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져 버린 외식_2012.05.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0.)

 

(삼하 12:9-10, 개역)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다윗은 그러했다. 그것은 다윗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위대한 다윗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증언이 적잖이 다윗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단 사실이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감수성이 있었다. 그는 시인이면서 노래 잘하는 자였다. 그는 영적 감수성도 매우 뛰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이었다. 그가 사울의 칼 아래 도망칠 때 굴 속에서 사울의 겉옷만 살짝 베었을 뿐임에도 가슴 아파했다. 그가 왕이 되어 백향목 궁에 거할 때 성막에 거하시는 언약궤를 보면서 슬퍼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였다.

 

사실 다윗은 충분히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절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건 다윗 스스로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다윗 편에 설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섰을 때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었다. 다윗은 인정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업신여기고 비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 마음 속에만 있는 경멸일까? 그 상대를 향해 표현해내는 무시를 말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 누구든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군요.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얼굴이 붉어질지 모른다. 교만하군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다뇨? 가당치도 않아요.’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성경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분명 그것이었다. 어째서?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그릇 범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고의적으로 죽게 함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다. , 다윗은 그의 이기심을 위해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바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다윗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비웃거나 업신여겼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유념치 않았던 것. 그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책망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서는 거의 습관적으로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 물론, 그것은 두드러지게 띄는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서글픈 것이다. 우리의 무지한 눈이 여전히 그 잘못을 방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어 있다.

 

우리의 입술에는 찬양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다. 교훈을 받으며, 기도하는 삶을 산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한 켠에서는 말씀을 어겨버린다. 그것도 익숙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방금 전 너는 또 나를 업신여겼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게 네 습관이구나.’

 

앞에서 대 놓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 죄가 쉽게 드러나고 명백해지기 때문에 회개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숨은 죄가 너무 많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거짓의 모습이 우리 뒤에 숨어 있곤 하다. 익숙해져 버린 외식.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우리기 말씀을 어길 때마다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어길 수 있는 이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내가 율법을 어길 마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고 있구나. 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구나. 그것을 모른다는 것부터가 자기기만이구나. 나는 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이며, 하나님을 속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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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무서운 교만_2012.05.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9.)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다윗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에 북받쳐 춤을 추고 뛰놀았다. 정말 다윗이 누렸을 감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조금도 상상되지 않는다.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 10년 동안 왕의 칼을 피했던 도망자. 배신과 무시. 조롱. 고통의 숱한 세월을 지나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이다. 모두가 기뻤다. 그러나 정녕 모두는 아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미갈이었다.

 

결코 익숙치 않다. 미갈은 다윗의 처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금의환향을. 재기를. 성공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왕비라니. 그러나 그럴만도 했다.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갈은 다른 남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 긴 공백의 시간들이 미갈로 하여금 다윗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미갈이 다윗의 수난을 함께 겪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리스도의 삶에 함께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공감한다.

 

아무튼 미갈은 다윗을 창밖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다윗을 맞으러, 언약궤를 맞이러 나오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서커스를 구경하듯 수많은 인파와 언약궤의 입성과 베옷을 입은 채 기뻐 날뛰는 다윗의 천박한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앙의 구경꾼들 역시 신앙의 일꾼들을 바라보며 비웃곤 한다. 초라하고, 째째하고 소인배들 보듯이 한다.

 

미갈이 마음에서 다윗을 비웃었다고 했다. 무서운 표현이다. 그리고 익숙한 표현이다. 다윗이 겉옷도 아닌 베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 미갈의 눈에는 심히 상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왕의 체통이 아니었다. 그 날 언약궤의 입성과 수많은 인파의 찬양과 행렬, 다윗의 기쁨과 감동 그 모든 것들이 미갈에게는 꼴불견 같은 것이었다. 비틀어진 마음.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참다 못한 미갈이 비꼬아 말했다. 마음에서 비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보란듯이 비꼬아 쏘아붙였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양심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에 감동되어 춤을 추고 희락하였기 때문이다.

 

미갈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 악한 마음이 종종 내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때때로 나 역시 좀 더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삐딱하게 보기도 하고, 남의 기쁨과 영광을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리고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을 때도 있었다.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길 자격이 있었을까? 비웃고 비꼬아 말할 자격이 있었을까? 감히 왕을.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업신여기고, 비웃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님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할 때 정직하지 못한 마음일 때가 있음을 자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비꼬아 말하는 것을 겪기도 한다.

 

미갈의 그 비웃음. 그 심중의 업신여김은 명백히 교만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교만! 그래서 그녀의 태를 하나님은 닫아버리시고 죽는 날 까지 자식이 없었다. , 여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당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형제, 자매 개개인을. 그리스도인을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고, 질투한다라면 그것은 명백한 교만이다. 그 거짓된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슬퍼하고 자백해야 한다. 내어놓아야 한다.

 

미갈의 그 마음 속 뿌리 깊은 교만에서부터 불거진 오만과 결과를 다시 보자. 그리고 내 마음을 살피고 두려워하자. 그리스도인에게 교만은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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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확 드네_2012.04.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8.)

 

(삼하 6:3, 개역)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다윗왕이 통일 이스라엘의 국왕으로 공식 즉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이끌어 오고자 했다. 아마,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는 오랜 세월 자신의 집에 모셔져 있었던 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을 시작했다.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누군가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떤 영문에서인지 잠잠히 수레를 이끌던 소들이 날뛰었다.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수레에 실린 언약궤가 떨어질 뻔하였다. 즉시 웃사는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고, 거룩한 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언약궤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 그래서 기름을 부어 성결케 했고, 아무도 만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의 위대한 상징이었다. 이동을 해야 할 때는 양쪽에 금을 도금한 긴 채를 연결시켜 그 채를 잡고 사람이 직접 인력으로 운반해야 했다. 그러나 웃사와 아효는 채를 걸어 들지도 않고 수레에 싣고 소의 힘으로 그것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웃사는 궤를 만지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집안에 보관하던 언약궤가 차츰 웃사의 마음에서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뎌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언약궤를 옮길 때 조차 그것을 채로 연결해 들고 옮기는 것조차 귀찮아진 것이다. 신앙이 오래되고 익숙해지다보면 자칫 안일과 나태에 빠진다. 매너리즘.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에 대해 무뎌져 간다. 그럼으로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조차 퇴색되기도 한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궤를 수레에 맡겨버린다. 그만큼 신앙에 대한 깨어 있고, 성실하고 두려워하는 심령이 경솔하고 안일해져버린다.

 

소가 왜 나곤 타작마당에서 뛰었던 것일까? 그것은 웃사의 그러한 퇴색되어 버린 신앙과 예배의 안일한 정신을 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리고 웃사의 그러한 어두운 정신은 곧 언약궤를 바라보는 모든 이스라엘의 퇴색된 신앙의 거울이기도 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1년에 1차씩 들어갈 때만해도 언약궤보다 더 신령하고 엄위하고,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언약궤의 명성과 권위는 실추되었다. 모두에게서. 그래서 고작 사람들이 모셔서 들지도 않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덜거럭 거리며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병자를 태운 앰블런스처럼. 그러니 하나님께서 노하실만 했다.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를 만진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을 보고 들었다. 다윗왕도 심히 두려워졌다. 그래서 다윗성으로 옮기려던 것을 돌이켜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냈다. 석달 뒤 하나님의 노가 풀리자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언약궤를 채로 연결해 메고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잠들어 버린 언약궤가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실추된 언약궤의 권위와 명성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 언약궤가 권능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 임재의 현현임을 재확인했다. 정신이 확 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예배의 정신과 태도로 언약궤를 모시기 시작했다.

 

신앙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정신, 예배의 태도와 삶의 윤리가 퇴색되고 희미해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윤리와 태도가 변질되기 시작한다. 고난에 참예하고, 마땅히 주어진 의무를 짊어져서 메고 살아가야 할 것이거늘 수레에 맡겨 버린다. 고작 소 몇 마리들을 고용해 편안하게 고난 없이 예배드리려 한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소들을 날 뛰게 하실 때가 온다. 우리 신앙의 그릇된 예배방식과 형식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당황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궤에 함부로 손을 댄다. 객기이다. 신앙의 오류와 신앙의 객기를 부릴 때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끔한 매질을 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차! 잃어버린 예배의 정신. 너무나 미혹되어버린 어두운 영적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정신이 확 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언약궤를 맨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를 재확인한다. 한동안 죽었던 예배의 정신이 되살아난다.

 

웃사의 무뎌짐과 매너리즘. 객기와 경솔함. 하나님의 다시 나타나심과 징계. 회복.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과 신앙의 섬세한 감수성에 대해 어두워져 가는 현재의 내 영혼과 무뎌진 예배의 삶과 태도에 대해 교훈을 던져준다. 이제라도 수레에 실었던 궤를 다시 메야 된다. 얼마 못 가서 소가 날 뛸 것이고, 그러면 무사안일한 내가 즉각적으로 손을 뻗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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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나의 것_2012.04.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7.)

 

(삼상 24:17-19, 개역)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복수는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복수는 어떤 것일까? 상대방이 나에게 서운하게 대했을 때 나도 그 사람에게 서운하게 대하고 싶어진다. 그게 복수다. 누군가 내 배려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라든지. 내가 배려하는 그 사람은 나를 배려해주지 않을 때, 동일하게 배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복수다.

복수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복수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습관이다.

 

사울의 외침처럼 다윗은 학대를 당했다. 복수를 위한다면 다윗은 마땅히 사울을 들이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사울은 왕이었고,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이 충분히 자기를 죽이고 복수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굳은 양심의 사울이 그거라도 알았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랫사람을 그렇게 학대하면서도 자신을 선대하는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잔인하다는 말은 그럴 때를 위함 일거다. 하나님은 복수 금지주의를 표방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중에 하나는 복수하지 말고, 심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좋은 모형이셨다. 당하셨지만 복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셨다. 사울의 외침처럼 사람이 자기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 만나 반 죽음에 이른 유대인을 치료해주었다. 친히 자기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셨다. 선한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은 친히 화목제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해 앙갚음하지 않으시고, 보복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스도인은 복수금지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살면서도 종종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복수할 때 화가 임한다. 이스라엘에서 한 레위인이 그 아내가 베냐민 비류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12덩이로 몸을 잘라 12지파에 보내어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래서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싸웠다. 그러나 그 첫 전투에서 11지파가 비참히 패배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이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 싸웠다. 나중에 승리는 하였지만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이즈러져서 낭패에 봉착했다. 이처럼 복수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쓰라린 것이고, 이후에도 큰 낭패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몰라도 교회 안에 날 홀대하는 한 자매님이 계시다. 꽤 시간이 되었다. 내가 작년까지 부장교사를 할 때 교사 여러 명에게 나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교사도 거기에 동조를 안 해줬다고 한다. ‘아니예요. 병훈 형제님. 알고 보면 전혀 달라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형제님은 그러셨단다. ‘자매님이나 잘 하세요. 쓸데 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고.’ 만약, 동조해주는 교사가 있었다면 내가 더 곤란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3자를 통해 들려오는 그 자매님의 행실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어느 날은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넌 부장교사 하느라고 그렇게 고생하고 힘드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그 자매님이 어머니께도 대놓고 몇 번 타박을 줬다고 한다. 그때마다 얘기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니 제가 정직하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 분의 집념도 대단하다.

 

얼마 전까진 몇 번 마주칠 때 마다 요즘 안 좋은 일 없냐고 친히 물어봐 주셨다. 그 질문의 의도는 단순했다. 뭐 좀 안 좋은 일 있다는 소식 듣고 싶은데 없냐는 거다. 어느 날 가정모임을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주차공간이 전혀 없는데 많이 늦어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그 자매님을 만났다. 보자마자 대뜸 얘기하셨다.

누가 싸가지 없이 주차하나 싶었더니 형제님이였군요!’

, 다시 내려가서 바로 주차해야죠

그리고 집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와 주차를 옮겼었다. 씁쓸했지만 아무 대면할 말이 없었다. 다 내 부덕의 소치일 뿐.

 

다윗은 인신공격하는 시므이를 놓고 말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저주하라 하심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그러나 다윗도 화가 날 때는 있었다. 나발이 다윗의 공덕을 알아주지 않고, 무시했을 때 격노했었다.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걸 보면 다윗도 상황에 따라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들 처럼. 나발정도는 쳐 죽일 수 있었다. 아마,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고 권력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격노한 다윗의 군대 앞에 나발의 총명한 아내가 나아왔다. 그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그 노중에서 다윗을 중재하고 다스리는 그녀의 이 한 마디에서 드러난다.

 

(삼상 25:31, 개역)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정확히 상기시켰다.

지금 너무 흥분해서 굳이 살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했다가는 나중에서야 무죄한 피를 흘리고 복수를 일삼았구나 싶어 슬퍼하고 낙심하실 겁니다. 지금 참으면 나중에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이 온전하실 겁니다.’

 

아비가일의 위대한 총명함과 중재에 감탄이 난다. 그렇다. 격노하고 흥분할 때 우리는 복수하려고 한다.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항상 그 뒤에는 슬픔과 마음에 걸림이 남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심판하심으로써 정녕 다윗은 그 칼을 쓰지 않고도 복수할 수 있었다.

 

(삼상 25:39, 개역)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격노하고 흥분해서 복수하고 싶을 그 때 참을 수 있다면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을 말이다. 이 날의 교훈은 다윗의 평생에 큰 교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후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십 황무지에서 조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칼을 거두며 다음과 같이 말했고, 그 말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삼상 26:10, 개역)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나발에 대한 복수심을 거뒀던 그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는 것을 보면서 사울에 대한 복수심도 계속해서 거둘 수 있었다. 하나님이 사울을 치실 것을 더 확고히 믿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말처럼 실제로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패전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윗왕이 된 이후에도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시므이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확실한 경험을 했던 다윗은 복수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우리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수해주길 바래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복수할 수 있을 때 자신을 삼가한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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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까? 시험일까?_2012.04.22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6.)

 

(삼상 24:4-6, 개역)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 처음은 엔게디 황무지에 다윗이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들염소 바위 인근의 굴 속에 은신하던 다윗과 그 일행은 굴 입구에서 매복하기 위해 들어온 사울의 군대를 만났다. 사울 일행이 잠이 들자 다윗의 사람들이 말했다.

 

올커니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다윗 당신에게 붙인다고 했는데 오늘이 그 기회가 온 듯 합니다. 사울 일행이 잠들었으니 지금 가서 칼로 찌르면 두 번 찌를 것 없이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칼을 들고 잠든 사울왕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사용해 사울왕의 옷자락을 잘랐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았다. 다윗이 말했다.

 

아니다.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다윗의 견고한 중심과 올바른 판단을 통해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유형 같다.

 

다윗은 분명 사울로 인해 심히 군급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했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가 쫓아다닌다고 할 때, 그리고 끝없이 피해 다녀야 할 때 그 정신적인 긴장과 압박, 스트레스. 부담감이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건 오직 다윗의 경험이었다. 그 와중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 그러나 다윗은 버젓이 그 황금의 기회를 뻥 차버렸다. 허허그러나 증명되었다. 다윗이 기회를 차버린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회일까? 시험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오해일까?’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타이밍을 상고해보자. 다윗의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분명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 떠올렸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그때가 되면 원하는 대로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앤게디 황무지의 어느 동굴에서 사울을 만났을 때 다윗의 일행들은 바로 예전의 계시를 본능적으로 상기시키며 바로 오늘이 사울왕을 죽이는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명백했다. 미리 받은 암시도 있었을 뿐더러 절묘하게 사울의 일행이 같은 동굴의 입구로 들어와 거기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를 놓친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보.

 

그러나 놀라운 다윗은 그 기회를 천운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모두가 시험에 빠져들고 있을 때, 다윗이 그 허황된 착각을 뻥 터트렸다.아니다. 오늘은 그 기회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주를 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오늘 복수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험이 온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연속성 안에는 수많은 사건과 징조들이 있다. 우리는 그 징조를 잘 보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상황들 앞에서 이것이 징조라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으로 드러난 것이 많이 있었다. , 우리는 기회인지 시험인지 잘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백한 답을 주신다고 단정해버림으로써 보여지는 현상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고, 시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남은 건 쓰라린 좌절감.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문제를 유발한다.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마치 다윗과 사울처럼. 누군가를 미워할 때. 또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고 싶지 않을 때, 어떤 힘의 대치와 힘의 논리가 견제될 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버티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어떤 징조를 붙잡으려다 낭패를 당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참 어렵지만. 정리해보면 분명 그리스도인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겪는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것이 기회인냥 행동했다가, 기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기회가 아닌 것을 기회로 오해하는 것이다. 오직 정직한 양심만이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그의 일행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누군들 그 상황에서 계시된 암시도 있었는데 이것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오직 단 하나의 명백한 진리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치는 것은 죄다.’라는 중심을 갖고 있음으로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여전히 정직하지 못하다. 이기적이고 겸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다양한 장면들에서 분명히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를 반복해서 보고 배우면서도 그것을 내 행동의 분명한 기준과 근거로 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럼으로 시험이 왔을 때 그것을 기회인 줄 착각하고 그릇된 우를 범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참 그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두렵다. 얼마나 무지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들. 세상의 것들을 분별해서 취하고, 삼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의 참된 윤리를 명백히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탕발림에 불과한 세상이 주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처럼 착각하고 덥석 물어버린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분명히 생각해야 할 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소멸된다고 했다. 영원한 것에 관계되지 않는 모든 것이 사실은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기회와 징조들. 정말 이는 기회일까? 아니면 시험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한 양심을 주셔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기를!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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