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화살에는 초점이 없다_2012.03.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5.)

 

(삼상 4:5-11, 개역) [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 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6]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법궤를 빼앗긴 기막힌 사연을 만난다. 법궤의 신적권위와 능력의 임재를 상기해볼 때 법궤가 이방인의 칼날에 뺏겼다는 것은 상상불허의 사건. 그 사건의 전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본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맞섰다. 이스라엘의 진영은 에벤에셀의 곁이었고, 블레셋의 진영은 아벡이었다.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패했던 것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진영이 에벤에셀의 곁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의미부여를 주는 것만 같다. 훗날 블레셋을 쳐부쉈을 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해서 에벤에셀이라 이름하였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그 도우심을 빗겨 진쳐있었다.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다. 무려 4천명의 희생자를 내고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단의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결국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진영의 안으로 모셔오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전투의 열세 중에 왜 법궤를 찾았던 것일까?

 

언약궤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는 물리적인 증거였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는 모든 백성의 앞에서 나아가 강물을 갈랐고, 강의 중간에서 이스라엘이 모두 건너기까지 기다렸다.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 언약궤와 더불어 성을 돌았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한다는 것은 사실적인 하나님의 임재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의 현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쟁의 열세 속에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언약궤의 필요를 직감했던 것이다.

 

언약궤가 실로에서부터 전장의 진영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이 이미 승리라도 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환호가 얼마나 컸던지 블레셋의 진영에서조차 언약궤의 입성을 눈치챌 정도였다. 그리고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블레셋은 용감했다. 사실은 무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용감한 꼴이 되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혼신을 다해 전쟁에 임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물리쳤고, 덤으로 생각지도 않은 언약궤마저 손아귀에 넣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날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차 전투의 피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무려 3만명의 보병이 사망했다.

 

전투의 몰패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은 이내 이스라엘에 퍼져나갔다. 엘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꼬꾸라져 목이 부러진 채 죽었다. 그의 며느리는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쇼크사했다. , 그 위대한 언약궤. 하나님의 현현을 실감케 했던 그 신적 권위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 할 뿐더러 블레셋의 더러운 손에 빼앗기다니! 도무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극단의 현상 속에서 심장이 떨리는 소리가 울리고, 턱이 덜덜거렸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언약궤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관념은 재정립되어야만 했다. 먼저, 언약궤가 그들 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늘 언제나 그들을 지켜주는 신적 권능의 발현이 될 수 없다라는 것.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언약궤는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능력의 근원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언약궤를 소유하는 문제가 모든 것이 될 수 없다라는 것. 그럼 본질은 무엇이었던가?

 

언약궤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서 능력의 근원이 아니었다. 유능함이 아니었다. 언약궤가 신적 권능으로 그들 가운데 임할 수 있음에는 그들의 삶의 정신과 예배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을 때라는 그것. 그렇다. 그들이 요단을 건널 때 그들의 믿음은 약속의 땅을 정복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그때 언약궤는 권능으로 그들을 이끌었다. 그들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그들이 하나님에게 온통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언약궤는 하나님의 능력의 현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란 말이다. 그들은 실로에 언약궤를 모셔놓았을 뿐. 예배하는 정신을 버렸다.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제사를 버젓이 자행했다. 이스라엘의 예배하는 정신과 초점이 완전히 휘어져버렸다. 마치, 쏴서 날아가는 화살이 그 힘을 잃고 공기의 저항에 휘어지듯이. 그러므로 더 이상 언약궤는 무능해져버렸다. 그제서야 언약궤가 그 자체로서 유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 충격적인 패배의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한 복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를 출석하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수행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현현 아래에 있다는 완전한 증거가 아니었다. 몸은 예배의 장소에 있음, 수고의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예배의 정신에 있어서 만큼은 잃어버린 언약궤와 다를 바 없는 우울한 실제.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능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기까지 했다. 나에게 살아 숨쉬는 예배하는 정신이 없다라면 그것이야 말로 언약궤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초유의 사태는 그 날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 이가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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