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강청_2012.07.0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8.)
(열왕기하2:17-18)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엘리야의 승천은 예고되었지만 그 즉시 갑작스레 벌어졌다. 엘리사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비록 엘리야의 뒤를 이어 그의 몸에서 떨어진 옷조각을 가지고 동일한 이적을 행하는 모습이 바로 보여지지만 당황하여서 매우 흥분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엘리야의 승천을 비단 엘리사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일부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도 먼 발치에서 보았다. 그리고 요단의 물을 가르고 건너서 되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과 이적이 엘리야는 승천시키고, 엘리사는 동일한 능력을 받아 물을 가르고 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의 무리들에게 되돌아왔을 때, 기꺼이 절을 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음을 보았기에 그들은 엘리사를 예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엘리야를 찾기를 원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엘리야가 완전히 승천해버렸다고 믿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여전히 충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엘리사에게 깍듯이 예우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능력이 혹시 엘리야를 어느 산, 골짜기에 내려놓았는지 모를 일이라며 엘리야를 찾아봐야겠다고 나섰다.
엘리사는 당연히 그것을 막았다. 엘리사는 직감했다. 이제 엘리야의 능력과 영감이 자신에게 임했고,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이어받았음을 말이다. 엘리야는 완벽히 승천한 것이 명백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찾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은 믿지 않았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들은 도마처럼 내가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 그런 주의였다. 무리가 강청하되 엘리사로 하여금 무안할 정도로 강청하였기에 엘리사는 무모한 짓임을 알지만 그들로 하여금 찾아볼 것을 허락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사흘을 찾았지만 엘리야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영원히 승천하였음이 분명했다. 선지자의 무리들이 돌아오자 엘리사가 말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 때도 그러했지만. 그리고 곧 뒤에서 펼쳐질 수넴 여인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지만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것으로 인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셨다.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영감은 분명히 엘리야의 시대가 종식되고, 그 능력이 위임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련의 정당한 절차와 예견된 형식을 따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혼란 속에서 증명되고, 탄생되는 것이다. 정녕 모든 선지자 무리들에게 갑작스러운 엘리야 시대의 종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엘리사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가 엘리야를 찾으러 나서야겠다고 흥분하고 나섰을 때, 엘리사는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그저 무모한 짓이며, 이제 엘리야는 승천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이제 엘리야의 사역과 그 역할은 자신이 수행해나가야 할 것임을 말이다. 물론,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엘리사가 그들을 만류하는 그 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도들 무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았음에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믿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정확히 확인해보길 원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역시 정확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 앞에서 우리는 순전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지 못할 때가 정녕 많이 있다. 우리는 검증하고 싶어한다. 검증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종종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 믿음의 부족이 검증되는 꼴이 나타난다.
무모한 강청을 했다. 강청을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가 떡 세덩이를 강청했던 일화를 통해 강청하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말씀하는 성경도 있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강청하는 것이 무모한 짓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왜 강청하며, 무엇을 강청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정당한 강청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때로는 믿음의 부재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 우리가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 나의 어떤 바램을 하나님 앞에 열거하는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방식의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은 흥분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지거나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강청하게 된다.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들의 흥분은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노동한 결과 그들이 얻는 대가는 고작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그 한 마디였던 것이다. 흥분했고, 강청했던 그들이 얻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저 무안해졌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강청하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영혼을 위해 강청한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강청함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자기의 이기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모한 강청을 하기도 한다. 강청하기에 앞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이유로부터 이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지금 나는 흥분해있는 것일까? 나의 강청은 정직한 것일까? 시간이 흐른 뒤에 나의 무모함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청해야할 때가 있고, 강청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그 때와 시기에 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 믿음의 부족이. 또는 내 곁에서 만나는 선지자와 같은 분들의 말을 내 상식과 수준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해서 무모한 강청과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 현상을 받아들이기에 엘리사의 조언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비록 엘리사가 영감을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확인하고 검증해야 된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더 믿고 의지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과 현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조언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검증해봐야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때 분명 우리 믿음의 부족이 가장 선명히 검증되어질 것이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이 강청하는 바와 그 이유를 살필 줄 안다면 우리는 때를 따라 필요한 강청을 구별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