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의 선택_2012.08.2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5.)

 

(대상 12:29, 개역) 『베냐민 자손 곧 사울의 동족은 아직도 태반이나 사울의 집을 좇으나 그 중에서 나아온 자가 삼천 명이요』

 

사울왕의 통치체제에서 등을 돌리고, 도망자 다윗에게로 각 지파마다 나아왔다. 그것은 사울왕이 정치적으로 실패하였고, 그의 통치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심지어 다윗에게 나아온 지파 중에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도 3,000명이나 있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전히 베냐민 지파의 태반이 사울왕을 따랐다고 말이다. 그러나 베냐민의 소수 무리는 그들의 지파를 배신했다. 그리고 분명, 다른 그 어느 지파보다도 그들은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을 했음이 분명하고, 힘든 선택을 했음이 분명했다.

 

우선 현재 공권력을 행사하는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려 반군 혁명가의 체제에 종속하기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그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오히려 혁명이 실패하면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들의 혁명을 실패로 마치고,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 죽을 각오가 아니고서야 현 정권의 통치체제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지파들에서 나아온 그들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 분명히 초래될 하나님의 심판. 다윗의 부흥을 믿고, 기대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용기와 결단에 추가적으로 가장 가까운 혈연의 정을 끊었던 사람들이었다. 어느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사서 고생을 자초한 사람들이었다.

 

사울왕은 베냐민 출신이다. 베냐민 지파야 말로 가장 강력한 사울왕의 지지세력이다. 정권이 베냐민 지파로 계승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므로 사울왕의 정치적인 실패와 방향 없는 정치에도 불구하고 태반이나 사울왕을 따랐던 것이다. 사울왕은 다윗을 잡기 위해 시간과 물질, 군사력을 허비함으로써 국력을 쇠퇴시켰다. 블레셋이 종종 그 틈을 노려 쳐들어왔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쫓다가 블레셋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했다. 그건 분명 무모한 권력 행사에 국력을 소비하고 있는 정치적인 실패였다.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을 전해준 제사장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폭정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는 정치 전반에 국가와 민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정보다는 대책과 구심점이 없는 참담한 정치를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태반의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을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기 지파가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 자기 지파로 이어질 왕권. 혈연이 속한 그들에게 사울왕을 배반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3,000명은 달랐다는 것이다.

 

그 어느 지파보다 용감했던 그 베냐민 소수의 3,000명은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모형이 된다. 구원을 받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정 첫 관문이 혈연의 정을 이겨내는 것이다. 자신과 관계된 뿌리깊은 인간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걸림이 되는 모든 것을 끊어야 한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나 그 용기가 있었기에 신앙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자신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도 빗댈 수 있는 상황있다. ‘메시아닉 쥬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민족적 정신과 종교인 유대교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극단적인 유대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까지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용기가 있어야 메시아닉 쥬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지그들은 대부분은 유대인 동족들이 잘못된 유대교를 지지하고 따라갈 때, 외로운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께 나아왔다. 그들의 결단은 대단했다.

 

신앙을 지키고,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더 많은 일들이 있다. 형제, 자매의 관계 속에도 육신의 정이 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어딘가 소외된 성도가 되지 않고자 어떤 인간적인 정에 의지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모두와 화목해야 한다. 인간적인 교감도 필요하다. 모든 것들은 다 허용된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감춰진 어느 이면에 필요 이상의 것들이 숨어 있다.

 

누군가에게는 외로움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매력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종속 되어져 백의종군하고 싶어진다. 신앙의 독립, 홀로서기를 통해 하나님과 대면해서 서기 보다 함께 끼어 가려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소외를 피하고, 신앙을 지키는 안전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모두가 용감하고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용감했던 그 삼천의 베냐민 무리처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용감한 선택을 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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