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시험_2012.07.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9.)

 

(왕하 5:10-11, 개역)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맞나 보다. 나아만 장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은 나아만 장군을 이와 같이 소개한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며,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나아만 장군은 아람을 구원했다. 그는 큰 용사이다.’  (쥔짜 최고 최고!!)

 

그러나문둥병자이다.’ (>.<)

 

참 정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옥의 티란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모든 면면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을 장수 나아만이건만 혀를 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나아만이나 우리나 어떤 부분에서는 불만족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에게 불만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 ...’(ㅋㅋㅋ. 정직해지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나아만이 치료되길 원했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문둥병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며, 그의 깊은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집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알게 된 나아만은 특별히 왕에게 탄원하여 그를 만나기 위해 갔다.

 

그는 기대반, 의심반 그 위대한 선지자.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해줄 수 있다는 그 선지자를 만나 완치될 꿈 같은 기대와 상상을 하며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내내 그 생각 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 하나님의 선지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정말 능력이 뛰어날까? 그가 어떻게 나를 반겨줄까? 내 문드러진 이 몸을 어떻게 치료해줄까? 만약, 정말 치료가 되면 뭘 해볼까?’ 등등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엘리사의 집 앞에 당도한 나아만 장군. 대장수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전장에서보다 그는 더 떨렸을 것이다. ‘이런 기분 처음이얌-_-;;’

 

나아만 장군은 집 앞에서 엘리사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아니, 종이 나왔다. 종이 대답했다.

곧 주인님 나오십니다요.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굽신굽신’ (X)

저희 주인님께서 요 앞에 요단강에 가셔서 일곱 번 샤워하고 나오라십니다.) (O)

 

캬오~’ 나아만 장군은 순신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지금 장난하냐? 지금 대 아람제국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이 먼 길을 치료받고자 왔는데. 선지자란 사람이 얼굴 한 번 안 비취고 종 한 놈 내보내서 요단강에 씻고 오라고? 지금 내가 무슨 동내 강아진 줄 아나? 내가 지금 맘만 먹으면 너희들 다 죽이고, 선지자고 뭐고 이 집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 적어도 나와서 공손히 인사해서 나를 안으로 들이고, 정성껏 치료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런, 괘씸한부글부글

 

나아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였더라도 우리는 심하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 못난 자존심이 분명 삐쭉거렸을 거다. 나아만의 지위와 명예를 생각해볼 때 가히 엘리사의 대접은 극도로 무례한 것이었다. 분명하다.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아주 평범한 시험을 찾아본다. 엘리사는 왜 그토록 무례하게 그를 대우했던 것일까? 그 이유가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벌어진 상황에서부터 역추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아만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대장군이었다. 그것도 소국(小國)의 장군이 아니라 당시로써는 대제국인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는 매우 권세 있는 자였다. 그의 힘의 구도에서 볼 때, 사실 엘리사는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이긴 하지만 칼사위 한 번에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엘리사가 얼마나 무례하게 했는지 생각해볼 때, 나아만은 얼마든지 격노할 수 있었다. 안면몰수하고 완전 무시당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나아만이 직면한 시험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녕 나아만이 치료되는 해법은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러나 나아만의 생각과 달랐고, 그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하지 않았기에 그는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 교만의 시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물었던 그 질문과 같이 나아만에게 정말 낫고 싶은 갈망이 있는지 시험하였다.

 

엘리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엘리사의 무례한 예우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그의 권세와 명예로부터 비롯된 교만을 시험하는 동시에, 그가 그 수모를 극복하면서까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는 그 깊은 갈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참으로 자신을 낮춰 요단강에 벗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그 낮은 마음. 갈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순간 나아만은 그 모든 시험 앞에서 실패할 뻔 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온 지혜로운 종들이 나아만을 설득시켰다. 나아만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 종들이 아니었다면 나아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자신을 낮춘 나아만은 승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특별한 시험이 아닌 평범한 시험이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교만을 시험하신다. 우리의 자존심이 번뜩이는 그 순간. 그 교만. 은근한 오만. 욕심. 자기명예. 지푸라기 같은 우리조차 얼마나 교만이 뿌리 깊게 우리를 지배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존심을 버리고 굴복해야 할 그 순간에 우리를 실패로 이끌어간다. 우리 안에 진정한 갈망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버린다.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이방의 가나안 여인. 예수님이 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자신을 개에게 까지 낮추었던 그 여인에게 기적이, 은혜가 임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그것이었던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들에서부터 항상 우리 마음의 겸손한 여부를 확인하신다. 우리가 정말 갈망하는지 보신다. 가나안 여인처럼 그 갈망이 자신을 그토록 낮추 수 있는지 확인하신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얼마나 습관적으로 우리는 그런 은밀한 시험을 실패로 반복해왔는지 생각해보았던 것일까?

 

우리가 얼마나 나아만 보다 교만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순간이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가나안 여인과 같은 겸손과 낮아짐과 갈망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