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확 드네_2012.04.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8.)

 

(삼하 6:3, 개역)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다윗왕이 통일 이스라엘의 국왕으로 공식 즉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이끌어 오고자 했다. 아마,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는 오랜 세월 자신의 집에 모셔져 있었던 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을 시작했다.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누군가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떤 영문에서인지 잠잠히 수레를 이끌던 소들이 날뛰었다.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수레에 실린 언약궤가 떨어질 뻔하였다. 즉시 웃사는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고, 거룩한 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언약궤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 그래서 기름을 부어 성결케 했고, 아무도 만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의 위대한 상징이었다. 이동을 해야 할 때는 양쪽에 금을 도금한 긴 채를 연결시켜 그 채를 잡고 사람이 직접 인력으로 운반해야 했다. 그러나 웃사와 아효는 채를 걸어 들지도 않고 수레에 싣고 소의 힘으로 그것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웃사는 궤를 만지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집안에 보관하던 언약궤가 차츰 웃사의 마음에서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뎌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언약궤를 옮길 때 조차 그것을 채로 연결해 들고 옮기는 것조차 귀찮아진 것이다. 신앙이 오래되고 익숙해지다보면 자칫 안일과 나태에 빠진다. 매너리즘.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에 대해 무뎌져 간다. 그럼으로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조차 퇴색되기도 한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궤를 수레에 맡겨버린다. 그만큼 신앙에 대한 깨어 있고, 성실하고 두려워하는 심령이 경솔하고 안일해져버린다.

 

소가 왜 나곤 타작마당에서 뛰었던 것일까? 그것은 웃사의 그러한 퇴색되어 버린 신앙과 예배의 안일한 정신을 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리고 웃사의 그러한 어두운 정신은 곧 언약궤를 바라보는 모든 이스라엘의 퇴색된 신앙의 거울이기도 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1년에 1차씩 들어갈 때만해도 언약궤보다 더 신령하고 엄위하고,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언약궤의 명성과 권위는 실추되었다. 모두에게서. 그래서 고작 사람들이 모셔서 들지도 않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덜거럭 거리며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병자를 태운 앰블런스처럼. 그러니 하나님께서 노하실만 했다.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를 만진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을 보고 들었다. 다윗왕도 심히 두려워졌다. 그래서 다윗성으로 옮기려던 것을 돌이켜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냈다. 석달 뒤 하나님의 노가 풀리자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언약궤를 채로 연결해 메고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잠들어 버린 언약궤가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실추된 언약궤의 권위와 명성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 언약궤가 권능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 임재의 현현임을 재확인했다. 정신이 확 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예배의 정신과 태도로 언약궤를 모시기 시작했다.

 

신앙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정신, 예배의 태도와 삶의 윤리가 퇴색되고 희미해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윤리와 태도가 변질되기 시작한다. 고난에 참예하고, 마땅히 주어진 의무를 짊어져서 메고 살아가야 할 것이거늘 수레에 맡겨 버린다. 고작 소 몇 마리들을 고용해 편안하게 고난 없이 예배드리려 한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소들을 날 뛰게 하실 때가 온다. 우리 신앙의 그릇된 예배방식과 형식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당황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궤에 함부로 손을 댄다. 객기이다. 신앙의 오류와 신앙의 객기를 부릴 때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끔한 매질을 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차! 잃어버린 예배의 정신. 너무나 미혹되어버린 어두운 영적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정신이 확 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언약궤를 맨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를 재확인한다. 한동안 죽었던 예배의 정신이 되살아난다.

 

웃사의 무뎌짐과 매너리즘. 객기와 경솔함. 하나님의 다시 나타나심과 징계. 회복.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과 신앙의 섬세한 감수성에 대해 어두워져 가는 현재의 내 영혼과 무뎌진 예배의 삶과 태도에 대해 교훈을 던져준다. 이제라도 수레에 실었던 궤를 다시 메야 된다. 얼마 못 가서 소가 날 뛸 것이고, 그러면 무사안일한 내가 즉각적으로 손을 뻗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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