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한 태도_2012.05.1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1.)
(삼하 13:20-21, 개역) 『[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다윗에게는
많은 처와 그 소생된 자녀들이 있었다. 한날은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함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말았다. 암논은 간교한 친구를 둔 덕분에 거짓 병든 체하다가 다말을 불러들이도록 요청한 후
성폭행했다. 그리고 그녀를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왕은
심히 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뿐이었다.
신명기 27장 22절에 따르면,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했다. 즉, 암논은 누이 다말을 범함으로써 율법상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왕은 암논의 그런 극단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심히 노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아무런 후속조치, 정당한 대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말의 친동생 압살롬으로 하여금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키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이 훗날의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다윗은
암논의 죄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미온적으로 대처해버리고 말았던 걸까?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다. 다윗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던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명백하다.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황하고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자신이 밧세바를 범했던 그 과오를 떠올렸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과오는 다윗에게는 하나의 핸디캡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암논의 죄에 대해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한켠에서 그는 암논의 젊은 혈기와 욕망에 대해 헤아렸던 것이다.
또한,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의 허물에 대해 애틋함이 남달랐을지 모른다. 긁어
부스럼된다고 암논의 죄가 참혹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순화시켜 마무리 짓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즉, 그는 지나친 관용을 허락했다. 뿐 아니라 그의 왕가의 체면이나 명예. 평탄한 왕가에 소란이 일거나 명예가 실추되기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다윗은 좀 더 냉철하지 못했다. 그럼으로 그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훗날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만약, 다윗이 근실히 암논을 징계했더라면 압살롬의 분노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극한 복수심까지는 싹트지 않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자, 이처럼 우리 역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를 알고 있을까? 또, 그렇게 하고 있을까? 사람의 감정은 매우 간교해서 감정만큼 사람을
기만시키는 것이 없다. 불행히도 사람이 감정적인 피조물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것은 종종 비극의 이유가 되곤 한다. 때로는 지나친 배려가 마땅히
경계시켜야 할 것을 방종해버릴 수 있다. 예수님도 분명한 태도를 강조하셨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그렇다.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언젠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의 한 글귀에 이런 조언이 있다.
‘만약, 남편이 그릇된 결정을 하고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려고 할 때는 이혼을 각오해서라도 남편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반대할 줄 알아야 된다. 그런 아내는 남편의 존경을 받는다.’
그렇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부부가 이혼을 각오하면서까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보자. 어떤 부부는 남편이 교회의 뜻에 대항해 그 신앙을
저버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편을 제어하지 않고,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아내는 존경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이 흔들릴 때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교회의 편에 서서 남편을 다시 회개하도록 이끄는 아내가 있다. 존경 받게 된다.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에는 정녕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간편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즉, 고난이 따르는 것이란 의미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겪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권위가
서게 되는 것이다. 고난 없이 질서는 없으며, 고난 없이
말씀의 권위는 견고해지지 않는다.
(삼하 14:32, 개역)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함이로다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다윗의 미온적인
태도가 기어이 불행을 자초했다. 압살롬이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다윗왕은 압살롬을
대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행했던 유일한 징계였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 역시 현명하지 못했다. 암논은 다윗왕의 징계를
받지 않았지만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압살롬의 칼날에 피 흘려 죽었다. 그리고 압살롬이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역시 압살롬에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제 압살롬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 새로운 복수극을 꿈꾸고 있었다. 이후
다윗이 다시금 압살롬의 칼 날을 피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는 참혹함을 겪게 된다. 도망친다는 것만큼
다윗에게 몸서리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 싫은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살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다윗이 사람의 손은 피하겠다고 했겠는가.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타는 복수심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 즉, 그는 전혀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그의 외모가 그 누구보다도 출중하고, 뛰어났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윗왕과 대면하지 못하는 그의 불평을 들어보자.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그는 다윗왕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복수심에 불타 형을 죽인 것에 대해 슬퍼하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얼굴을 보지도 못할 거면서 대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라 하긴 왜 했냐는 것이다. 즉, 못마땅하다 이것이다. 또한, 만일 죄가 있으면 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과 형을 살해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죄악임을 인정치 않았다. 그에게 암논을 쳐 죽인 사건은 마땅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정당했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회개치 않는 압살롬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그를
징계해야 했고, 철저히 회개하도록 함으로써 압살롬이 재기할 수 있도록 훈육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에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에게 조차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충분히 그를 근신시키지 않은 채 용납해버림으로써 화를 좌초했던 것이다.(압살롬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압살롬과 대면해 그에게 입맞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한다.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물론, 심판이나 징계와
같은 조치는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되고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근실히 징계한다는 것이 쉽게 이뤄져야 할 일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 심판보다는 긍휼이 더 우리에게 가까운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동일한 잘못을 할 수 있고, 모든 허물에 대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너그러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분명한 태도조차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할 때 마땅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는 마음가짐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즉, 용서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기 위해 징계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만큼 탁월하신 분은 없다. 증명해보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윗을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정직함과 그의 양심적인 면, 영적감수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다윗이 범죄했을 때 철저히
징계하심으로써 흠 없이 회복되고, 재기하도록 도우셨던 것이다. 다윗을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하나님의 태도는 매우 혹독했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에서 연유된 것이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기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셨다. 그리고 원하는 정직함을 재발견했을
때는 아낌없이 긍휼과 사랑을 베푸심으로 다윗을 감동시키셨다. 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다. 우리 역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명한 태도에 대해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