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Lord come?_2013.01.0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1.)

 

( 22:10-12, 개역)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신약시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무렵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생존할 때 재림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 서신서 전반에 당시가 말세 내지 곧 예수님이 오신다고 여러 번 표현되어 있다. 지금보면 이미 2000년이 지났건만. 어쨌든 그것이 당시의 믿음이었다고 하니.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성경이다. 그는 환상을 보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못할 어떤 미지의 세상과 환란을 보았다. 역사의 종말을 보았고,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분명, 그 환상이 당시의 시대상과는 다른 그 무엇이었음이 분명했었음에도 계시록의 마지막은 결국 타 서신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여전히 때가 가깝다고 말한다. 분명, 요한이 본 환상은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동떨어졌음에도 말이다. 2000년이 지났고, 주님 오시기 전의 모든 예언은 다 이루어졌음에도 사도 시대부터 말세라 칭해지던 그 종국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

 

어찌보면 무모한 질문 같다. 당장 오실 것처럼 생각한 사도들의 시대로부터도 2000년이 다 되도록 실현되지 않은 주님의 재림. 정말 예언이 다 이뤄진 세상의 말미라고 말하는 우리 세대조차 여전히 기다리는 주님. 2000년간 말세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오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날.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점점 주님의 오심에 대해 무감각해져가는 그것이 주님의 오심의 또 다른 증거인지 모르겠다. 주님은 여전히 안 오신다고 차츰 믿어갈 때, 그렇게 갑자기. 정말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신다면 바로 그것이 실현되는 한 날이 온다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 같다. 정말 주님이 오신다고 믿고 생활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기 세대와는 다른 세대를 통해 종말을 보았던 사도 요한 조차 때가 가깝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시고 2000년이 흘렀다는 그 시간적인 의미는 그리 중요하진 않은가 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정말 때가 가깝다고 믿는 그것. 주님의 언제든지 오심에 깨어있는 삶을 사는 그것. 그게 더 중요한 것인가 보다. 2000년이 다 되어가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셨다. ? 때가 가까워 곧 이뤄질 예언이기에. 그러니 2000년이란 것이 아무리 무구한 역사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시간으로써 큰 의미가 있는가. 경점일 뿐. 그러나 시간 속에 구속되어져 살아가는 우리는 경점이 아니기에 주님의 다시 오심은 너무나 지루한 역사의 기다림처럼 보여진다. 마음은 무뎌진다. 그러나 성경은 확증은 변함이 없다. 때가 가까웠다. 주님이 오신 이후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이뤄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때는 가까움 그 자체이다. , 언제든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 소망의 믿음으로 세상에 속하지 말고, 깨어 기다리는 삶의 자세로 나그네의 인생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을 일깨우시는 가르침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주님은 안 오실 것만 같이 비춰졌다. 그래서 세상을 조금씩 사랑했고, 세상과 조금씩 타협했고, 세상의 것을 좀 더 얻고 싶어 갈등했다. 구별된 참된 삶의 모습이 아닌 슬그머니 한 쪽 발을 걸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롭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그리하라고. 선물은 각자 그 행한대로 받는 것이라고. 모두가 자신의 가치관과 그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그 일상의 반복이 변함없이 이뤄지는 그 한 날. 그날이 바로 주님이 오시는 날인 것이다. 어제나 오늘, 과거나 현재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항상 동에서 해가 뜨고, 서에서 해가지고 그렇게 일상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제각각 그 살아오던 삶의 양식대로 살아오는 그 평범한 날 주님은 갑자기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해서 그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은 단지 시간의 개념에서 멀리 있는 그 날이 아니다. 생활의 관점에서 지금 내 삶의 이 모습이 반복되는 그 평범한 날 주님은 감쪽같이 나타나실 것이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 오실 날을 사모하지 않았던 이상 놀랄지 모를 일이다. 정말 주님 오실 날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살아온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

 

체질이 풀어질 그 날이 다가온다. 내가 보고, 내가 딛고, 내가 만지고, 내가 누리는 모든 삶의 풍요와 양식과 문명이 태워질 날이 앞에 있다. 시대를 자각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 세대를 살아간다. 주님은 오신다. 분명, 다시 오신다. 그러나 나태하고 세상에 마음이 혹 하는 나는 불의하고 더럽다. 웃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뒤에 감춰진 이방인의 불의와 더러움의 묘한 가면을 걸치고 있다. ‘주님은 아직 안 오셔라는 시간적인 관념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시켜버리지 말자. 아니다. 때가 가까웠다. 마음을 깨우고 근신하자. 속히 오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줄 상이 있다. 무엇을 받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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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품을 소중한 덕목_2012.12.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0.)

 

( 1:22-23, 개역)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 역시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유다는 도덕적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이런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미혹시키고 있는 상황을 만찬에 함께 참여하여 먹고 마시면서 위협을 가하는 적대세력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자연계의 현상에 빗대어 매우 날카롭게 묘사함으로써 그 위험성과 교묘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10~13)

 

한편, 유다는 성도들에게 대한 권면과 당부를 잊지 않는다. 21절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자신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더불어 이어지는 형제애.

 

어떤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 어떤 자는 거의 미혹되었다. 쉬운성경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 1:22-23, 쉬운) [22] 믿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23] 그들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되, 죄에 관한 것은 육체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

 

어떤 형제들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교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했다. , 어떤 이들은 거의 영지주의에 미혹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 가운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유다는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 잘못된 교리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라고 한다. 마땅히, 자기 자신도 미혹이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명령은 누구나 실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나, 믿음에 굳게 선 교회의 주요 일꾼들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한편,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유다가 지시한 지침을 보면, 유다는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강경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악한 자(영지주의자)를 그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요이1:10-11) 물론, 요한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교회 안에 미치는 파괴적인 현상을 고려할 때, 어떤 측면에서 영지주의에 오염된 형제를 출교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그것이 첫 번째 대안이 아니었다.

 

긍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상기해야 할 의미가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사도 바울의 두 서신에도 이러한 가치를 상기할 수 있는 두 구절을 발견한다.

 

( 6:1, 개역)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딤후 2:25, 개역)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다. 혹 그 연약함이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분명,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는 특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위험은 있다. 누구나 위기가 온다. 그 누구도 그 누구를 함부로 비평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물론, 교회의 권위로 교회에 위험을 가하는 어떤 세력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은 그만큼 드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긍휼이 있고, 우리에게 늘 긍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역시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해 변함이 없다. 우리는 먼저 긍휼을 가진 심령으로 형제,자매에게 다가서야 한다. 어떤 권면이라든지, 책망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여간 온유한 심령과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조심해야 할 어떤 문제가 아니라, 겸손한 심령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비평하고, 판단해서 징계하고 권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권면과 책망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도해야 된다. 우선 긍휼과 겸손의 심령을 갖고, 상대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이단 교리였다. 그것이 성도를 좀 먹는 악의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런 영지주의에 미혹되어가는 형제에 대한 긍휼과 마지막까지 그를 회복시키려는 어떤 노력을 마다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유다의 교훈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분히 교훈이 된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기준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다툼은 언제나 거기서 출발한다. 가치관이 좀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좀 다르다고 해서 그가 정죄 받을 만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다툼이 있고, 갈등이 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심판 받을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연약하다. 그런 만큼 심판은 아무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휼의 심령으로 다시 회유하고, 품어주는 것 그것이 먼저다.

 

가끔은 교회 안에서 궁극적인 동일한 목적에서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충돌한다. 목적은 교회가 잘 되는 것이고, 교제가 잘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여러 수단과 방편들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방법론 때문에 곧잘 갈등이 야기된다. 분쟁도 오간다. 그리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교회가 잘 되자는 의미에서 한 것이다. 목적과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이견을 양보하고, 이해하는데 부족했을 뿐이다. 갈등의 해답은 하나다. 긍휼히 여기라!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긍휼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관인지 배운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게 있어서 긍휼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몸소 고난을 체험하시는 가운데, 우리에 대한 긍휼을 더욱 갖게 되셨다.

 

( 5:7-10, 개역)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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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세계적 기업 '교세라 그룹'의 창업자이다. 그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고, 의과대를 희망했지만 불행히도 지방의 공대로 진학하게 된다. 의욕은 그다지 없었다. 졸업 후 취업을 해야할 때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그나마 교수님의 추천으로 당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쇼후공업'에 입사하지만, 막상 입사 후 회사의 상황은 과거의 명성만 남았을 뿐 앞으로의 회사의 먹을거리인 신제품 개발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존폐의 위기에 몰린 악성재무상태에 치달아있음을 알게 된다. 입사동기들과 함께 불평의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 와중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거기서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일 자체 몰입하기 시작한다. 연구원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공부했지만 회사는 무기화학 신제품을 개발하라고 하고, 전문서저과 미국 저술잡지를 독해하면서 독학과 연구를 반복한 끝에 극적으로 대기업, 박사급 연구원도 성공하지 못한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다. 바로 거기서 일에 대한 가치를 경험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에 미쳐보았는가. 일을 사랑해보았는가. 일 자체에 희열을 느낄만큼 빠져보았는가.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성공할 때까지 시도해보았는가. 그것. 그는 일에 집중하면서 혼신을 다 했고, 그 가운데 일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성공한 이유란 것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교세라'를 창업한다. 창고에서 시작된 영세기업이었지만, 불가능한 수주도 해내겠다고 받아와서 결국에 그것을 개발해낸다. 그렇게해서 그 분야에서 일본의 NO.1 세계NO.1이 된다.

 

저자는 말한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맘을 먹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성공할 때 까지 하라는 것. 그는 교세라의 모든 실험은 100% 성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왔다. 그는 일에 미친듯이 매달리고 성취하는 습관을 만든 것이다. 베스트가 된다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퍼팩트라는 절대적 개념을 가지고 한다. 불가능에 직면하면 자기 혼신의 힘. 정점을 다 쏟고 그 다음에는 신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즉, 퍼팩트를 하고도 안 돼면 운명에 맡기란 것이다. 그정도까지 하면 안 되는게 없다고.(사장님이 왜 이 책을 직원들에게 줬는지 이제 알겠다.ㅠ.ㅠ)

 

책의 시종은 결국 일에 미치고, 퍼팩트를 추구하란 것이다. 자기가 해서 성공한 방법이며, 교세라가 해서 성공한 방법이다. 성공한 입지전적의 인물이 주는 최고의 비법이다. 그러나 그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너무 전투적이었고, 너무 완벽주의였고, 너무 강경한 느낌이 강해서 였다. 물론, '일'이 인생에서 추구할 궁극의 목표라면 몰라도. 그런 사람에게는 최고의 책이다.

 

위대한 이 경영자도 피하지 못할 죽음 앞에서는 퍼팩트를 생각이나 하는 걸까? 물론, 전혀 다른 분야이겠지만.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렇게 불굴을 모르는 의지의 성공맨이 영원한 문제에 있어서는 베스트도 아닌 루져란 사실은 모르고 있다.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는 일에 퍼팩트하지만 영원한 문제에는 루져다. 난 일에는 루져지만 영원한 문제에서는 퍼팩트다. 그러나 나도 할 말은 있지 않나?! 그래서 이 책을 유용하게 적용하려면 주제를 달성할 목적대상을 단지 '일'로 국한하지 말고, 자신이 추구해야할 이상으로 전환해서 적용하면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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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지 않다._2012.12.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9.)

 

( 3:6-14, 개역)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믿지 않는 악심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라’,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케 잡으라. 함께 참예하리라

 

사도시대의 복음의 확장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과 정치적인 핍박은 굉장히 컸다. 히브리서 뒤에 나오듯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토굴에 사는 것.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이 직면한 극한 고통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신이 믿은 바에 대해 마지막까지 지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많은 배교자들이 있었다. 다만, 그 성격이 좀 달랐을 뿐. 우리 세대 누가 칼 앞에 서고, 톱에 켬을 당하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라서가 아니다. 우리의 시련은 가족의 반대이며, 자기 삶의 정체성을 그리스도께 양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가장 큰 난처함이다.

 

신앙의 대열에서 떨어져가는 자들. 믿음의 배교의 현상들이 나타남을 보면서 히브리서 기자(바울?)는 여러 문장을 할애하여 호소한다. ‘시작할 때 그 처음의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가라고 말이다.’ 위기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강퍅해지는 마음, 미혹되는 마음, 악심으로 떨어지는 것. 죄의 유혹의 강팍함모든 문제가 마음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믿은 그날부터 영원한 부르심의 나라에 갈 때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거듭났다. 거듭난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이다. 중도파산이란 없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도 발견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수많은 시험과 도전과 방해물들에게 직면된다.

 

신실한 형제, 자매? 그 말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말일까? 신실한 그 누구도 내일은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므로 신실하다는 의미는 현재로서는 굉장히 국부적인 의미이다. 신실함의 여부는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켰는가 그것일 것이다. 마치, 휫필드의 그 말처럼.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에 드러나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 믿은 그 믿음, 그 신앙의 고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발견. 그 경험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키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걸림돌들이 작용한다. 무엇? 강팍한 마음. 실패한 경험들.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불평들. 하나님에 대한 불신들.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어떤 욕구들. 교만들.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변질되곤 한다. 처음 받은 은혜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하찮게 여기게 한다. 구원받은 것조차 후회되고, 원망스러워지곤 한다. 그 모든 것이 걍팍해지는 마음이다. 미혹되는 마음이다..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가나안 정탐 후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 저 장대한 아낙자손의 손 들에 우리를 붙여 멸망시켜려고 한다. 왜곡된 인식.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강팍함. 미혹의 영.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미혹의 영이 운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미혹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인식하고 바라보지 못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것은 진실로 두려운 것임을 비로소 느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고, 인간은 부정하다고 배우지만. 그만큼 알고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혹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믿음의 견고한 것을 놓치는 일이 이처럼 빈번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우리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건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미혹의 영. 강퍅해지는 마음. 믿지 않는 어떤 악심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 쓴 뿌리. 믿음의 대열에서의 이탈. 그것은 정녕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분명한 어둠의 요소들이며, 우리 신앙의 실제적인 적들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러한 실제의 적들에게 미혹됨으로 그 마음이 흐려졌다. 처음 받은 그 구원의 소망과 만족감을 잃어버렸다. 사도들이 뜨겁게 일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된, 성령과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을 다 잃어버렸다. 가슴도 식고, 기쁨도 식었다. 미혹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악심이 돋아난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곁에 있던 그 누군가가 그러한 시험의 깊은 곳으로 인도되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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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그의 친구, 고난._2012.11.2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8.)

 

(딤후 1:8, 개역)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이 종종 언급했던 말이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사랑. 위로와 격려를 더불어. 자신의 처한 고난과 희생. 디모데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까지. 인간 바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초반부에 보여지는 디모데의 눈물에 대한 언급을 고려해볼 때, 분명 이 서신은 디모데에게 주는 위로의 서신이자 동시에 디모데가 매우 힘든 현실 가운데 낙심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에 저려오는 연민을 갖고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서신은 과거 바울의 기록한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한 한편의 논문 같은 로마서와는 매우 대조적인, 감성과 인간냄새가 풍기는 서신이기도 하다. 바울은 특별히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것이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해답이었다. , 복음을 소유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 전도인의 길이란 것. 성도란 것. 그것의 의미는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감수하는 삶. 복음과 함께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삶 그 자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으로 인해 갇히고, 매맞고, 고난 받을 때 이 복음조차 부끄러울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바울은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은 받을지언정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고 몇 번이고 거듭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현재 이 땅에서 복음과 영광이 아니라 복음과 고난이란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딤후 1:12, 개역)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세밀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으로 시작하는 이 한 마디.

 

바울은 자신에게 이 복음을 의뢰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에게 의탁한 복음전도의 사명을 이루실 때까지 자신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면서 전도인의 일을 감당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복음과 고난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한 가지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디모데야. 내 눈물을 생각하라 때, 내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내가 누차 이야기했듯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아들아, 주를 위해 갇힌 나를 혹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려무나.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렴. 이 복음은 고난과 함께 있단다.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복음의 친구일 뿐이란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란다. 그리고 또 하나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내게 이 복음의 사명을 주신 분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단다. 그것은 부끄럽고, 안 부끄럽고의 문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란 의미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고난이 세차게 몰아칠지언정 결코 이 복음의 사명. 하나님의 내게 의탁하신 그 일이 이루기 전에는 결코 내가 실패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란다. 난 그것을 온전히 확신하게 되었지. 그러므로 아들아, 기억하렴. 고난은 복음의 친구일 뿐이란다. , 네게 의탁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렴. 그리고 그 하나님은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고, 반드시 확신하는 경험이 필요하단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은 그리고 고난은 네게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란다.’

 

그리고 2장에서부터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역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설명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복음이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끄러운 것이 되기도 한다.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구별되어지는 그 순간들이 부끄럽고, 곤란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고난은 고사하고, 복음 그 자체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 할지라도 때로는 그런 경험을 한다.

 

그런 우리 자신 앞에서 바울의 당당한 복음과 그 고난에 대한 그의 너그러움을 볼 때,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정작 고난의 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경험해보았던 사람이었다. 우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경험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세대가 또 있었던 걸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가 오늘날처럼 퇴색되어진 세대가 또 있었던 걸까? 그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서글픈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워하는 법만 배웠다.

 

이 복음이 하나님이 의탁하신 것이란 명백한 사실을 상기하는 것. 하나님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경험이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리도 복음과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고 그저 입으로 부르는 찬양의 한 구절이 아닌, 당당한 삶의 고백으로 외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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