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져 버린 외식_2012.05.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0.)

 

(삼하 12:9-10, 개역)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다윗은 그러했다. 그것은 다윗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위대한 다윗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증언이 적잖이 다윗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단 사실이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감수성이 있었다. 그는 시인이면서 노래 잘하는 자였다. 그는 영적 감수성도 매우 뛰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이었다. 그가 사울의 칼 아래 도망칠 때 굴 속에서 사울의 겉옷만 살짝 베었을 뿐임에도 가슴 아파했다. 그가 왕이 되어 백향목 궁에 거할 때 성막에 거하시는 언약궤를 보면서 슬퍼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였다.

 

사실 다윗은 충분히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절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건 다윗 스스로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다윗 편에 설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섰을 때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었다. 다윗은 인정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업신여기고 비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 마음 속에만 있는 경멸일까? 그 상대를 향해 표현해내는 무시를 말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 누구든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군요.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얼굴이 붉어질지 모른다. 교만하군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다뇨? 가당치도 않아요.’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성경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분명 그것이었다. 어째서?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그릇 범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고의적으로 죽게 함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다. , 다윗은 그의 이기심을 위해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바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다윗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비웃거나 업신여겼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유념치 않았던 것. 그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책망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서는 거의 습관적으로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 물론, 그것은 두드러지게 띄는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서글픈 것이다. 우리의 무지한 눈이 여전히 그 잘못을 방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어 있다.

 

우리의 입술에는 찬양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다. 교훈을 받으며, 기도하는 삶을 산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한 켠에서는 말씀을 어겨버린다. 그것도 익숙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방금 전 너는 또 나를 업신여겼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게 네 습관이구나.’

 

앞에서 대 놓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 죄가 쉽게 드러나고 명백해지기 때문에 회개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숨은 죄가 너무 많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거짓의 모습이 우리 뒤에 숨어 있곤 하다. 익숙해져 버린 외식.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우리기 말씀을 어길 때마다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어길 수 있는 이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내가 율법을 어길 마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고 있구나. 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구나. 그것을 모른다는 것부터가 자기기만이구나. 나는 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이며, 하나님을 속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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