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하는 그리스도인_2012.06.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5.)

 

(왕상 20:40, 개역)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아람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전세는 아람에게 기운 듯 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이스라엘은 아람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과 그 나라의 신앙은 우상숭배로 인해 바닥에 있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람의 벤하닷은 자신의 군대의 우월성을 믿고 전쟁에 임하기도 전 이미 이긴 것처럼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협박했다. 그때 아합왕은 아주 인상 깊은 말을 하였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버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다.’

 

, 누가 이길 것은지는 싸워봐야 아는 것이란 말이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다 싸워서 이긴 군대가 갑옷을 벗는 것처럼 여유롭게 오만을 부리지 말란 말이다. 이 말처럼 하나님은 아합왕을 이기게 하셔서 아람군대를 정벌하고, 벤하닷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빼앗긴 땅을 다시 되돌려줄 것을 허락받았다. 예기치 않은 좋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에는 분명 남다른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결코 아합왕이 이뻐서 그렇게 해주신것이 아니었다.

 

승리한 아합왕은 벤하닷을 풀어주었다. 부친의 세대에 빼앗긴 땅을 돌려받기로 약조했기 때문에 선심을 베푼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합왕이 이기게 해준 것은 아람왕 벤하닷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합왕이 얻은 전쟁의 승리는 벤하닷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합왕은 그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과 징조가 임했다. 선지자의 한 사람이 그에게 변장하고 나타났다.

 

왕이시여,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 오더니 이 사람을 지키되 만약 잃어버리면 생명을 대신할 것이고, 잘 지키면 은 한 달란트를 줄 것이라고 하더이다. 그래서 제가 흔쾌히 약조를 하고 그 사람을 지키는데, 제가 이리저리 일을 보고 있는 동안 사라졌나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합왕은 짧고 단조롭게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서 한 약조이니 그대로 당하여야 할 것이다.’ (당연한 것 아냐??)

 

그 말은 들은 선진자는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고 아합왕에게 경고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멸하려고 한 벤하닷 왕을 당신이 살리셨으니 저의 목숨을 대신해 왕이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왕은 자신이 했던 말을 명백히 상기시키게 되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인간은 결정하는 존재이다. 다른 의미에서 선택하는 존재이다. 선택 받는 것보다는 선택한다는 것이 자유의지와 자발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에게 더욱 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인생은 선택하는 것의 연속이며, 반복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한다라는 의미는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에 의미 있는 연속적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육신, 정욕, 마귀. 그 모든 유혹과 선택의 시험 가운데서 영적인 것을 분별하여 취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이다. 그러나 큰 것에서부터 매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깨어서 정직하지 못하다면 수없는 선택의 실수를 번복하기도 한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환경과 현상들. 세상과 신앙이라는 분명한 기로에 세워진 것들이 너무나 즐비하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삶의 수많은 모양들이 사실은 하나 하나 은밀히 상고해보면 영적인 분별과 의미부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기도 없이, 고민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쫓아 선택하기를 반복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아합왕의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렸던 그 일례를 통해서 우리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어떤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아합왕에게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것이었겠지만, 그것에서부터 그에게 특별한 시험과 기로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을 함으로써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되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하심 아래에서 상식적인 선상에서 볼 때, 극단적인 결과를 빚는 선택이나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신중해질 수는 있다.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것들. 내가 현재 살피고 있고, 경험하며, 맞닥뜨린 현실 앞에서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내게 다가올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해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게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되진 않을까? 우리의 질문은 바로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요구된다. 아합왕이 전쟁에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과 그 전쟁의 승리로부터, 이후의 일어난 벤하닷과의 접촉과 흥정으로부터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훗날의 파생될지 모를 어떤 위험들을 고민할 줄 알았더라면 그는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얻을 교훈을 위해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다. 어떤 것은 위기스럽다. , 때로는 위기스러움을 잘 극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후에 그리고 그 다음에 파생되는 현상들을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작은 구석구석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길 구해야 한다.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들에서 착오가 최소한으로 제한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지라도 실수하는 우리의 습성은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씀의 공포로부터 보다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발걸음과 그 자취들에서부터 자신의 경건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던 판단과 결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어려움을 상고해본다면 분명 더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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