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다 무서운 교만_2012.05.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9.)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다윗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에 북받쳐 춤을 추고 뛰놀았다. 정말
다윗이 누렸을 감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조금도 상상되지 않는다.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 10년 동안 왕의 칼을 피했던 도망자. 배신과
무시. 조롱. 고통의 숱한 세월을 지나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이다. 모두가 기뻤다. 그러나 정녕 모두는
아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미갈이었다.
결코 익숙치
않다. 미갈은 다윗의 처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금의환향을. 재기를. 성공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왕비라니. 그러나 그럴만도 했다.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갈은 다른 남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 긴 공백의 시간들이 미갈로 하여금 다윗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미갈이 다윗의 수난을 함께 겪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리스도의 삶에 함께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공감한다.
아무튼 미갈은
다윗을 창밖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다윗을 맞으러, 언약궤를
맞이러 나오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서커스를 구경하듯 수많은 인파와 언약궤의 입성과 베옷을 입은 채 기뻐
날뛰는 다윗의 천박한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앙의 구경꾼들 역시 신앙의 일꾼들을 바라보며 비웃곤
한다. 초라하고, 째째하고 소인배들 보듯이 한다.
미갈이 마음에서
다윗을 비웃었다고 했다. 무서운 표현이다. 그리고 익숙한
표현이다. 다윗이 겉옷도 아닌 베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 미갈의 눈에는 심히 상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왕의 체통이 아니었다. 그 날 언약궤의 입성과 수많은 인파의 찬양과
행렬, 다윗의 기쁨과 감동 그 모든 것들이 미갈에게는 꼴불견 같은 것이었다. 비틀어진 마음.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참다 못한
미갈이 비꼬아 말했다. 마음에서 비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보란듯이 비꼬아 쏘아붙였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양심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에 감동되어 춤을 추고 희락하였기 때문이다.
미갈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 악한 마음이 종종 내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때때로 나 역시 좀 더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삐딱하게 보기도 하고, 남의 기쁨과 영광을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리고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을 때도 있었다.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길 자격이 있었을까? 비웃고 비꼬아 말할 자격이
있었을까? 감히 왕을.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업신여기고, 비웃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님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할 때 정직하지
못한 마음일 때가 있음을 자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비꼬아 말하는 것을 겪기도 한다.
미갈의 그
비웃음. 그 심중의 업신여김은 명백히 교만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교만! 그래서 그녀의 태를 하나님은 닫아버리시고 죽는 날 까지 자식이 없었다. 즉, 여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당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형제, 자매 개개인을. 그리스도인을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고, 질투한다라면 그것은 명백한 교만이다. 그 거짓된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슬퍼하고 자백해야 한다. 내어놓아야 한다.
미갈의 그
마음 속 뿌리 깊은 교만에서부터 불거진 오만과 결과를 다시 보자. 그리고 내 마음을 살피고 두려워하자. 그리스도인에게 교만은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