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와 하나님_2012.03.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3.)
(삼상 2:6-8, 개역)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 역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한나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찬송을 드리기까지 그녀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발견한다. 한나는 남편 엘가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여자에게는 큰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브닌나에게는 큰 고통인 동시에 심한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브닌나에
비해 한나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부족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엘가나는 제사를 드린 후 그 제물이
나올 때마다 브닌나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 한나는 거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분명, 그것은 브닌나의 입장에서는 깊은 슬픔이었다. 브닌나는 자식도 낳아주었지만, 한나는 무자했다. 그러므로 브닌나의 상대적인 박탈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므로
브닌나는 한나의 무자함을 물고 늘어져 고통을 주려고 했다. 한나가 무자함으로 인해 받는 고통은 그녀의
가장 큰 고통인 동시에 거의 유일한 결핍이었다. 마치, 사랑
받는 라헬이 무자하였던 것처럼.
만약, 한나가 자식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는 결핍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다. 유능할수록, 사랑을 받는 자일수록 결핍을 경험해보는 것은 가장 필요한 경험이다. 한나에게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매우 교만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드릴 사무엘을 얻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큰 결핍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게 했다. 한나가 말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통곡한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그녀가 부족함이
없었다면 그녀는 하나님께 드린다는 서원을 감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통회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는 무사안일과 만족의 신앙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는 서글픈 신앙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부족함과 결핍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의 약함이 우리의 부끄러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견한다. 그러한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지나치게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고, 그 결핍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이다. 늘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순리대로 잘 풀려가고, 만족스러워질 때 우리는 거의 그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높아지고, 오만방자해져서 객기를 부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로 하여금 결핍을 경험하게 하시고, 어떤
특정 부분에서는 한나와 같이 해결할 수 없는 부족과 고통을 맛보게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정직해지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나를 사랑하셨다. 그녀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보셨다.
그러므로 완벽한 그녀가 가지게 될 유일한 결핍이 도도함과 간구하지 않는 심령임을 아셨다. 사람은
어딘가에서는 결핍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우리도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결핍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안전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통 받는
하나의 마음이 무르익어 가던 찰나 그 마지막에 도달했다. 해마다 실로의 하나님 집에 제사를 하러가던
한 날이었다. 실로의 전에서 결국 그 마음이 완전히 깨져 쏟아졌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눈물, 기도와 간구. 그 모든 것이 깨졌다. 그 시간이 오기까지 한나의 결핍과 고통 받는 심령이 무르익어갔던 것이다. 이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기가 온 것.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고통 받는 마음은 무르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와 고통이 우리를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신음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가눌 수 없는 호소의 때가 온다. 그 시간이 무르익기까지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시련이며, 힘든 연단의 시간들이다.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쏟아졌을 때, 하나님은 그녀의 음성을 들으셨다. 물론, 이미 들으셨지만 열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의 호소가
하나님께 열납될 시간이 왔다. 하나님은 그녀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아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아들을 얻기를 구하기까지 그녀를 짓누르셨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한나를 통해 그녀의 태를
통해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뤄갈 종을 세우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사랑의 넓이는 얼마나
큰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우리의 마음이 순결함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만 구하게 되기를. 우리 상심의 마지막은 이기적인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잉태한 한나가
서원대로 사무엘을 나실인으로 바쳤다. 그때 그녀의 고백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간곡히 구했던 그녀는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구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셨다. 주신 하나님께
그러므로 자신도 다시 돌려드린다고. 그러므로 한나의 기도와 외침이 정말 정직한 그 절정까지 도달했음을
알게해주는 대목이다. 그녀는 정말 벼랑끝까지 가서 자신을 포기하고 구했던 것이다. 브닌나를 위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의 참된 간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마지막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승화된다.
모든 서원하던
바들이 종지부를 찍었다. 한나는 그녀를 짓누르던 가장 큰 결핍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채우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황홀한 심정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의 소리를 듣는다. 2장에서 시작되는 한나의 찬송소리와 기쁨의 기도소리가 하늘을 울린다. 한나가
누린 은혜와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엄청나고 컸는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
(삼상 2:1-3, 개역) 『[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그녀의 결핍과
고통, 고통의 무르익어감, 상한 심령과 깨어짐,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 한나의 찬양과 기쁨.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그리스도인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보았는가. 마지막 그녀의 격앙된 찬양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바로 한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케 되었다는 것이다. 결핍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으로 인해 상한 심령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할 보석들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항상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하나님의 긍휼과 채우심을 맛보는 동시에 입술로만 알았고, 성경의 글귀로만 알았고, 지식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의 크심과 사랑의
놀라움을 실제로 체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한나의
찬양소리가 그냥 찬양의 감탄이 아니다. 그 고통의 끝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한나의 놀라운 간증이다. 상한 심령의 깊은 곳까지 치료시켜주시는 하나님. 울부짖던 마음의
깊은 곳까지 기름과 기쁨으로 채우시는 놀라운 변화. 말할 수 없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그 크고 위대하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참된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진정한 체험과 고백. 바로 그것이 참된 그리스인에게
필연적인 체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