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시려온다_2012.08.2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7.)

 

(대상 17:1, 개역)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악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다윗. 그래서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윗이 왕이 되었다. 그 많은 환란과 시련의 골짜기는 지나가고, 이제는 달빛의 청명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바람의 소리, 갈대의 부대끼는 속삭임.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별들의 유혹.

 

여유롭게, 사색을 즐기며. 묵상을 하며. 그렇게 왕궁을 한가로이 거닐게 된 다윗.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렇게 왕궁을 거닐던 오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앞에서 마음에 짓눌리는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 내 주의 언약궤는 저 휘장 아래 있구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응축되어진 다윗의 저려오는 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는가. 왕궁을 거닌다는 것. 여유로움과 사색을 누린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다윗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이자, 행복의 극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럼으로 해서 다윗은 남다른 마음의 통증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행복이 어디서 왔던가. 누구의 은혜인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호화로운 삶의 여유와 낭만을 누리는 그는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워졌는지. 자신이 얼마나 복에 겨운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절감했다. 더불어, 자신에게 이 모든 사치스러운 삶의 행복과 영화를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은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한없이 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심. 다윗은 여전히 변함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숨쉬는 양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휘장 아래 놓인 여호와의 언약궤를 바라볼 때, 마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의 높으심은 실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우시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의 언약궤는 예나 지금이나 천 조각 아래 모셔져 있었다. 웅장한 신전이 없었다. 인간의 왕들도 왕궁에 거하며, 그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데. 언약궤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처소에 모셔져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영광의 실추가 아니며, 하나님의 권위의 실추가 아닐찌라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이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웠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도 보자면, 내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에 비해 하나님은 초라한 모양으로 모셔져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우린 그런 사실들을 자각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TV앞에 드러누워 오락을 즐기는 여유와 나태함은 누리면서도, 성경을 읽고 삶의 예배를 드리기는 어렵지 않았었던지.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서는 먹고, 입고, 사고, 누리면서도 주 앞에서면 인색해지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았었던지. 우리의 모습은 백향목 궁에 거하고, 여유와 낭만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과 예배와 충성의 모습은 휘장 아래 모셔진 언약궤 같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양심이 견고했던 그 사실.

 

다윗이 지녔던 것 처럼. 우리 자신들 역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영화로움을 하나님께 받은 은혜인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의 정직한 양심이 필요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가슴 저려오는 그런 통증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그건 불행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해주셨다. 그에게 오히려 반문하셨다. ‘내가 언제 날 위해 백향목 집을 지어달라 한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내가 너를 더욱 존귀케 해주리라.’ 결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엉뚱하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되레 고 녀석 참 기특하구나. , 양심가야. 제대로 철이 들었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기로 마음 먹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정직한 양심과 겸손함으로 그 은헤에 감사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안다라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해주시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더 크게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의 감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깊어지면, 서로에 대한 사랑도 더 커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배려는 감동을 낳고, 감동은 사랑을 돈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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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_2012.08.23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6.)

 

(대상 16:3, 개역) 『또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매 명에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병 하나씩 나누어 주었더라』

 

베레스 웃사 사건 후 오벧에돔에 머물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모셔져 왔다. 다윗은 춤을 추며 뛰놀았고, 미갈은 그런 다윗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두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축제의 날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무리의 사람들에게 떡 한 덩이와 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 병이 각각 주어졌다. 그 어떤 신분의 차별이나 구별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선물이 지급되었다. 요즘에도 어디 행사를 하는 곳에 가면 사은품을 나눠준다. 그처럼 그날의 다윗성에도 사은품이 지급되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분명 그 축제의 자리에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이 모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많은 상당수의 무리가 언약궤의 다윗성 입성을 함께 보며, 큰 기쁨을 누렸겠지만 또, 분명 많은 무리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왕이 잔치에 초대했지만, 자기 상업 때문에 초청을 거절했다는 비유처럼 그 날의 다윗성에도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떤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사실 다윗왕이 백성들에게 나눠준 선물이 귀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언약궤가 다윗성 안으로 모셔진다는 의미 있는 행사에 비해 또,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한 선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떡 한 덩이, 고기 한 조각, 건포도 한 병. 고작 그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왕궁에서 지급하는 선물치고는 뭐, 조촐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해보면, 굳이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아서 그 선물을 받지 못한 들 어느 정도 중산층의 사람들에게는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선물의 가치는 작았을지 몰라도, 그 은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날 다윗성에 모인 그 많은 무리들이 얻은 것은 소정의 사은품이 아니라 만족과 기쁨. 은혜가 더 큰 얻음이었다는 것일 거다. , 고기, 건포도는 그 자리가 아니었어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쁨과 은혜는 오직 그 자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질문되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있을 자리가 어딜까?’ 바로 그 질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다. 그리고 오직 그 모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그것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다. 함께 참예하는 습관은 은혜를 얻는 가장 좋은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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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의 선택_2012.08.2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5.)

 

(대상 12:29, 개역)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좇으나 그 중에서 나아온 자가 삼천 명이요』

 

사울왕의 통치체제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자 다윗에게로 각 지파마다 나아왔다. 그것은 사울왕이 정치적으로 실패하였고, 그의 통치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심지어 다윗에게 나아온 지파 중에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도 3,000명이나 있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전히 베냐민 지파의 태반이 사울왕을 따랐다고 말이다. 그러나 베냐민의 소수 무리는 그들의 지파를 배신했다. 그리고 분명, 다른 그 어느 지파보다도 그들은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을 했음이 분명하고, 힘든 선택을 했음이 분명했다.

 

우선 현재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려 반군 혁명가의 체제에 종속하기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오히려 혁명이 실패하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들의 혁명을 실패로 마치고,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 죽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현 정권의 통치체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지파들에서 나아온 그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 분명히 초래될 하나님의 심판. 다윗의 부흥을 믿고, 기대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용기와 결단에 추가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연의 정을 끊었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사서 고생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사울왕은 베냐민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야 말로 가장 강력한 사울왕의 지지세력이다. 정권이 베냐민 지파로 계승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와 방향 없는 정치에도 불구하고 태반이나 사울왕을 따랐던 것이다. 사울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시간과 물질, 군사력을 허비함으로써 국력을 쇠퇴시켰다. 블레셋이 종종 그 틈을 노려 쳐들어왔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쫓다가 블레셋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건 분명 무모한 권력 행사에 국력을 소비하고 있는 정치적인 실패였다.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전해준 제사장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폭정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는 정치 전반에 국가와 민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정보다는 대책과 구심점이 없는 참담한 정치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태반의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지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 자기 지파로 이어질 왕권. 혈연이 속한 그들에게 사울왕을 배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3,000명은 달랐다는 것이다.

 

그 어느 지파보다 용감했던 그 베냐민 소수의 3,000명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모형이 된다. 구원을 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정 첫 관문이 혈연의 정을 이겨내는 것이다. 자신과 관계된 뿌리깊은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걸림이 되는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그 용기가 있었기에 신앙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자신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도 빗댈 수 있는 상황있다. ‘메시아닉 쥬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민족적 정신과 종교인 유대교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극단적인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용기가 있어야 메시아닉 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그들은 대부분은 유대인 동족들이 잘못된 유대교를 지지하고 따라갈 때, 외로운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그들의 결단은 대단했다.

 

신앙을 지키고,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더 많은 일들이 있다. 형제, 자매의 관계 속에도 육신의 정이 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어딘가 소외된 성도가 되지 않고자 어떤 인간적인 정에 의지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모두와 화목해야 한다. 인간적인 교감도 필요하다. 모든 것들은 다 허용된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감춰진 어느 이면에 필요 이상의 것들이 숨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매력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종속 되어져 백의종군하고 싶어진다. 신앙의 독립, 홀로서기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해서 서기 보다 함께 끼어 가려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소외를 피하고, 신앙을 지키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모두가 용감하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용감했던 그 삼천의 베냐민 무리처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한 선택을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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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땅_2012.08.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4.)

 

(대상 12:8, 개역) 『갓 사람 중에서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역대상 12장에서는 사울왕의 통치체제로부터 벗어나 도망자 다윗에게로 종속되기 위해 나아온 각 지파 사람들에 대해 언급해준다. 심지어 사울왕의 동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조차 삼천명이 다윗에게로 나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갓 지파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옴을 표현한 성경구절에서 다윗이 머물고 있던 지리적인 특성을 짤막하게 설명해준다. 

 

거친 땅 견고한 곳’.

 

바로 그곳이 도망자 다윗이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몸을 숨겼던 장소였다. 문맥의 특성상 어찌보면 이 지리적인 특성을 묘사한 구절은 굳이 필요가 없었을 법 하다. 그러나 특별히 다윗이 머문 이 지리적인 장소에 대한 특징을 언뜻 보면 그냥 눈여겨 보지 않고 스칠 수 있음에도 기술되어져 있음에는 그것이 주는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윗이 머물러던 그 땅은 마치 다윗이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거칠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견고한 땅. 다윗은 도망자였다. 그의 인생의 가장 거칠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견고했다. 하나님께서 그 험한 세월 도중에 동행하셨고, 그를 위대한 왕을 준비시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울왕의 칼날 앞에서도 사실은 연약한 존재로 도망치는 자가 아닌, 실제로는 그 칼 앞에서 견고하게 보호를 받고, 가리우심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거칠고 험악한 땅을 걸을 때가 온다. 사람은 누구나 부드럽고, 평탄한 길을 걷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거칠고 굴곡이 많은 길을 주시기도 하시다. 다윗도 거친 땅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고난을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삶 속에서 거칠고 척박한 걸음을 걸을 때 우리는 매우 고달프다. 슬퍼하고, 낙심하기도 하며 하나님께 자조섞인 원망을 내뱉기도 한다. 자신의 연약함에 울부짖는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보다 나는 못하겠다고 말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스스로가 너무 연약하고, 무조건적으로 은혜와 보호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고만 읇조리기를 좋아한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정답이지만.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태도는 의뢰함이 아니라 그저 포기인 것이다.

 

신앙의 거친 땅을 걸을 때, 척박한 그 땅을 통과할 때 우리는 연약함을 발견하고, 우리는 탄성하게 되지만. 결코 그 도중이 무너져내리는 연약한 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견고한 땅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거친 땅이 사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기에 견고한 땅임을 훗날에는 알게 된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다면. 힘들 때는 힘들어 하면 되고, 어려울 때는 어려워하면 되는 것이다. 무조건 힘들어도 힘들지 말고, 어려워도 어려워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믿음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다. 염려는 덕이 아니란 이유 때문에 염려하게 되는 상황에서 염려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모습이야 말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염려할 수 있다. 다만, 믿으면 된다. 이 척박한 땅이 견고한 땅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음이며, 그 종말이 영원한 영광이며 상급이란 사실을.

 

모든 길에는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날개를 펼쳐 모든 것이 비상하는 것처럼 잘 풀리고 평탄할 때가 있는가하면 또 반대로 날개가 부러지고 모든 것이 끝이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의 시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칠 수는 있지만 허물어져 내리는 나약한 땅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늘 언제나 그리스도의 견고한 반석. 그 땅 위에 있다. 내려 갈 때는 또 올라갈 날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다. 신앙은 그것을 경험하고, 그 종국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반복이 견고한 믿음을 더욱 길러준다.

 

베냐민과 유다 자손들도 다윗에게 나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역시 말한다. 다윗이 머물렀던 그 자리는 견고한 땅이었다고.

 

(대상 12:16, 개역)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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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심령_2012.08.0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3.)

 

(왕하 20:2-5, 개역)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분열왕국 남유다의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왕에게도 위험은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왕은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고, 하나님께 통곡의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했다. 분명, 간절히 심장을 다 받치는 간곡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부르심에 즉시 반응하셔서 이사야로 하여금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금 왕궁으로 되돌아가 회복을 명할 것을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 호소했다. 자신이 진실함과 전심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삶을 회상해달라고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정직하려 했던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추억하셔서 다시금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상한 심령. 히스기야왕의 마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상한 심령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먼 과거 롯의 경우로 그가 소돔에 들어갔다가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했다. 죄악으로 충만한 세상을 겪으면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 그것은 영적침체와 어두움. 양심의 타락이었다. 적어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때보다 롯과 비슷한 상함을 처절히 경험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 타락한 세상의 죄악상을 보면서 우리의 의로운 심령도 무뎌지고, 양심의 무뎌지곤 한다. 나는 가끔 환경오염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볼 때, 오늘날의 세대는 모든 것이 오염되는 세대라는 생각을 해본다. 환경도 오염되고, 사람들의 사상과 죄악도 날로 오염되고, 그리스도인도 오염되어져 가는 세대. 그것이 바로 말세의 끝에 다가온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매체의 발달로 말미암아 죄악을 보고, 듣고, 양심을 파괴시키기에 유리한 세대가 된 지금 결코 그리스도인도 오염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너무나 악한 세대의 이야기들을 날마다 보고, 듣게 된다. 죄의 귀신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것을 무감각하고, 익숙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돔에 살던 롯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암튼, 또 하나의 상한 심령이 있다면 바로 다윗으로 대표되는 심령인 동시에 여기 히스기야왕의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의 북받쳐 오름. 양심의 갈망의 쏟아 부어짐. 바로, 그 상한 심령 말이다. 회개의 심령, 눈물의 심령,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심령. ,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서 찾고 싶어하시는 상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심이다. 간절한 기도는 바로 상한 심령에서부터 비롯된다. 다윗의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늘 묻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상한 심령이 기도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회개에 승리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회개의 승리 역시 상한 심령에 달려 있다. 히스기야왕을 보라. 그의 상한 심령의 회개와 간구가 그를 회복시켰다. 회개에 빠르면, 회복도 빨라진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무뎌진 양심의 상한 심령으로 이끌어 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통로와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세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만드신 그 모든 만물과 인간마저도 타락되고 오염되어지는 막장의 세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마저 오염의 세대가 될 처지에 놓인 무서운 세대 앞에서 하나님은 더욱더 그리스도인의 상한 심령을 찾길 원하실 것이다.

 

원한을 갖고 간절히 매달렸던 과부를 인용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그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다. 적어도 그런 간구하는 심령. 그 믿음을 보기 힘든 세대가 분명하다. 그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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