것이다.

 

언약궤가 실로에서부터 전장의 진영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이 이미 승리라도 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가 얼마나 컸던지 블레셋의 진영에서조차 언약궤의 입성을 눈치챌 정도였다. 그리고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블레셋은 용감했다. 사실은 무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용감한 꼴이 되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혼신을 다해 전쟁에 임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물리쳤고, 덤으로 생각지도 않은 언약궤마저 손아귀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날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차 전투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무려 3만명의 보병이 사망했다.

 

전투의 몰패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은 이내 이스라엘에 퍼져나갔다.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꼬꾸라져 목이 부러진 채 죽었다. 그의 며느리는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쇼크사했다. , 그 위대한 언약궤. 하나님의 현현을 실감케 했던 그 신적 권위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 할 뿐더러 블레셋의 더러운 손에 빼앗기다니! 도무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극단의 현상 속에서 심장이 떨리는 소리가 울리고, 턱이 덜덜거렸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언약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관념은 재정립되어야만 했다. 먼저, 언약궤가 그들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늘 언제나 그들을 지켜주는 신적 권능의 발현이 될 수 없다라는 것.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언약궤는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능력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언약궤를 소유하는 문제가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라는 것. 그럼 본질은 무엇이었던가?

 

언약궤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서 능력의 근원이 아니었다. 유능함이 아니었다. 언약궤가 신적 권능으로 그들 가운데 임할 수 있음에는 그들의 삶의 정신과 예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을 때라는 그것. 그렇다. 그들이 요단을 건널 때 그들의 믿음은 약속의 땅을 정복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때 언약궤는 권능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온통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언약궤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실로에 언약궤를 모셔놓았을 뿐. 예배하는 정신을 버렸다.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제사를 버젓이 자행했다. 이스라엘의 예배하는 정신과 초점이 완전히 휘어져버렸다. 마치, 쏴서 날아가는 화살이 그 힘을 잃고 공기의 저항에 휘어지듯이. 그러므로 더 이상 언약궤는 무능해져버렸다. 그제서야 언약궤가 그 자체로서 유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 충격적인 패배의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한 복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출석하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수행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아래에 있다는 완전한 증거가 아니었다. 몸은 예배의 장소에 있음, 수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예배의 정신에 있어서 만큼은 잃어버린 언약궤와 다를 바 없는 우울한 실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능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기까지 했다. 나에게 살아 숨쉬는 예배하는 정신이 없다라면 그것이야 말로 언약궤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초유의 사태는 그 날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 이가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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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답습_2012.03.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4.)

 

(삼상 3:13, 개역)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였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제사자가 가져온 제물을 마음대로 취했다.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는 솥이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걸려 나오는 것을 맘대로 취했다. 때로는 제물을 태워 드리기도 전에 날 것을 원한다며 빼앗아 갔다. 그러나 율법은 제사장의 몫은 오직 고기의 가슴과 우편뒷다리였음을 명시했다. 최초 성막이 지어지고, 제사에 대한 규례가 선포되었던 출애굽기나 민수기의 장면을 되뇌어볼 때, 엘리 아들들의 이러한 파렴치한 행동은 극악무도한 것이다.

 

그러나 비단 엘리 아들들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불량자들의 문제가 바로 제사장 엘리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킨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셔서 제사장 엘리 가문이 그 아들들의 저주와 죽음을 기점으로 몰락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영영할 제사장의 직위도 더 이상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엘리의 명백한 잘못의 정곡을 찌르셨다.

 

네가 네 아들들의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도다.’ 엘리는 그들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로 키워버렸다. 엘리는 자식들의 잘못과 그릇된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엘리는 그것을 다스려야만 했으며, 제어해야 했다. 그러나 엘리는 그러한 의무를 충성스럽게 수행하지 않았다. , 엘리는 방관하였던 것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인 의무는 특별한 책임이다. 그러나 엘리는 자식들의 불량한 신앙에 대해 올바른 훈계를 겸하지 않고, 어떤 구심점을 제공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을 나무라지도 제어하지도 않았다. 그 모든 방관자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자녀들이 여호와를 알지도 못하는 불량자로 자랐음에도 여지없이 제사장의 가문이라는 혈통에 근거해 직분을 부여했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제사를 완전히 짓밟히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폐단에 대해 하나님은 특별히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어 엘리의 잘못과 그 자식과 가문의 몰락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엘리는 사무엘에게 직접 그 예언을 전해듣게 된다. 그때 사무엘은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처음엔 말을 하지 못했으나, 엘리가 있는 그대로 다 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길 원한다고 촉구함으로써 떨리는 심정으로 낱낱의 예언을 전했다.

 

그리고 그 후. 시간은 흘렀다. 예언대로 제사장 엘리 가문은 몰락했고, 사무엘은 차기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를 수행하게 되었다. 또한, 사무엘은 최초의 순회 설교자로서 매년 벧엘과 길갈, 미스바로 순회하며 설교했다. 그의 주거처는 라마였고, 그곳에 선지자학교를 세워 후임을 양성했다. 사무엘은 유능한 사사이자, 존경 받는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예기치 않은 사무엘의 무모함을 발견케 된다.

 

사무엘이 늙고 그 아들들이 사사의 직분을 이어받았다. 요엘과 아비야. 그러나 그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다.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이제 우리에게 왕이 필요하다라고 말이다.

 

사무엘의 무모한 답습은 그렇게 이뤄졌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그가 어려서 제사장 엘리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 하나님의 음성이 자식에 대한 신앙의 올바른 교훈을 충분히 하지 못한 엘리 가문의 몰락으로 경고되었음을 직접 들었었다. 그 두려움과 떨리는 심정으로 엘리 앞에서 고백했던 그 사무엘. 그러나 사무엘 역시 자신의 아들들을 다스리지 못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 앞에 나아와 그 아들들의 허물에 대해 호소할 때 사무엘의 심장은 떨려야했지 않았을까?

 

사무엘만큼 신앙의 2세대에 대한 1세대의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막중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듣고, 보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역시 그 책임에 완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무모함은 삶의 수많은 영역에서 우리 역시 답습하고 있는 무모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과 진리, 순종과 불순종의 기로, 겸손과 오만, 참된 의무와 가치, 징계와 회개.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빨리 순결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과오의 고통과 수치를 망각한 채 무모한 답습을 해버린다. 올바른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궤도를 이탈해버리면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체성을 잃어버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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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하나님_2012.03.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3.)

 

(삼상 2:6-8, 개역)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 역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한나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찬송을 드리기까지 그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한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큰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브닌나에게는 큰 고통인 동시에 심한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브닌나에 비해 한나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부족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그 제물이 나올 때마다 브닌나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 한나는 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은 브닌나의 입장에서는 깊은 슬픔이었다. 브닌나는 자식도 낳아주었지만, 한나는 무자했다. 그러므로 브닌나의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브닌나는 한나의 무자함을 물고 늘어져 고통을 주려고 했다. 한나가 무자함으로 인해 받는 고통은 그녀의 가장 큰 고통인 동시에 거의 유일한 결핍이었다. 마치, 사랑 받는 라헬이 무자하였던 것처럼.

 

만약, 한나가 자식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결핍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유능할수록, 사랑을 받는 자일수록 결핍을 경험해보는 것은 가장 필요한 경험이다. 한나에게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매우 교만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릴 사무엘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큰 결핍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게 했다. 한나가 말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한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그녀가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통회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는 무사안일과 만족의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는 서글픈 신앙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부족함과 결핍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한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고, 그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이다. 늘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려가고, 만족스러워질 때 우리는 거의 그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높아지고, 오만방자해져서 객기를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로 하여금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고, 어떤 특정 부분에서는 한나와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부족과 고통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정직해지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나를 사랑하셨다. 그녀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완벽한 그녀가 가지게 될 유일한 결핍이 도도함과 간구하지 않는 심령임을 아셨다. 사람은 어딘가에서는 결핍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우리도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결핍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안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통 받는 하나의 마음이 무르익어 가던 찰나 그 마지막에 도달했다. 해마다 실로의 하나님 집에 제사를 하러가던 한 날이었다. 실로의 전에서 결국 그 마음이 완전히 깨져 쏟아졌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 기도와 간구. 그 모든 것이 깨졌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한나의 결핍과 고통 받는 심령이 무르익어갔던 것이다. 이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기가 온 것.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통 받는 마음은 무르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와 고통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신음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가눌 수 없는 호소의 때가 온다. 그 시간이 무르익기까지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며, 힘든 연단의 시간들이다.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쏟아졌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음성을 들으셨다. 물론, 이미 들으셨지만 열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의 호소가 하나님께 열납될 시간이 왔다. 하나님은 그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아들을 얻기를 구하기까지 그녀를 짓누르셨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한나를 통해 그녀의 태를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뤄갈 종을 세우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의 넓이는 얼마나 큰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만 구하게 되기를. 우리 상심의 마지막은 이기적인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잉태한 한나가 서원대로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쳤다. 그때 그녀의 고백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간곡히 구했던 그녀는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셨다. 주신 하나님께 그러므로 자신도 다시 돌려드린다고.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와 외침이 정말 정직한 그 절정까지 도달했음을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그녀는 정말 벼랑끝까지 가서 자신을 포기하고 구했던 것이다. 브닌나를 위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의 참된 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승화된다.

 

모든 서원하던 바들이 종지부를 찍었다. 한나는 그녀를 짓누르던 가장 큰 결핍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우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황홀한 심정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의 소리를 듣는다. 2장에서 시작되는 한나의 찬송소리와 기쁨의 기도소리가 하늘을 울린다. 한나가 누린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엄청나고 컸는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삼상 2:1-3, 개역) [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그녀의 결핍과 고통, 고통의 무르익어감, 상한 심령과 깨어짐,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 한나의 찬양과 기쁨.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그리스도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보았는가. 마지막 그녀의 격앙된 찬양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한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케 되었다는 것이다. 결핍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으로 인해 상한 심령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할 보석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항상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나님의 긍휼과 채우심을 맛보는 동시에 입술로만 알았고, 성경의 글귀로만 알았고, 지식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의 놀라움을 실제로 체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한나의 찬양소리가 그냥 찬양의 감탄이 아니다. 그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한나의 놀라운 간증이다. 상한 심령의 깊은 곳까지 치료시켜주시는 하나님. 울부짖던 마음의 깊은 곳까지 기름과 기쁨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변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 크고 위대하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참된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진정한 체험과 고백. 바로 그것이 참된 그리스인에게 필연적인 체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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