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의 선택_2012.08.2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5.)

 

(대상 12:29, 개역)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좇으나 그 중에서 나아온 자가 삼천 명이요』

 

사울왕의 통치체제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자 다윗에게로 각 지파마다 나아왔다. 그것은 사울왕이 정치적으로 실패하였고, 그의 통치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심지어 다윗에게 나아온 지파 중에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도 3,000명이나 있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전히 베냐민 지파의 태반이 사울왕을 따랐다고 말이다. 그러나 베냐민의 소수 무리는 그들의 지파를 배신했다. 그리고 분명, 다른 그 어느 지파보다도 그들은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을 했음이 분명하고, 힘든 선택을 했음이 분명했다.

 

우선 현재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려 반군 혁명가의 체제에 종속하기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오히려 혁명이 실패하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들의 혁명을 실패로 마치고,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 죽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현 정권의 통치체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지파들에서 나아온 그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 분명히 초래될 하나님의 심판. 다윗의 부흥을 믿고, 기대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용기와 결단에 추가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연의 정을 끊었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사서 고생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사울왕은 베냐민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야 말로 가장 강력한 사울왕의 지지세력이다. 정권이 베냐민 지파로 계승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와 방향 없는 정치에도 불구하고 태반이나 사울왕을 따랐던 것이다. 사울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시간과 물질, 군사력을 허비함으로써 국력을 쇠퇴시켰다. 블레셋이 종종 그 틈을 노려 쳐들어왔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쫓다가 블레셋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건 분명 무모한 권력 행사에 국력을 소비하고 있는 정치적인 실패였다.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전해준 제사장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폭정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는 정치 전반에 국가와 민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정보다는 대책과 구심점이 없는 참담한 정치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태반의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지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 자기 지파로 이어질 왕권. 혈연이 속한 그들에게 사울왕을 배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3,000명은 달랐다는 것이다.

 

그 어느 지파보다 용감했던 그 베냐민 소수의 3,000명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모형이 된다. 구원을 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정 첫 관문이 혈연의 정을 이겨내는 것이다. 자신과 관계된 뿌리깊은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걸림이 되는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그 용기가 있었기에 신앙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자신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도 빗댈 수 있는 상황있다. ‘메시아닉 쥬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민족적 정신과 종교인 유대교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극단적인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용기가 있어야 메시아닉 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그들은 대부분은 유대인 동족들이 잘못된 유대교를 지지하고 따라갈 때, 외로운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그들의 결단은 대단했다.

 

신앙을 지키고,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더 많은 일들이 있다. 형제, 자매의 관계 속에도 육신의 정이 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어딘가 소외된 성도가 되지 않고자 어떤 인간적인 정에 의지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모두와 화목해야 한다. 인간적인 교감도 필요하다. 모든 것들은 다 허용된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감춰진 어느 이면에 필요 이상의 것들이 숨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매력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종속 되어져 백의종군하고 싶어진다. 신앙의 독립, 홀로서기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해서 서기 보다 함께 끼어 가려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소외를 피하고, 신앙을 지키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모두가 용감하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용감했던 그 삼천의 베냐민 무리처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한 선택을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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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땅_2012.08.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4.)

 

(대상 12:8, 개역) 『갓 사람 중에서 거친 땅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가 있었으니 다 용사요 싸움에 익숙하여 방패와 창을 능히 쓰는 자라 그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

 

역대상 12장에서는 사울왕의 통치체제로부터 벗어나 도망자 다윗에게로 종속되기 위해 나아온 각 지파 사람들에 대해 언급해준다. 심지어 사울왕의 동 지파인 베냐민 지파에서 조차 삼천명이 다윗에게로 나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갓 지파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옴을 표현한 성경구절에서 다윗이 머물고 있던 지리적인 특성을 짤막하게 설명해준다. 

 

거친 땅 견고한 곳’.

 

바로 그곳이 도망자 다윗이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몸을 숨겼던 장소였다. 문맥의 특성상 어찌보면 이 지리적인 특성을 묘사한 구절은 굳이 필요가 없었을 법 하다. 그러나 특별히 다윗이 머문 이 지리적인 장소에 대한 특징을 언뜻 보면 그냥 눈여겨 보지 않고 스칠 수 있음에도 기술되어져 있음에는 그것이 주는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윗이 머물러던 그 땅은 마치 다윗이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거칠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은 견고한 땅. 다윗은 도망자였다. 그의 인생의 가장 거칠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견고했다. 하나님께서 그 험한 세월 도중에 동행하셨고, 그를 위대한 왕을 준비시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울왕의 칼날 앞에서도 사실은 연약한 존재로 도망치는 자가 아닌, 실제로는 그 칼 앞에서 견고하게 보호를 받고, 가리우심을 입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거칠고 험악한 땅을 걸을 때가 온다. 사람은 누구나 부드럽고, 평탄한 길을 걷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거칠고 굴곡이 많은 길을 주시기도 하시다. 다윗도 거친 땅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고난을 즐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삶 속에서 거칠고 척박한 걸음을 걸을 때 우리는 매우 고달프다. 슬퍼하고, 낙심하기도 하며 하나님께 자조섞인 원망을 내뱉기도 한다. 자신의 연약함에 울부짖는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보다 나는 못하겠다고 말할 때가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스스로가 너무 연약하고, 무조건적으로 은혜와 보호를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고만 읇조리기를 좋아한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정답이지만. 스스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태도는 의뢰함이 아니라 그저 포기인 것이다.

 

신앙의 거친 땅을 걸을 때, 척박한 그 땅을 통과할 때 우리는 연약함을 발견하고, 우리는 탄성하게 되지만. 결코 그 도중이 무너져내리는 연약한 땅은 아니었다. 오히려 견고한 땅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거친 땅이 사실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기에 견고한 땅임을 훗날에는 알게 된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는 한 가지 비결이 있다면. 힘들 때는 힘들어 하면 되고, 어려울 때는 어려워하면 되는 것이다. 무조건 힘들어도 힘들지 말고, 어려워도 어려워 하지 말아라고 말하는 믿음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다. 염려는 덕이 아니란 이유 때문에 염려하게 되는 상황에서 염려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모습이야 말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염려할 수 있다. 다만, 믿으면 된다. 이 척박한 땅이 견고한 땅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 있음이며, 그 종말이 영원한 영광이며 상급이란 사실을.

 

모든 길에는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날개를 펼쳐 모든 것이 비상하는 것처럼 잘 풀리고 평탄할 때가 있는가하면 또 반대로 날개가 부러지고 모든 것이 끝이 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의 시간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칠 수는 있지만 허물어져 내리는 나약한 땅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늘 언제나 그리스도의 견고한 반석. 그 땅 위에 있다. 내려 갈 때는 또 올라갈 날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다. 신앙은 그것을 경험하고, 그 종국에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반복이 견고한 믿음을 더욱 길러준다.

 

베냐민과 유다 자손들도 다윗에게 나아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역시 말한다. 다윗이 머물렀던 그 자리는 견고한 땅이었다고.

 

(대상 12:16, 개역)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견고한 곳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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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심령_2012.08.0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3.)

 

(왕하 20:2-5, 개역)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분열왕국 남유다의 위대한 개혁가 히스기야왕에게도 위험은 있었고, 실패도 있었다.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왕은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고, 하나님께 통곡의 눈물로 호소하며 회개했다. 분명, 간절히 심장을 다 받치는 간곡함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간절한 부르심에 즉시 반응하셔서 이사야로 하여금 돌아가는 도중에 다시금 왕궁으로 되돌아가 회복을 명할 것을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히스기야왕은 하나님께 호소했다. 자신이 진실함과 전심을 다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삶을 회상해달라고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정직하려 했던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추억하셔서 다시금 기회를 달라고 말이다. 상한 심령. 히스기야왕의 마음은 바로 그것이었다.

 

성경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대조적인 상한 심령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먼 과거 롯의 경우로 그가 소돔에 들어갔다가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했다. 죄악으로 충만한 세상을 겪으면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 그것은 영적침체와 어두움. 양심의 타락이었다. 적어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그 어느 때보다 롯과 비슷한 상함을 처절히 경험하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 타락한 세상의 죄악상을 보면서 우리의 의로운 심령도 무뎌지고, 양심의 무뎌지곤 한다. 나는 가끔 환경오염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볼 때, 오늘날의 세대는 모든 것이 오염되는 세대라는 생각을 해본다. 환경도 오염되고, 사람들의 사상과 죄악도 날로 오염되고, 그리스도인도 오염되어져 가는 세대. 그것이 바로 말세의 끝에 다가온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마,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매체의 발달로 말미암아 죄악을 보고, 듣고, 양심을 파괴시키기에 유리한 세대가 된 지금 결코 그리스도인도 오염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너무나 악한 세대의 이야기들을 날마다 보고, 듣게 된다. 죄의 귀신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그것을 무감각하고, 익숙하게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돔에 살던 롯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암튼, 또 하나의 상한 심령이 있다면 바로 다윗으로 대표되는 심령인 동시에 여기 히스기야왕의 상한 심령이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의 북받쳐 오름. 양심의 갈망의 쏟아 부어짐. 바로, 그 상한 심령 말이다. 회개의 심령, 눈물의 심령,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심령. , 하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서 찾고 싶어하시는 상심이다.

 

그리스도인의 성공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심이다. 간절한 기도는 바로 상한 심령에서부터 비롯된다. 다윗의 기도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늘 묻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상한 심령이 기도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회개에 승리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회개의 승리 역시 상한 심령에 달려 있다. 히스기야왕을 보라. 그의 상한 심령의 회개와 간구가 그를 회복시켰다. 회개에 빠르면, 회복도 빨라진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무뎌진 양심의 상한 심령으로 이끌어 가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상한 심령으로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통로와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세상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말, 만드신 그 모든 만물과 인간마저도 타락되고 오염되어지는 막장의 세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마저 오염의 세대가 될 처지에 놓인 무서운 세대 앞에서 하나님은 더욱더 그리스도인의 상한 심령을 찾길 원하실 것이다.

 

원한을 갖고 간절히 매달렸던 과부를 인용하시면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그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다. 적어도 그런 간구하는 심령. 그 믿음을 보기 힘든 세대가 분명하다. 그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직면한 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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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그리스도인_2012.08.0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2.)

 

(대상 10:13-14, 개역) [13]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사무엘상에는 사울의 일대기가 정교하게 서술 되어진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그것도 신앙의 실패자의 표상인 사울을 정교하게 서술한다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그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이다.

 

사울의 삶과 실패와 그의 빗나간 가치관에 대한 묵상은 나 역시 많이 했던 부분이다. 여기 역대상에서 사울을 상기하면서 두 구절을 들어 요약해주고 있다. 사울은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신을 잃어버리고, 악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것이 신앙인에게 어울릴까? 무척이나 다른 세계임에도 불구, 사울은 그 경계를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에 대해 역대상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울의 범죄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범죄는 무엇이었을까? 예전에도 말했든 사울이 도덕적, 윤리적인 범죄를 했다는 성경 기록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범죄를 범했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더 큰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 하나님께 묻고, 의뢰하고 청했던 것이 아니라 신접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을 자기 삶 속에서 철저히 배제시켜 버렸다. 그는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던 배신자였다. 마치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이 한 사람에게 반영 되어진 축소판 같았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존재이다. 특별히 죄에 대한 새로운 양심을 부여 받은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할 수록, 양심의 눈이 밝아질수록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작은 죄에 대해서도 가책을 느낀다. 범죄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가장 조심스런 부분이며, 더러운 오물을 밟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 정욕, 교만, 이기심, 육신의 것, 분노, 무절제, 다툼, 게으름, 영적침체, 걱정 등. 그리스도인에게 대표적인 죄이다. 한편, 이 죄는 어떠한가? 기도 가운데 충분히 하나님께 묻고, 의뢰하지 않음. 성급함.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림. 말씀을 등한시 함. 사람의 지혜를 구함.

 

말씀 가운데서, 스스로의 기도 가운데서 충분히 하나님께 묻고 그 응답을 기다리기 전에 사람에게 먼저 물어 보고,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 세상이 제공해주는 정보를 의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보통의 다양한 죄들에 비해 훨씬 더 큰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울이 죽었다. 그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 범죄는 도덕적인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말씀을 등한시 했다.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묻지 않았다. 자기의 욕망대로 나아갔고, 회개치 않았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없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울에게 분노한 이유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삶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묻고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는 것일까? 이 태도는 습관이 되었던가. 이 태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올라와 있었던가. 그리스도인의 범죄가 그토록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항상 고려되어야 할 삶의 지표는 아니었던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것이 범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우선 원칙이다. 삶 속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 범사에 하나님을 간섭하시도록 하는 것.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귀찮지만 그랬을 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섬기는 자의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기억하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범죄는 모든 범죄의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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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탄생_2012.08.04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1.)

 

(왕하 16:20, 개역) 『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20:21, 개역)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하스는 악한 왕이었다. 우상숭배자 불신자였다. 성경은 그가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했다고 증거한다. 또한, 이방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아마, 몰렉 우상을 섬겼던 것 같다. 심지어 아하스왕은 앗수르왕의 초청으로 다메섹에 갔다가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단의 구조와 제도를 본따 예루살렘에 단을 세웠다. 철저한 우상숭배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성경은 히스기야왕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노라고 말이다.

 

다윗 이후 유다의 신앙부흥과 회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왕이 히스기야왕이었다. 그는 분명히 종교적 개혁가이자 유다의 영적부흥과 중흥의 리더였다. 그리고 히스기야왕도 잠들었다. 이제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이었다. 성경은 므낫세 왕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쪼차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하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시을 숭배하여 섬겼노라고.

 

므낫세는 섬길 수 있는 우상은 모조리 모아다 섬겼던 유다 최악의 우상숭배자였다. 심지어 성전 마당에서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점을 쳤다. 그는 지독한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종교혼합주의자였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므낫세로 이어지는 유다왕의 종교적 취향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는 것일까.

 

우상숭배자에게서 여호와 신앙의 부흥가가, 신앙의 부흥가에게서 혼합주의 우상숭배자가 나왔다. 이 분명한 모순이 사실은 가장 일반적이다.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은 어떻게 이뤄졌던 것일까. 오늘날 우리교회가 현재의 성도 규모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신앙의 전승과 그리스도인의 계승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그 혈통을 통해 이뤄져 왔던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복음의 확장은 너무나 더딜 뿐이다. 복음이 수없이 많은 우상숭배자들과 각양각색의 불신자들에게 전해지면서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신자였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거룩해지고 그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의 밑에서 탄생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인이 탄생되기도 하지만 숫적으로 비교하자면 오히려 불신자의 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한편, 불신자는 어떻게 탄생될까. 대부분의 불신자는 불신자 부모로부터 탄생된다. 당연하다. 불신자 부모가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따로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서 불신자들이 탄생된다. 부모는 믿고 거룩하게 되었으나 그 자녀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화합치 않은 불신자들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장성해가면서 교회를 떠나고, 구원의 확신이 없고. 세상의 종의 된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매우 희귀한 현상이 아니라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란 것이다.

 

우상숭배자 아하스에게서 위대한 부흥개혁가 히스기야 왕이 탄생했다. 그렇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불신자의 부모 밑에서 비롯된 예가 너무나 많다. 오히려 믿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리스도인보다 불신자의 부모 밑에서 믿음의 투쟁과 좌절을 극복한 그리스도인이 훨씬 더 뜨겁고 강한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인보다 불신자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인이 더 출중한 예가 많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위대한 신앙개혁가 히스기야 왕에게서 유다 제일의 우상숭배자이자 종교혼합주의자 므낫세왕이 탄생했다.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자.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던 무모한 왕. 불신자의 자녀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자녀가 지독한 불신자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탄생은 어디서부터인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더 많이는 불신자의 자녀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 불신자는 어디서부터인가. 대부분의 불신자는 불신자로부터 비롯된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귀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옛날 복음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었던 영국과 미국이 오늘날 빈 껍데기가 되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할까. 17~18세기를 복음이 불로 태웠던 잉글랜드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녀들은, 그 후손들은 불신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좀 씁쓸한 사실이지만, 교회는 뜨겁지 않다. 복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편 교회는 뜨거웠고, 오래갔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복음의 수혜를 입는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복음과 교회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복음은 여행을 했으며, 교회는 역사는 옮겨다녔다.

 

한때는 불신자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탄생했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던 교회가. 나라가. 지역이 이제는 불신자들만 자라나는 황무지가 되기도 한다. 한때는 복음의 수혜를 조금도 볼 수 없었고, 불신자로부터 불신자만 탄생했던 나라와 지역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 탄생되는 기적의 장소가 된다. 그렇게 복음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로 매 시대에 불변하면서 타올랐던 것이 아니라 옮겨다니며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로부터 탄생되었던가. 불신자는 어디로부터 탄생되었던가. 그 출처를 알고 발견하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닌가. 불신자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아름다운 현상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이치가 항상 적용된다라면 세상은 이미 복음화되었을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책임. 그리스도인 부모가 된다는 것의 책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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