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시려온다_2012.08.2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7.)

 

(대상 17:1, 개역) 『다윗이 그 궁실에 거할 때에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여호와의 언악궤는 휘장 밑에 있도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다윗. 그래서 인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윗이 왕이 되었다. 그 많은 환란과 시련의 골짜기는 지나가고, 이제는 달빛의 청명함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바람의 소리, 갈대의 부대끼는 속삭임.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별들의 유혹.

 

여유롭게, 사색을 즐기며. 묵상을 하며. 그렇게 왕궁을 한가로이 거닐게 된 다윗.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그렇게 왕궁을 거닐던 오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 앞에서 마음에 짓눌리는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 내 주의 언약궤는 저 휘장 아래 있구려…’

 

이 짧은 한 마디 속에 응축되어진 다윗의 저려오는 마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는가. 왕궁을 거닌다는 것. 여유로움과 사색을 누린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다윗에게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이자, 행복의 극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럼으로 해서 다윗은 남다른 마음의 통증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행복이 어디서 왔던가. 누구의 은혜인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은혜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호화로운 삶의 여유와 낭만을 누리는 그는 불현듯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워졌는지. 자신이 얼마나 복에 겨운 행복을 누리고 있는지 절감했다. 더불어, 자신에게 이 모든 사치스러운 삶의 행복과 영화를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지금은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한없이 밀려오는 가슴의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양심. 다윗은 여전히 변함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숨쉬는 양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깨어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여전히 초라한 모습으로 휘장 아래 놓인 여호와의 언약궤를 바라볼 때, 마음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결코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와 위엄의 높으심은 실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가장 높고, 영화로우시다. 그러나 반대로 여호와의 언약궤는 예나 지금이나 천 조각 아래 모셔져 있었다. 웅장한 신전이 없었다. 인간의 왕들도 왕궁에 거하며, 그 왕권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데. 언약궤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처소에 모셔져 있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영광의 실추가 아니며, 하나님의 권위의 실추가 아닐찌라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이었다. 그렇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웠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속에서도 보자면, 내가 누리는 영광스러움에 비해 하나님은 초라한 모양으로 모셔져 있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우린 그런 사실들을 자각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TV앞에 드러누워 오락을 즐기는 여유와 나태함은 누리면서도, 성경을 읽고 삶의 예배를 드리기는 어렵지 않았었던지. 자신의 삶의 질을 위해서는 먹고, 입고, 사고, 누리면서도 주 앞에서면 인색해지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았었던지. 우리의 모습은 백향목 궁에 거하고, 여유와 낭만을 누리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희생과 예배와 충성의 모습은 휘장 아래 모셔진 언약궤 같지는 않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양심이 견고했던 그 사실.

 

다윗이 지녔던 것 처럼. 우리 자신들 역시, 우리가 누리는 모든 영화로움을 하나님께 받은 은혜인줄 아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의 정직한 양심이 필요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가슴 저려오는 그런 통증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그건 불행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해주셨다. 그에게 오히려 반문하셨다. ‘내가 언제 날 위해 백향목 집을 지어달라 한 적이 있었느냐? 오히려 내가 너를 더욱 존귀케 해주리라.’ 결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엉뚱하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되레 고 녀석 참 기특하구나. , 양심가야. 제대로 철이 들었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기로 마음 먹으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정직한 양심과 겸손함으로 그 은헤에 감사하고, 송구스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안다라면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허락해주시는 법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더 크게 감동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감사의 감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깊어지면, 서로에 대한 사랑도 더 커져가는 것처럼. 그렇게 배려는 감동을 낳고, 감동은 사랑을 돈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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