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완전_2012.06.26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6.)

 

(왕상 22:43, 개역)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또한, 성경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완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명령도 없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전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어떤 기업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완전에 대한 인간의 노력과 필요를 말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람 자신의 완전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 본질을 겨냥해 완전에 대해 권면한다.

 

사실 성경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요구를 곰곰히 생각해볼 때, 그것은 매우 지나친 요구라 생각되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이 있음을 아울러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 신분과 자격에 있어서는 말이다.

 

한낱 지옥 갈 죄인에 불과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죽으심과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완전한 의인으로 새로움을 덧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 자체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예수님의 완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로를 덧입음으로 천국 갈 자격과 신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완전을 동일하게 덧입음을 얻는다. 그 점에서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윤리와 도덕, 사회와 인격의 위치에서 조명해 볼 때 여전히 그리스도인도 불완전하고 형편없을 때도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재발견하고 따르는 것 그 모든 것 안에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걸맞는 완전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게 된다.

 

성화되는 것이나 경건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곤란 중에 하나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혹 우리가 이방인들과 같은 술, 담배, 간음, 사기, 도둑질과 같은 이런 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마냥 오산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신분이 다르다는 최소한의 구심점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치열한 싸움이 날마다 매순간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피 흘리는 듯한 싸움의 계속이라 할 수 있다. 악하고 음란한 것, 세속의 즐거움을 피하는 눈, 욕정이 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기도하는 것. 그 순간순간마다. 정직에 대해 갈망하고 고민하는 것.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비롯한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육신적인 즐거움에 대해 절제하고 삼가 취하는 것. 그 모든 것들 안에는 단편적으로 볼 때 극단적인 자기부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생활의 양식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러한 삶에 대해서 ‘그건 너무 엄격하지 않나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경건의 위대함과 능력은 그러한 치열한 금욕과 자기절제, 자기부인 안에서 가장 강력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그리고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에 대해서는 말할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그것은 거의 실제적인 경험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한 구절이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여호사밧왕은 비교적 올바른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노라고 증거해준다. 그러나 열왕기의 많은 왕. 즉, 유다의 왕들 중 선한 왕들로 묘사된 많은 왕들 모두가 한결 같이 피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산당이었다.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하였기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당은 과거 우상숭배하던 왕들이 우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산당이었다. 선한 왕들 조차 사회를 개혁하는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그곳에서 백성들의 일부는 우상숭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잠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잠 25:4, 개역)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쓰기에 부족한 그릇인 이유는 단순하다. 여전히 찌끼가 있다. 누군가는 많이. 누군가는 적게. 누군가는 거의 옥의 티 처럼 작게. 그러나 어쨌든 완전한 사람이란 그토록 적은 것이다. 물론, 그 치열한 완전을 나 역시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을 반성해볼 따름이다.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때로는 뜨거운 가슴으로 타올라 주님을 더 완전히 섬기고 싶노라고 최선을 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켠에서는 숨은 우상숭배와 불경건과 나태함과 안일함이 또아리를 틀고 살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한다라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습에 대해 그 어느 때라도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경건을 놓고 만족해 왔던 적이 많은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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