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그 자유함._2012.11.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7.)
(롬 8:1-2, 개역)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 정작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라고 듣고 배우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런 건 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무엇이 자유로워진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매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운 건 율법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뜻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비춰진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래선 안 돼. 저래선 안 돼. 즉, 그리스도인은 구속되어 있다. 무엇이 자유롭고, 무엇이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만끽할까?
구약의 시대는 가장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자유함을 덜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주말이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정기적인 제사. 각종 의례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엄격히 통제되고, 규칙적인 희생과 반복을 요구하는 기계적인 삶이었다.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또, 죄인에게 완전한 의를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율법준수의 족쇄가 풀어졌다.
무엇보다 죄의 족쇄가 풀어졌다. 그것은 자유함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성령의 인치심. 거듭남을 통해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죄의 권세는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사라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존재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성도는 교회이다. 즉, 교회가 소유한 법. 성도가 소유한 법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주는 법이다. 정죄란 것은 오직 죄와 사망의 법이 유효할 때 성립되는 것이다. 성도와 교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였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죄로 부터의 자유. 해방. 그것은 그리스도인만 경험하는 최고의 자유이다. 교회 밖에 있는 그들은 여전히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 정죄함을 받는다. 그들은 그 아래 구속되어 있다.
죄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것인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전부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에 구속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를 위해 그리스도인 모든 것에서 절제할 것을 요구 받는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죄는 더 이상 무효하기 때문에 원하는 모든 것을 육체의 소욕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양심. 새로운 윤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이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에 부합되기 위해 매사에 절제가 요구된다. 도덕과 윤리가 수반된다. 정죄받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지옥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그렇게 절제와 삼가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교훈을 받는다. 설교의 많은 부분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가치 실현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에 할애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정녕, 무엇에서 자유로워졌는지.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만큼 어떤 책임감과 의무가 다시 수반되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어떻게 해야 하지??’의 문제.
어떤 한 가지의 사안을 놓고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바른 결정인지를 알 수 없어 고민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들이 실제의 생활에서 벌어진다.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다. 신앙은 너무 어려워요의 이유들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의 사례를 대입해 보려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딱 맞는 케이스를 찾기가 힘들다. 어떻게 적용할지가 막막하다.’ 성경은 정말 추상적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성경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실제적이기에 추상적이란 표현과는 너무나 동떨어진다. 물론, 성경은 모든 케이스를 다 다루고 있지는 않다. ‘case by case’로 접근하면 추상적이다라는 옆 길로 빠진다. 성경은 1900년 전 기록이기 때문에 그런 접근으로는 당연히 답이 안 나오는 것이 많다. 문화도 다르고,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안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불변의 진리는 바로 ‘원리’이다.
‘case by case’로 접근할 때는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민 6:3, 개역)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잠 23:31, 개역)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럼, 그럼. 그리스도인은 포도주는 안 되지. 술은 안 되는 고얌.
(딤전 5:23, 개역)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빠밤! 이건 머지…-_-;;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셔야 되나요? 안 마셔야 되나요?’ YES, NO로 답하시오. 이런 방식은 그 자체로 시험에 들게 한다. 정답은 ‘원리’로 부터 찾아야 한다. 포도주를 마시는 그 이유, 동기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의 기준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와 같다.
(고전 10:31, 개역)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하는 모든 동기 안에 바로 이 원리가 적용된다. 건강을 위해 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정당하게 취할 수 있다. 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안 된다. 라는 법은 존재한 적이 없다. 흑백논리는 율법시대의 원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로,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한 가지 자유로움을 찾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시대가 ‘A는 되고, B는 안 된다.’란 식으로, 흑백의 논리로 정답의 경계선을 그어놓았었다면, 지금은
어떤 동기로 부터인가에 따라 A가 될 수도 있고, B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십계명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것이 ‘원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원리를 알면 어떤 사례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직한 동기. 그것밖에 살필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통해 다양한 사례에 적용해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경우도 있다. ‘A도 괜찮고, B도 괜찮은데 어떤걸 하는게 더 좋을까요? 두 가지 사례 모두 하나님 앞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경우에도 고민은 있다. 뭘 선택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올바르냐는 문제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죄송하지만, ‘너 알아서 하세요’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양심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 한다라면. 사실 그건 크게 고민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것이란 확신이 선다면 좀 더 좋고, 좀 덜 좋고의 차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면 이런 결론이 나는 것이다. ‘신앙은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판단할 수가 없군요. 머리 아파요. 구원 안 받았을 땐, 내 마음대로 하니까 쉬웠는데.’
그러므로 신앙을 쉽게 누리자. 비록, 죄는 마음대로 못 짓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절제의 고난이 수반된다. 그건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성령충만 안에 들어가면 즐거움이 된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 ‘정직한 동기’의 원리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답은 금방 나온다. 어떤 것이든 꺼리낌이 없는 것이라면 쓸데없이 많이 고민하지 말자.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자. 그러면 신앙생활이 훨씬 자유로워진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요청했다. ‘시장에서 내다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바울은 ‘드세요’ 또는 ‘드시지 마세요’라고 답을 준 적이 없다. 바울은 오히려 조금은 생뚱맞게 동문서답을 했다.
‘저기요. 하나니은 한 분이시고, 모든 만물이 그 분께 났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달라서 어떤 사람은 우상의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면서도 먹어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먹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도 그만, 못 먹어도 그만입니다. 다만, 먹는 자들로 인해 약한 자들이 문제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서신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언급된다.
‘누군가는 혼인도 금하고, 어떤 식물은 금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즉, 사람들은 바울에게 요청하기를 어떤 식물을 먹느냐, 마느냐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논쟁하고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그것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식물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감사함으로 먹으면 뭔들 못 먹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 먹는다면 먹는 사람도 마음이 꺼리끼고, 그걸 보는 약한 형제가 마음에 문제가 되니. 정작 죄가 되는 것은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가 아니라 다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 십계명에 언급하는 죄는 당연히 NO라는 답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YES, NO로 답하기보다는 어떤 목적과 동기에 따르느냐가 더 높은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고, 삼가할 수도 있고 그것은 자유로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무엇이든지 먹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정직과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을 알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