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이스라엘_2012.07.2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0.)

 

(왕하 8:22, 개역)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일찍이 다윗왕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 전 국가적인 평안을 선포하였을 때는 주변의 많은 이방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었다. 그러나 이제 북이스라엘고 남유다로 분열되고 날이 갈수록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차츰 그 속국들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국력의 쇠퇴이기 이전에 신앙의 퇴보였다.

 

여호와를 정직하게 섬기는 왕이 부족했다. 그나마 유다는 선한 왕들이 있었지만 북이스라엘은 아예 없었다. 다윗왕국의 위용은 단순히 국력이 아니라 신앙의 충만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다윗왕이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순항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고, 전 국가적인 영적침체와 신앙의 퇴보가 반복되었다. 그것이 분열과 국력의 쇠퇴로 이어졌고, 차츰 속국들이 그 틈을 노려 이탈해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신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교와 영성에 밝아져 있을 때는 우리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마음에서 올라오는 기쁨과 감사함이 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수고로움 속에서도 심령의 낙을 누리며 늘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시험과 고난의 고통을 이기고 극복해나갈 담대함과 용기와 위로를 마음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침체되고, 우리의 기쁨이 꺼지면 차츰 감사가 식어지고, 평강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활 속에서 믿음과 은혜로 다스렸던 육신의 것들과 세속의 찌끼들이 통제의 사슬에서 이탈해가기 시작한다. 나태해지고, 불평이 많아지고, 제어하고 정복했던 육신의 감정과 기질, 세속의 욕망과 거짓들을 구속하는 힘과 능력이 후퇴하면서 그것들이 내 삶의 찌꺼기처럼 달라붙기 시작한다.

 

마치, 말씀에서처럼 에돔도 립나도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원인은 영적침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독은 영적침체일 것이다. 통일왕국의 그 충만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그리워하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분열되는 것, 우상이 고개를 드는 것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개인의 신앙에도 히스기야가 필요하다. 부흥이, 중흥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고,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분열될 때, 침체가 반복된다. 신앙이 후퇴되기 시작할 때 차츰 정복하고 다스렸던 육신의 것들과 죄들이 다시 살아나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윗왕의 통일 이스라엘과 같은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 무너질 때는 히스기야왕 같은 개혁이 내 안에 필요하다. 다스리자. 그리고 부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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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시험_2012.07.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9.)

 

(왕하 5:10-11, 개역)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맞나 보다. 나아만 장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은 나아만 장군을 이와 같이 소개한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며,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나아만 장군은 아람을 구원했다. 그는 큰 용사이다.’  (쥔짜 최고 최고!!)

 

그러나문둥병자이다.’ (>.<)

 

참 정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옥의 티란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모든 면면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을 장수 나아만이건만 혀를 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나아만이나 우리나 어떤 부분에서는 불만족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에게 불만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 ...’(ㅋㅋㅋ. 정직해지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나아만이 치료되길 원했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문둥병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며, 그의 깊은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집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알게 된 나아만은 특별히 왕에게 탄원하여 그를 만나기 위해 갔다.

 

그는 기대반, 의심반 그 위대한 선지자.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해줄 수 있다는 그 선지자를 만나 완치될 꿈 같은 기대와 상상을 하며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내내 그 생각 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 하나님의 선지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정말 능력이 뛰어날까? 그가 어떻게 나를 반겨줄까? 내 문드러진 이 몸을 어떻게 치료해줄까? 만약, 정말 치료가 되면 뭘 해볼까?’ 등등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엘리사의 집 앞에 당도한 나아만 장군. 대장수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전장에서보다 그는 더 떨렸을 것이다. ‘이런 기분 처음이얌-_-;;’

 

나아만 장군은 집 앞에서 엘리사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아니, 종이 나왔다. 종이 대답했다.

곧 주인님 나오십니다요.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굽신굽신’ (X)

저희 주인님께서 요 앞에 요단강에 가셔서 일곱 번 샤워하고 나오라십니다.) (O)

 

캬오~’ 나아만 장군은 순신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지금 장난하냐? 지금 대 아람제국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이 먼 길을 치료받고자 왔는데. 선지자란 사람이 얼굴 한 번 안 비취고 종 한 놈 내보내서 요단강에 씻고 오라고? 지금 내가 무슨 동내 강아진 줄 아나? 내가 지금 맘만 먹으면 너희들 다 죽이고, 선지자고 뭐고 이 집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 적어도 나와서 공손히 인사해서 나를 안으로 들이고, 정성껏 치료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런, 괘씸한부글부글

 

나아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였더라도 우리는 심하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 못난 자존심이 분명 삐쭉거렸을 거다. 나아만의 지위와 명예를 생각해볼 때 가히 엘리사의 대접은 극도로 무례한 것이었다. 분명하다.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아주 평범한 시험을 찾아본다. 엘리사는 왜 그토록 무례하게 그를 대우했던 것일까? 그 이유가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벌어진 상황에서부터 역추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아만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대장군이었다. 그것도 소국(小國)의 장군이 아니라 당시로써는 대제국인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는 매우 권세 있는 자였다. 그의 힘의 구도에서 볼 때, 사실 엘리사는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이긴 하지만 칼사위 한 번에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엘리사가 얼마나 무례하게 했는지 생각해볼 때, 나아만은 얼마든지 격노할 수 있었다. 안면몰수하고 완전 무시당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나아만이 직면한 시험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녕 나아만이 치료되는 해법은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러나 나아만의 생각과 달랐고, 그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하지 않았기에 그는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 교만의 시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물었던 그 질문과 같이 나아만에게 정말 낫고 싶은 갈망이 있는지 시험하였다.

 

엘리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엘리사의 무례한 예우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그의 권세와 명예로부터 비롯된 교만을 시험하는 동시에, 그가 그 수모를 극복하면서까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는 그 깊은 갈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참으로 자신을 낮춰 요단강에 벗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그 낮은 마음. 갈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순간 나아만은 그 모든 시험 앞에서 실패할 뻔 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온 지혜로운 종들이 나아만을 설득시켰다. 나아만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 종들이 아니었다면 나아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자신을 낮춘 나아만은 승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특별한 시험이 아닌 평범한 시험이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교만을 시험하신다. 우리의 자존심이 번뜩이는 그 순간. 그 교만. 은근한 오만. 욕심. 자기명예. 지푸라기 같은 우리조차 얼마나 교만이 뿌리 깊게 우리를 지배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존심을 버리고 굴복해야 할 그 순간에 우리를 실패로 이끌어간다. 우리 안에 진정한 갈망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버린다.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이방의 가나안 여인. 예수님이 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자신을 개에게 까지 낮추었던 그 여인에게 기적이, 은혜가 임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그것이었던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들에서부터 항상 우리 마음의 겸손한 여부를 확인하신다. 우리가 정말 갈망하는지 보신다. 가나안 여인처럼 그 갈망이 자신을 그토록 낮추 수 있는지 확인하신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얼마나 습관적으로 우리는 그런 은밀한 시험을 실패로 반복해왔는지 생각해보았던 것일까?

 

우리가 얼마나 나아만 보다 교만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순간이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가나안 여인과 같은 겸손과 낮아짐과 갈망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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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청_2012.07.0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8.)

 

(열왕기하2:17-18)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엘리야의 승천은 예고되었지만 그 즉시 갑작스레 벌어졌다. 엘리사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비록 엘리야의 뒤를 이어 그의 몸에서 떨어진 옷조각을 가지고 동일한 이적을 행하는 모습이 바로 보여지지만 당황하여서 매우 흥분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엘리야의 승천을 비단 엘리사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일부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도 먼 발치에서 보았다. 그리고 요단의 물을 가르고 건너서 되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과 이적이 엘리야는 승천시키고, 엘리사는 동일한 능력을 받아 물을 가르고 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의 무리들에게 되돌아왔을 때, 기꺼이 절을 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음을 보았기에 그들은 엘리사를 예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엘리야를 찾기를 원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엘리야가 완전히 승천해버렸다고 믿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여전히 충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엘리사에게 깍듯이 예우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능력이 혹시 엘리야를 어느 산, 골짜기에 내려놓았는지 모를 일이라며 엘리야를 찾아봐야겠다고 나섰다.

 

엘리사는 당연히 그것을 막았다. 엘리사는 직감했다. 이제 엘리야의 능력과 영감이 자신에게 임했고,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이어받았음을 말이다. 엘리야는 완벽히 승천한 것이 명백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찾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은 믿지 않았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들은 도마처럼 내가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 그런 주의였다. 무리가 강청하되 엘리사로 하여금 무안할 정도로 강청하였기에 엘리사는 무모한 짓임을 알지만 그들로 하여금 찾아볼 것을 허락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사흘을 찾았지만 엘리야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영원히 승천하였음이 분명했다. 선지자의 무리들이 돌아오자 엘리사가 말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 때도 그러했지만. 그리고 곧 뒤에서 펼쳐질 수넴 여인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지만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것으로 인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셨다.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영감은 분명히 엘리야의 시대가 종식되고, 그 능력이 위임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련의 정당한 절차와 예견된 형식을 따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혼란 속에서 증명되고, 탄생되는 것이다. 정녕 모든 선지자 무리들에게 갑작스러운 엘리야 시대의 종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엘리사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가 엘리야를 찾으러 나서야겠다고 흥분하고 나섰을 때, 엘리사는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그저 무모한 짓이며, 이제 엘리야는 승천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이제 엘리야의 사역과 그 역할은 자신이 수행해나가야 할 것임을 말이다. 물론,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엘리사가 그들을 만류하는 그 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도들 무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았음에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믿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정확히 확인해보길 원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역시 정확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 앞에서 우리는 순전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지 못할 때가 정녕 많이 있다. 우리는 검증하고 싶어한다. 검증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종종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 믿음의 부족이 검증되는 꼴이 나타난다.

 

무모한 강청을 했다. 강청을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가 떡 세덩이를 강청했던 일화를 통해 강청하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말씀하는 성경도 있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강청하는 것이 무모한 짓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왜 강청하며, 무엇을 강청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정당한 강청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때로는 믿음의 부재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 우리가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 나의 어떤 바램을 하나님 앞에 열거하는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방식의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은 흥분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지거나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강청하게 된다.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들의 흥분은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노동한 결과 그들이 얻는 대가는 고작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그 한 마디였던 것이다. 흥분했고, 강청했던 그들이 얻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저 무안해졌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강청하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영혼을 위해 강청한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강청함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자기의 이기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모한 강청을 하기도 한다. 강청하기에 앞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이유로부터 이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지금 나는 흥분해있는 것일까? 나의 강청은 정직한 것일까? 시간이 흐른 뒤에 나의 무모함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청해야할 때가 있고, 강청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그 때와 시기에 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 믿음의 부족이. 또는 내 곁에서 만나는 선지자와 같은 분들의 말을 내 상식과 수준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해서 무모한 강청과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 현상을 받아들이기에 엘리사의 조언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비록 엘리사가 영감을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확인하고 검증해야 된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더 믿고 의지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과 현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조언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검증해봐야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때 분명 우리 믿음의 부족이 가장 선명히 검증되어질 것이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이 강청하는 바와 그 이유를 살필 줄 안다면 우리는 때를 따라 필요한 강청을 구별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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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되는 실존_2012.07.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7.)

 

(왕하 1:2-4, 개역)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왕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에게 묻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대조되는 신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일찍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하나님은 만유의 신이시며, 천지의 주재시지만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면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처하셨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아하시야왕이 다락 난간에서 실족하여 떨어져 다치게 되었다. 추락했기 때문에 분명 그것은 신체적으로 매우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분명 골격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든지, 탈골되든지 골격쪽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심장쇼크나 근육파열, 내장쪽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아무튼 왕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기간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태로 간호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하시야왕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는 문제를 놓고 신에게 그 답을 구하기로 맘 먹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그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아하시야왕의 그릇된 행동을 분노하시며, 죽이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왕에게 통탄스러운 불만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분명 하나님이 계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명백히 실존해 있었다.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은 무시당했고, 에그론의 거짓 우상이 존대받았다. 우리는 두 가지의 빗나간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존하고 계셨다. 그러나 망각되었다. 바알세붑은 실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받았다. 분명히 실존하시는 하나님은 망각된 신이 되어 버렸고, 조금도 실체하지 않는 바알세붑은 실존하는 신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늘날의 하나님도 때로는 비슷한 경험에 놓이게 되는 것 같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우연이 없다라고 말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간섭과 주권에 대해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생활의 많은 순간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하시야왕은 불신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실존을 망각하고 우상을 인정한 그릇된 대가로 인해 저주받아 죽었다. 그는 침상에 병들어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버림받았다. 아하시야는 특별한 불신자였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불신자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하시야와 같은 특별한 불신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많은 구석에서 우리에게도 상습적으로 이뤄지는 불신앙적인 기질과 행습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불신자는 아니지만, 매우 불신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능력에 걸림을 주는 찌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분명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르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과 간섭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다가오시고, 개입해주시길 원한다. 우리가 보다 나은 겸손과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신다. 명백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망각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 너무 흥분될 때가 있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성급하다. 하나님께 묻고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급해한다. 그러므로써 하나님은 망각된다. 적어도 그 찰나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받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초래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례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불거지게 되곤 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자아또는 고집이라는 바알세붑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을 기다리는 수고를 귀찮아하거나 꺼릴 때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생각이라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간다.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한다. 죽어야 될 자기생각, 버려야 될 자기주장이 버젓이 주장하고 우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숭배한다. 그 신을 인정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통탄스럽게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아하시야만 바알세붑에게 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그 어디를 바알세붑은 없다. 그 바알세붑은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실존하지만 사실은 망각되어져 버린 하나님. 실존하지 않지만 인정되고 있는 바알세붑. 그 놀라운 반전과 기괴한 변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그 행동의 습관들 속에서 종종 재현되고 있는 어두운 실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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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완전_2012.06.26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6.)

 

(왕상 22:43, 개역)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또한, 성경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완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명령도 없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전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어떤 기업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완전에 대한 인간의 노력과 필요를 말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람 자신의 완전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 본질을 겨냥해 완전에 대해 권면한다.

 

사실 성경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요구를 곰곰히 생각해볼 때, 그것은 매우 지나친 요구라 생각되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이 있음을 아울러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 신분과 자격에 있어서는 말이다.

 

한낱 지옥 갈 죄인에 불과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죽으심과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완전한 의인으로 새로움을 덧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 자체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예수님의 완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로를 덧입음으로 천국 갈 자격과 신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완전을 동일하게 덧입음을 얻는다. 그 점에서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윤리와 도덕, 사회와 인격의 위치에서 조명해 볼 때 여전히 그리스도인도 불완전하고 형편없을 때도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재발견하고 따르는 것 그 모든 것 안에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걸맞는 완전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게 된다.

 

성화되는 것이나 경건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곤란 중에 하나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혹 우리가 이방인들과 같은 술, 담배, 간음, 사기, 도둑질과 같은 이런 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마냥 오산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신분이 다르다는 최소한의 구심점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치열한 싸움이 날마다 매순간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피 흘리는 듯한 싸움의 계속이라 할 수 있다. 악하고 음란한 것, 세속의 즐거움을 피하는 눈, 욕정이 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기도하는 것. 그 순간순간마다. 정직에 대해 갈망하고 고민하는 것.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비롯한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육신적인 즐거움에 대해 절제하고 삼가 취하는 것. 그 모든 것들 안에는 단편적으로 볼 때 극단적인 자기부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생활의 양식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러한 삶에 대해서 ‘그건 너무 엄격하지 않나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경건의 위대함과 능력은 그러한 치열한 금욕과 자기절제, 자기부인 안에서 가장 강력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그리고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에 대해서는 말할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그것은 거의 실제적인 경험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한 구절이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여호사밧왕은 비교적 올바른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노라고 증거해준다. 그러나 열왕기의 많은 왕. 즉, 유다의 왕들 중 선한 왕들로 묘사된 많은 왕들 모두가 한결 같이 피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산당이었다.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하였기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당은 과거 우상숭배하던 왕들이 우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산당이었다. 선한 왕들 조차 사회를 개혁하는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그곳에서 백성들의 일부는 우상숭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잠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잠 25:4, 개역)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쓰기에 부족한 그릇인 이유는 단순하다. 여전히 찌끼가 있다. 누군가는 많이. 누군가는 적게. 누군가는 거의 옥의 티 처럼 작게. 그러나 어쨌든 완전한 사람이란 그토록 적은 것이다. 물론, 그 치열한 완전을 나 역시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을 반성해볼 따름이다.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때로는 뜨거운 가슴으로 타올라 주님을 더 완전히 섬기고 싶노라고 최선을 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켠에서는 숨은 우상숭배와 불경건과 나태함과 안일함이 또아리를 틀고 살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한다라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습에 대해 그 어느 때라도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경건을 놓고 만족해 왔던 적이 많은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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