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되는 실존_2012.07.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7.)
(왕하 1:2-4, 개역)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왕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에게 묻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대조되는 신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일찍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하나님은 만유의 신이시며, 천지의 주재시지만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면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처하셨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아하시야왕이 다락 난간에서 실족하여 떨어져 다치게 되었다. 추락했기 때문에 분명 그것은 신체적으로 매우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분명 골격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든지, 탈골되든지 골격쪽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심장쇼크나 근육파열, 내장쪽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아무튼 왕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기간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태로 간호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하시야왕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는 문제를 놓고 신에게 그 답을 구하기로 맘 먹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그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아하시야왕의 그릇된 행동을 분노하시며, 죽이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왕에게 통탄스러운 불만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분명 하나님이 계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명백히 실존해 있었다.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은 무시당했고, 에그론의 거짓 우상이 존대받았다. 우리는 두 가지의 빗나간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존하고 계셨다. 그러나 망각되었다. 바알세붑은 실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받았다. 분명히 실존하시는 하나님은 망각된 신이 되어 버렸고, 조금도 실체하지 않는 바알세붑은 실존하는 신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늘날의 하나님도 때로는 비슷한 경험에 놓이게 되는 것 같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우연이 없다라고 말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간섭과 주권에 대해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생활의 많은 순간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하시야왕은 불신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실존을 망각하고 우상을 인정한 그릇된 대가로 인해 저주받아 죽었다. 그는 침상에 병들어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버림받았다. 아하시야는 특별한 불신자였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불신자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하시야와 같은 특별한 불신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많은 구석에서 우리에게도 상습적으로 이뤄지는 불신앙적인 기질과 행습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불신자는 아니지만, 매우 불신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능력에 걸림을 주는 찌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분명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르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과 간섭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다가오시고, 개입해주시길 원한다. 우리가 보다 나은 겸손과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신다. 명백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망각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 너무 흥분될 때가 있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성급하다. 하나님께 묻고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급해한다. 그러므로써 하나님은 망각된다. 적어도 그 찰나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받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초래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례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불거지게 되곤 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자아’ 또는 ‘고집’이라는 바알세붑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을 기다리는 수고를 귀찮아하거나 꺼릴 때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생각’이라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간다.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한다. 죽어야 될 자기생각, 버려야 될 자기주장이 버젓이 주장하고 우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숭배한다. 그 신을 인정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통탄스럽게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아하시야만 바알세붑에게 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그 어디를 바알세붑은 없다. 그 바알세붑은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실존하지만 사실은 망각되어져 버린 하나님. 실존하지 않지만 인정되고 있는 바알세붑. 그 놀라운 반전과 기괴한 변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그 행동의 습관들 속에서 종종 재현되고 있는 어두운 실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