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는 그리스도인_2012.06.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5.)

 

(왕상 20:40, 개역)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아람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전세는 아람에게 기운 듯 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이스라엘은 아람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과 그 나라의 신앙은 우상숭배로 인해 바닥에 있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람의 벤하닷은 자신의 군대의 우월성을 믿고 전쟁에 임하기도 전 이미 이긴 것처럼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협박했다. 그때 아합왕은 아주 인상 깊은 말을 하였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버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다.’

 

, 누가 이길 것은지는 싸워봐야 아는 것이란 말이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다 싸워서 이긴 군대가 갑옷을 벗는 것처럼 여유롭게 오만을 부리지 말란 말이다. 이 말처럼 하나님은 아합왕을 이기게 하셔서 아람군대를 정벌하고, 벤하닷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빼앗긴 땅을 다시 되돌려줄 것을 허락받았다. 예기치 않은 좋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에는 분명 남다른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결코 아합왕이 이뻐서 그렇게 해주신것이 아니었다.

 

승리한 아합왕은 벤하닷을 풀어주었다. 부친의 세대에 빼앗긴 땅을 돌려받기로 약조했기 때문에 선심을 베푼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합왕이 이기게 해준 것은 아람왕 벤하닷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합왕이 얻은 전쟁의 승리는 벤하닷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합왕은 그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과 징조가 임했다. 선지자의 한 사람이 그에게 변장하고 나타났다.

 

왕이시여,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 오더니 이 사람을 지키되 만약 잃어버리면 생명을 대신할 것이고, 잘 지키면 은 한 달란트를 줄 것이라고 하더이다. 그래서 제가 흔쾌히 약조를 하고 그 사람을 지키는데, 제가 이리저리 일을 보고 있는 동안 사라졌나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합왕은 짧고 단조롭게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서 한 약조이니 그대로 당하여야 할 것이다.’ (당연한 것 아냐??)

 

그 말은 들은 선진자는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고 아합왕에게 경고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멸하려고 한 벤하닷 왕을 당신이 살리셨으니 저의 목숨을 대신해 왕이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왕은 자신이 했던 말을 명백히 상기시키게 되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인간은 결정하는 존재이다. 다른 의미에서 선택하는 존재이다. 선택 받는 것보다는 선택한다는 것이 자유의지와 자발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에게 더욱 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인생은 선택하는 것의 연속이며, 반복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한다라는 의미는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에 의미 있는 연속적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육신, 정욕, 마귀. 그 모든 유혹과 선택의 시험 가운데서 영적인 것을 분별하여 취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이다. 그러나 큰 것에서부터 매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깨어서 정직하지 못하다면 수없는 선택의 실수를 번복하기도 한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환경과 현상들. 세상과 신앙이라는 분명한 기로에 세워진 것들이 너무나 즐비하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삶의 수많은 모양들이 사실은 하나 하나 은밀히 상고해보면 영적인 분별과 의미부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기도 없이, 고민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쫓아 선택하기를 반복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아합왕의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렸던 그 일례를 통해서 우리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어떤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아합왕에게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것이었겠지만, 그것에서부터 그에게 특별한 시험과 기로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을 함으로써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되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하심 아래에서 상식적인 선상에서 볼 때, 극단적인 결과를 빚는 선택이나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신중해질 수는 있다.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것들. 내가 현재 살피고 있고, 경험하며, 맞닥뜨린 현실 앞에서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내게 다가올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해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게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되진 않을까? 우리의 질문은 바로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요구된다. 아합왕이 전쟁에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과 그 전쟁의 승리로부터, 이후의 일어난 벤하닷과의 접촉과 흥정으로부터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훗날의 파생될지 모를 어떤 위험들을 고민할 줄 알았더라면 그는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얻을 교훈을 위해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다. 어떤 것은 위기스럽다. , 때로는 위기스러움을 잘 극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후에 그리고 그 다음에 파생되는 현상들을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작은 구석구석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길 구해야 한다.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들에서 착오가 최소한으로 제한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지라도 실수하는 우리의 습성은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씀의 공포로부터 보다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발걸음과 그 자취들에서부터 자신의 경건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던 판단과 결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어려움을 상고해본다면 분명 더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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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충분치 못하다_2012.06.0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4.)

 

( 1:4-5, 개역)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친히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증명하고,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수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확신했다. 명백한 증거 앞에 탄성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충실한 증거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 그들의 마음에 심기어진 확신은 명백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뛰쳐나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흥분되었고, 격동되었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임마누엘의 분명한 현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자제시키셨다.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제자들은 좀이 쑤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모든 이들에게 증명과 증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증언이라 할만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도 미흡하다고 하셨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결핍이 있음을 일깨우셔야 했다.

 

성령세례가 필요했다. 성령세례로 덧입히어 질 때까지 좀이 쑤셔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어째서? 성령세례가 없는 증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확신,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 그 모든 것이 흠없이 충분할지라도 성령이 필요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성령을 덧입는 것이다. 좋은 수단과 방법, 훌륭한 기능과 준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별시켜주지 않는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루로 성령의 임재가 요구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만큼 성급함을 조심해야 할 사람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증거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때로는 좀이 쑤시는 기다림이 필요할지 몰라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의 임하심이 아니고서는 우리 사역에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께서 임하시고 나타나주시길 기다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급하게 나가고, 성급하게 액션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날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충실히 준비하고, 격동되고 뛰쳐나가려는 것에만 비중을 두지 말고, 성령께서 나타나실 것을 구하고, 기다리라고 말이다. 그것만 결과를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완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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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해진 복음_2012.05.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3.)

 

( 28:18-20, 개역)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노방전도를 하고 왔다. 올해 들어 조별교제를 인도하며 시작한 노방전도가 청년회 차원에서 실행되고 있다. 노방전도는 어려운 일이다. 친목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분명 더 곤란한 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서 전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고,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영혼들을 보여주셨다. 실제로 베트남 황준옥씨가 말씀을 들었고, 진행중에 있다.

 

특별히 노방전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혹시 이 노방전도가 수고했던 만큼 결과가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모든 행위와 노력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한 모습이다. 우리는 선교에 대해 듣고 배운다. 그 옛날 순교의 피를 흘린 선지자들의 고난을 보며 심장이 뛴다. 언젠가는 저 멀리 대양을 넘어 세계의 어딘가에서 선교하는 모습을 꿈꾸며 들뜨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여러 구석에서 만나는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 있는 선교!. 그건 관념의 복음일 뿐이다. 안타까운 건 우리가 점점 상상 속에서 선교하는 꿈을 꾸면서 흥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선교의 피는 뿌려져야 할 것이거늘 우리는 수백년 전 뿌려진 피를 보며 감동하는 이벤트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물론, 노방전도는 결과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에 앞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나가 전도할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그들 앞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선다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상상하는 복음이 아닌.

 

오늘날 전도집회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무기력함을 보면서 솔직히 근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부터가 일에 매여서 참석이 늦거나,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도집회 기간에 많은 분들의 자리가 비어 있다. 무엇인가 모르게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복음의 능력이 생동감 있게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소위 이삭줍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구심을 갖는다. 정말 그것은 사실일까? 이제는 더 이상 뜨거운 복음의 역사는 상상의 산물일까? 오히려 이젠 이삭줍기의 시대란 말로 애써 무기해진 우리의 열정을 위로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증명해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증명해줄 우리의 구세주. 다시 교회가 뜨거워지고 부흥되며,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 생동감 있는 성령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누구일까?!

 

그토록 많은 말씀이 전해지고, 성경의 많은 증거 자료들이 있으며, 언제든지 mp3를 다운받아 하나님의 배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교제가 있고, Q.T가 있고, 간증과 찬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복음은 왜 그토록 무기력한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그 많은 외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진보적이지 못한 것일까? 사실은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일 것이다. 새로운 영혼들이 더 많이 탄생하고, 교회가 복음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 필연이어야 함에도. 많은 성도들이 오히려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건성이고, 교제와 Q.T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노방전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무지한 이방인 앞에 서는 최소한의 시도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끼리만 모여 즐거워하며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지식을 늘려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최후 보루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전도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실적인 노력이 거듭 반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방전도는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를 사랑해주시길 기도한다. 차갑게 말해 오늘날 거듭난 성도라고 말하는 우리들에게서 조차 너무나 시시해져 버린 복음이 되어진 것은 아닌지 우리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깨닫게 되길 원한다. 우리가 속아왔던 사실을 올바로 보게 되길 원한다. 여전히 교회와 복음은 이삭줍기의 시대가 아니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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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순종하는 삶_2012.05.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2.)

 

(열왕기상 9:2-7, 개역)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솔로몬의 시대에 웅장한 성전이 완성되었다. 지난 긴 세월을 그저 성막에서 임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완성된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제대로 건축된 성전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시게 되었다. 거대한 낙성식과 번제가 아울러 드려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구름으로 나타나셨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처소이자,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곳.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의 거룩한 사랑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훗날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말씀하시면서 참된 성전이 예루살렘의 건물이 아닌 구원받는 성도 각자가 될 것임을 암시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해 말씀하셨다.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그렇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성전을 향했다. 이는 곳 구원받은 성도를 향하는 하나님의 눈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항상 감찰하신다. 침 삼키는 그 찰나도 보신다. 늘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바라보신다. 그만큼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성전이 완성되었지만 조건을 말씀하셨다. 온전한 마음.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율례를 지키는 것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거룩히 구별된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린다고 했다. , 성전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게 아니었다. 비록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최상의 조건으로 완성될지라도 예배하는 정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이 정상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 성도가 되었다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전히 변치 않는 경외와 순종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비록 우리가 구별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던져버리심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경각시킨다.

 

성도라는 것. 거룩히 구별된 무리.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완성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의무와 조건이 수반된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 오히려 그렇지 못했다는 회개하는 삶. 하나님께서 받길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멸망은 없지만 유기하심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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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태도_2012.05.1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1.)

 

(삼하 13:20-21, 개역) [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다윗에게는 많은 처와 그 소생된 자녀들이 있었다. 한날은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함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말았다. 암논은 간교한 친구를 둔 덕분에 거짓 병든 체하다가 다말을 불러들이도록 요청한 후 성폭행했다. 그리고 그녀를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왕은 심히 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뿐이었다.

 

신명기 27 22절에 따르면,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했다. , 암논은 누이 다말을 범함으로써 율법상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왕은 암논의 그런 극단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심히 노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아무런 후속조치, 정당한 대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말의 친동생 압살롬으로 하여금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키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이 훗날의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다윗은 암논의 죄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미온적으로 대처해버리고 말았던 걸까?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다. 다윗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던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명백하다.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황하고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자신이 밧세바를 범했던 그 과오를 떠올렸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과오는 다윗에게는 하나의 핸디캡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암논의 죄에 대해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한켠에서 그는 암논의 젊은 혈기와 욕망에 대해 헤아렸던 것이다.

 

또한,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의 허물에 대해 애틋함이 남달랐을지 모른다. 긁어 부스럼된다고 암논의 죄가 참혹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순화시켜 마무리 짓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는 지나친 관용을 허락했다. 뿐 아니라 그의 왕가의 체면이나 명예. 평탄한 왕가에 소란이 일거나 명예가 실추되기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다윗은 좀 더 냉철하지 못했다. 그럼으로 그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훗날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만약, 다윗이 근실히 암논을 징계했더라면 압살롬의 분노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극한 복수심까지는 싹트지 않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 이처럼 우리 역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를 알고 있을까? , 그렇게 하고 있을까? 사람의 감정은 매우 간교해서 감정만큼 사람을 기만시키는 것이 없다. 불행히도 사람이 감정적인 피조물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것은 종종 비극의 이유가 되곤 한다. 때로는 지나친 배려가 마땅히 경계시켜야 할 것을 방종해버릴 수 있다. 예수님도 분명한 태도를 강조하셨다.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그렇다.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언젠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의 한 글귀에 이런 조언이 있다.

만약, 남편이 그릇된 결정을 하고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려고 할 때는 이혼을 각오해서라도 남편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반대할 줄 알아야 된다. 그런 아내는 남편의 존경을 받는다.’

 

그렇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부부가 이혼을 각오하면서까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보자. 어떤 부부는 남편이 교회의 뜻에 대항해 그 신앙을 저버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편을 제어하지 않고,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아내는 존경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이 흔들릴 때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교회의 편에 서서 남편을 다시 회개하도록 이끄는 아내가 있다. 존경 받게 된다.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에는 정녕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간편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 고난이 따르는 것이란 의미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겪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권위가 서게 되는 것이다. 고난 없이 질서는 없으며, 고난 없이 말씀의 권위는 견고해지지 않는다.

 

(삼하 14:32, 개역)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함이로다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다윗의 미온적인 태도가 기어이 불행을 자초했다. 압살롬이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다윗왕은 압살롬을 대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행했던 유일한 징계였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 역시 현명하지 못했다. 암논은 다윗왕의 징계를 받지 않았지만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압살롬의 칼날에 피 흘려 죽었다. 그리고 압살롬이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역시 압살롬에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제 압살롬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 새로운 복수극을 꿈꾸고 있었다. 이후 다윗이 다시금 압살롬의 칼 날을 피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는 참혹함을 겪게 된다. 도망친다는 것만큼 다윗에게 몸서리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 싫은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살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다윗이 사람의 손은 피하겠다고 했겠는가.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타는 복수심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 , 그는 전혀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그의 외모가 그 누구보다도 출중하고, 뛰어났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윗왕과 대면하지 못하는 그의 불평을 들어보자.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그는 다윗왕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복수심에 불타 형을 죽인 것에 대해 슬퍼하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얼굴을 보지도 못할 거면서 대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라 하긴 왜 했냐는 것이다. , 못마땅하다 이것이다. 또한, 만일 죄가 있으면 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과 형을 살해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죄악임을 인정치 않았다. 그에게 암논을 쳐 죽인 사건은 마땅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정당했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회개치 않는 압살롬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그를 징계해야 했고, 철저히 회개하도록 함으로써 압살롬이 재기할 수 있도록 훈육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에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에게 조차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충분히 그를 근신시키지 않은 채 용납해버림으로써 화를 좌초했던 것이다.(압살롬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압살롬과 대면해 그에게 입맞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한다.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물론, 심판이나 징계와 같은 조치는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되고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근실히 징계한다는 것이 쉽게 이뤄져야 할 일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 심판보다는 긍휼이 더 우리에게 가까운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동일한 잘못을 할 수 있고, 모든 허물에 대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너그러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분명한 태도조차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할 때 마땅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는 마음가짐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 용서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기 위해 징계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만큼 탁월하신 분은 없다. 증명해보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윗을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정직함과 그의 양심적인 면, 영적감수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다윗이 범죄했을 때 철저히 징계하심으로써 흠 없이 회복되고, 재기하도록 도우셨던 것이다. 다윗을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하나님의 태도는 매우 혹독했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에서 연유된 것이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기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셨다. 그리고 원하는 정직함을 재발견했을 때는 아낌없이 긍휼과 사랑을 베푸심으로 다윗을 감동시키셨다. 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다. 우리 역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명한 태도에 대해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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