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가자_2012.04.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27.)

 

(삼상 6:7-10, 개역) [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8]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언약궤를 강탈한 블레셋은 그 언약궤로 인해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이 다치고,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독종이 발해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언약궤를 소유한 것이 재앙이 되었음을 알게 된 블레셋 사람들은 다시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인한 것인지 알아보기로 시험코자 했다.

 

그들은 암소 두 마리를 준비했다. 언약궤와 금독종 다섯마리, 금쥐 다섯마리를 싣고 이스라엘 지경인 벧세메스로 실어갈 암소였다. 특별히 이 암소 두 마리는 젖 나는 암소들로서 새끼를 먹이는 어미 암소들이었다. 그들은 이 어미 암소 두 마리로 하여금 수레를 지고 벧세메스로 향하게 하되 그 새끼들을 떼버림으로써 과연 이 암소들이 새끼를 버리고 벧세메스로 향할 것인지 여부를 통해 시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암소에게 수레를 메여 보냈을 때 그 암소들은 울면서 벧세메스로 곧 바로 나아갔다.

 

(삼상 6:11-12)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암소들은 새끼들을 떼어버리고 나아감으로써 울었다. 모성본능. 암소들이 울면서도 나아간 이유가 있었다. 언약궤를 강탈해 소유한 블레셋이 겪은 재앙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재앙임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증거하셨다. 그리고 그 짐승들도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성적 본능을 울면서까지 제어하고 순종했다.

 

그리스도인도 울면서 가야 할 때가 있고, 그 길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본성이나 인정을 포기하면서 까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순종해야 할 시기와 의무가 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부모님을 두었기에 갈등이 있고, 그래서 부모님이라는 정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미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전도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갈등도 마다하지 않을 때 그것은 마치 울면서 벧세메스로 가는 모습과 같을 것이다.

 

울면서 가야된다는 것은 고난이기도 하다. 많은 고난의 길을 우리는 울면서 간다. 편한 길이 있지만 신앙을 포기할 수 없기에, 세상과 타협할 수 없기에 융통성 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곧이 곧대로 울면서 벧세메스로 향해 간다.

 

삶의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지. 보다 안정된 것이 무엇인지. 할 수만 있으면 갈등을 적게 겪고,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쉼이라든지 안식이란 단어에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마치 새끼를 떼버리고 벧세메스로 울면서 가야하는 암소들처럼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에게 우리의 의지에 대해 포기하라고 요구하신다. 곁길로 가고 싶은 욕망, 새끼들에게 뛰어가고 싶은 욕망을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저기에 우리의 새끼들이 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존재, 우리를 만족시키는 그 어떤 이기적인 소망들. 나의 꿈, 나의 비전, 나의 계획, 자아. 그 모든 새끼들이 내 마음을 애타게 한다. 나로 하여금 계속해서 미련을 품게 한다. 내 눈을 곁눈질 하게 하고, 때때로 당장이라도 돌이켜 되돌아가게 하고픈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그래서는 안 되기에 벧세메스로 발걸음을 옮기되 울고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만 한다. 아무리 울찌라도 그 발걸음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명을 지켜내야 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명령을 따라야만 한다. 신앙에 대한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그만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온다. 때로는 신앙이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회의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한없는 자기 무존재감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의 신앙적인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겪기도 한다. 많은 어려움들이 방해를 더 한다. 그때일지라도 그 발걸음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그렇지 못할 때가 있었다. 결국 놓았고, 포기해버렸던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직장의 분주함. 시간과 여유의 턱없는 부족. 그 가운데서 끊임 없이 되묻는 자기성찰들.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은 질문들 던져보기도 하고, 나의 잘못과 실수들을 반성해보기도 한다. 지금은 많은 것을 고민하는 시간. 주춤거리는 것 같지만 잠시 머물면서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고, 지금 선 곳이 어딘지 살펴보며,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어보는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들처럼 꿋꿋이 가야 할 것이거늘.

 

그리고 회사의 팀장님을 생각해본다. 상무님의 학대를 당하시는 분. 어떤 이유가 되었든 , , 돼지새끼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호로 새끼란 수모도 당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분이시다. 상무님을 볼 때는 율법을 깨닫는다.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완벽에 대해 말하시는 분. 하나라도 틀리면 바보가 되는 분. 그리고 팀장님을 볼 때면 벧세메스 암소가 생각난다. 울면서 꿋굿이 그 길을 가시는 분. 더불어 고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서 인내하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나는 고난을 얼마나 견뎌내지 못했었는지. 고난을 인내하는 것.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많은 생각과 교훈을 주곤 한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울면서 그 길을 곧장 나아갔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내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어떻게 자기의 본성과 욕망, 자기의 이상과 소망을 포기하면서 까지 꿋꿋이 나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그 모든 것이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도 벧세메스로 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울어야만 한다. 울지 않고 갈수 있다면 그건 고난의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다. 자기를 쫓는 길은 울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다. 자기를 버리고, 자아를 포기해서 가야 하는 길이 하나님의 길이다. 울면서 가자. 벧세메스로 향하는 발의 걸음을 돌이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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