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세계적 기업 '교세라 그룹'의 창업자이다. 그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갈 수 있었고, 의과대를 희망했지만 불행히도 지방의 공대로 진학하게 된다. 의욕은 그다지 없었다. 졸업 후 취업을 해야할 때 상황은 좋지 못했다. 그나마 교수님의 추천으로 당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쇼후공업'에 입사하지만, 막상 입사 후 회사의 상황은 과거의 명성만 남았을 뿐 앞으로의 회사의 먹을거리인 신제품 개발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존폐의 위기에 몰린 악성재무상태에 치달아있음을 알게 된다. 입사동기들과 함께 불평의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 와중에 그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거기서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일 자체 몰입하기 시작한다. 연구원이었던 그는 대학에서 유기화학을 공부했지만 회사는 무기화학 신제품을 개발하라고 하고, 전문서저과 미국 저술잡지를 독해하면서 독학과 연구를 반복한 끝에 극적으로 대기업, 박사급 연구원도 성공하지 못한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다. 바로 거기서 일에 대한 가치를 경험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일에 미쳐보았는가. 일을 사랑해보았는가. 일 자체에 희열을 느낄만큼 빠져보았는가.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성공할 때까지 시도해보았는가. 그것. 그는 일에 집중하면서 혼신을 다 했고, 그 가운데 일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가 성공한 이유란 것이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교세라'를 창업한다. 창고에서 시작된 영세기업이었지만, 불가능한 수주도 해내겠다고 받아와서 결국에 그것을 개발해낸다. 그렇게해서 그 분야에서 일본의 NO.1 세계NO.1이 된다.

 

저자는 말한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맘을 먹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성공할 때 까지 하라는 것. 그는 교세라의 모든 실험은 100% 성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왔다. 그는 일에 미친듯이 매달리고 성취하는 습관을 만든 것이다. 베스트가 된다는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퍼팩트라는 절대적 개념을 가지고 한다. 불가능에 직면하면 자기 혼신의 힘. 정점을 다 쏟고 그 다음에는 신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즉, 퍼팩트를 하고도 안 돼면 운명에 맡기란 것이다. 그정도까지 하면 안 되는게 없다고.(사장님이 왜 이 책을 직원들에게 줬는지 이제 알겠다.ㅠ.ㅠ)

 

책의 시종은 결국 일에 미치고, 퍼팩트를 추구하란 것이다. 자기가 해서 성공한 방법이며, 교세라가 해서 성공한 방법이다. 성공한 입지전적의 인물이 주는 최고의 비법이다. 그러나 그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너무 전투적이었고, 너무 완벽주의였고, 너무 강경한 느낌이 강해서 였다. 물론, '일'이 인생에서 추구할 궁극의 목표라면 몰라도. 그런 사람에게는 최고의 책이다.

 

위대한 이 경영자도 피하지 못할 죽음 앞에서는 퍼팩트를 생각이나 하는 걸까? 물론, 전혀 다른 분야이겠지만. 쓸데없는 시비를 거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렇게 불굴을 모르는 의지의 성공맨이 영원한 문제에 있어서는 베스트도 아닌 루져란 사실은 모르고 있다. 즉, 상대적인 것이다. 그는 일에 퍼팩트하지만 영원한 문제에는 루져다. 난 일에는 루져지만 영원한 문제에서는 퍼팩트다. 그러나 나도 할 말은 있지 않나?! 그래서 이 책을 유용하게 적용하려면 주제를 달성할 목적대상을 단지 '일'로 국한하지 말고, 자신이 추구해야할 이상으로 전환해서 적용하면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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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지 않다._2012.12.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9.)

 

( 3:6-14, 개역)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믿지 않는 악심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라’,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케 잡으라. 함께 참예하리라

 

사도시대의 복음의 확장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과 정치적인 핍박은 굉장히 컸다. 히브리서 뒤에 나오듯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토굴에 사는 것.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이 직면한 극한 고통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신이 믿은 바에 대해 마지막까지 지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많은 배교자들이 있었다. 다만, 그 성격이 좀 달랐을 뿐. 우리 세대 누가 칼 앞에 서고, 톱에 켬을 당하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라서가 아니다. 우리의 시련은 가족의 반대이며, 자기 삶의 정체성을 그리스도께 양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가장 큰 난처함이다.

 

신앙의 대열에서 떨어져가는 자들. 믿음의 배교의 현상들이 나타남을 보면서 히브리서 기자(바울?)는 여러 문장을 할애하여 호소한다. ‘시작할 때 그 처음의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가라고 말이다.’ 위기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강퍅해지는 마음, 미혹되는 마음, 악심으로 떨어지는 것. 죄의 유혹의 강팍함모든 문제가 마음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믿은 그날부터 영원한 부르심의 나라에 갈 때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거듭났다. 거듭난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이다. 중도파산이란 없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도 발견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수많은 시험과 도전과 방해물들에게 직면된다.

 

신실한 형제, 자매? 그 말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말일까? 신실한 그 누구도 내일은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므로 신실하다는 의미는 현재로서는 굉장히 국부적인 의미이다. 신실함의 여부는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켰는가 그것일 것이다. 마치, 휫필드의 그 말처럼.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에 드러나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 믿은 그 믿음, 그 신앙의 고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발견. 그 경험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키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걸림돌들이 작용한다. 무엇? 강팍한 마음. 실패한 경험들.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불평들. 하나님에 대한 불신들.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어떤 욕구들. 교만들.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변질되곤 한다. 처음 받은 은혜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하찮게 여기게 한다. 구원받은 것조차 후회되고, 원망스러워지곤 한다. 그 모든 것이 걍팍해지는 마음이다. 미혹되는 마음이다..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가나안 정탐 후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 저 장대한 아낙자손의 손 들에 우리를 붙여 멸망시켜려고 한다. 왜곡된 인식.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강팍함. 미혹의 영.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미혹의 영이 운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미혹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인식하고 바라보지 못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것은 진실로 두려운 것임을 비로소 느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고, 인간은 부정하다고 배우지만. 그만큼 알고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혹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믿음의 견고한 것을 놓치는 일이 이처럼 빈번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우리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건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미혹의 영. 강퍅해지는 마음. 믿지 않는 어떤 악심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 쓴 뿌리. 믿음의 대열에서의 이탈. 그것은 정녕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분명한 어둠의 요소들이며, 우리 신앙의 실제적인 적들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러한 실제의 적들에게 미혹됨으로 그 마음이 흐려졌다. 처음 받은 그 구원의 소망과 만족감을 잃어버렸다. 사도들이 뜨겁게 일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된, 성령과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을 다 잃어버렸다. 가슴도 식고, 기쁨도 식었다. 미혹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악심이 돋아난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곁에 있던 그 누군가가 그러한 시험의 깊은 곳으로 인도되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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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그의 친구, 고난._2012.11.2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8.)

 

(딤후 1:8, 개역)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이 종종 언급했던 말이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그의 애정과 사랑. 위로와 격려를 더불어. 자신의 처한 고난과 희생. 디모데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까지. 인간 바울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초반부에 보여지는 디모데의 눈물에 대한 언급을 고려해볼 때, 분명 이 서신은 디모데에게 주는 위로의 서신이자 동시에 디모데가 매우 힘든 현실 가운데 낙심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바울은 특별히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에 저려오는 연민을 갖고 이 편지를 썼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서신은 과거 바울의 기록한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한 한편의 논문 같은 로마서와는 매우 대조적인, 감성과 인간냄새가 풍기는 서신이기도 하다. 바울은 특별히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한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것이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해답이었다. , 복음을 소유하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 전도인의 길이란 것. 성도란 것. 그것의 의미는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감수하는 삶. 복음과 함께 고난 가운데 인내하는 삶 그 자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으로 인해 갇히고, 매맞고, 고난 받을 때 이 복음조차 부끄러울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바울은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은 받을지언정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고 몇 번이고 거듭 말했던 것이다. 바울은 현재 이 땅에서 복음과 영광이 아니라 복음과 고난이란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딤후 1:12, 개역)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세밀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으로 시작하는 이 한 마디.

 

바울은 자신에게 이 복음을 의뢰한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에게 의탁한 복음전도의 사명을 이루실 때까지 자신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 디모데는 복음을 전하면서 전도인의 일을 감당하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회의감을 느끼곤 했다. 복음과 고난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한 가지의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디모데야. 내 눈물을 생각하라 때, 내 마음이 저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구나. 내가 누차 이야기했듯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단다. 아들아, 주를 위해 갇힌 나를 혹이라도 부끄러워하지 말려무나.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렴. 이 복음은 고난과 함께 있단다.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복음의 친구일 뿐이란다. 그래서 나는 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이상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란다. 그리고 또 하나 말이다. 나는 처음부터 내게 이 복음의 사명을 주신 분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고 있단다. 그것은 부끄럽고, 안 부끄럽고의 문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란 의미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고난이 세차게 몰아칠지언정 결코 이 복음의 사명. 하나님의 내게 의탁하신 그 일이 이루기 전에는 결코 내가 실패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란다. 난 그것을 온전히 확신하게 되었지. 그러므로 아들아, 기억하렴. 고난은 복음의 친구일 뿐이란다. , 네게 의탁하신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렴. 그리고 그 하나님은 결코 네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그것을 알고, 반드시 확신하는 경험이 필요하단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은 그리고 고난은 네게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란다.’

 

그리고 2장에서부터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역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설명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복음이 그리스도인에게도 부끄러운 것이 되기도 한다.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구별되어지는 그 순간들이 부끄럽고, 곤란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고난은 고사하고, 복음 그 자체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그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라 할지라도 때로는 그런 경험을 한다.

 

그런 우리 자신 앞에서 바울의 당당한 복음과 그 고난에 대한 그의 너그러움을 볼 때,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정작 고난의 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복음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을 경험해보았던 사람이었다. 우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경험에 있어서 성경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세대가 또 있었던 걸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가 오늘날처럼 퇴색되어진 세대가 또 있었던 걸까? 그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서글픈 것이다. 우리는 부끄러워하는 법만 배웠다.

 

이 복음이 하나님이 의탁하신 것이란 명백한 사실을 상기하는 것. 하나님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경험이다. 바로 그랬을 때, 우리도 복음과 함께 고난에 참예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라고 그저 입으로 부르는 찬양의 한 구절이 아닌, 당당한 삶의 고백으로 외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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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그 자유함._2012.11.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7.)

 

( 8:1-2, 개역)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 있다. 정작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라고 듣고 배우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 오히려,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런 건 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경우가 더 많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무엇이 자유로워진 것일까?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매우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운 건 율법에 대해 자유로운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법.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뜻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비춰진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래선 안 돼. 저래선 안 돼. , 그리스도인은 구속되어 있다. 무엇이 자유롭고, 무엇이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만끽할까?

 

구약의 시대는 가장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자유함을 덜 느끼는 이유 중에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주말이면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 정기적인 제사. 각종 의례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엄격히 통제되고, 규칙적인 희생과 반복을 요구하는 기계적인 삶이었다. 너무나 피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또, 죄인에게 완전한 의를 제공하심으로써 모든 율법준수의 족쇄가 풀어졌다.

 

무엇보다 죄의 족쇄가 풀어졌다. 그것은 자유함의 최고봉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성령의 인치심. 거듭남을 통해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죄의 권세는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사라졌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존재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다. 성도는 교회이다. , 교회가 소유한 법. 성도가 소유한 법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주는 법이다. 정죄란 것은 오직 죄와 사망의 법이 유효할 때 성립되는 것이다. 성도와 교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였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죄로 부터의 자유. 해방. 그것은 그리스도인만 경험하는 최고의 자유이다. 교회 밖에 있는 그들은 여전히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들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고, 정죄함을 받는다. 그들은 그 아래 구속되어 있다.

 

죄로 부터의 완전한 자유. 그 생명의 성령의 법을 소유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그러면 이것인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전부인가. 어떤 측면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에 구속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를 위해 그리스도인 모든 것에서 절제할 것을 요구 받는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실제 생활에서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죄는 더 이상 무효하기 때문에 원하는 모든 것을 육체의 소욕대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새로운 양심. 새로운 윤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이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윤리에 부합되기 위해 매사에 절제가 요구된다. 도덕과 윤리가 수반된다. 정죄받기 때문이 아니라, 죄의 지옥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말이다.

 

그렇게 절제와 삼가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 답다.’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교훈을 받는다. 설교의 많은 부분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가치 실현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것에 할애되기도 한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갖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정녕, 무엇에서 자유로워졌는지. 그리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만큼 어떤 책임감과 의무가 다시 수반되고 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 ‘어떻게 해야 하지??’의 문제.

 

어떤 한 가지의 사안을 놓고 무엇을 결정하는 것이 바른 결정인지를 알 수 없어 고민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들이 실제의 생활에서 벌어진다. 오히려 이런 것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다. 신앙은 너무 어려워요의 이유들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의 사례를 대입해 보려해도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딱 맞는 케이스를 찾기가 힘들다. 어떻게 적용할지가 막막하다.’ 성경은 정말 추상적일까?

 

그런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성경은 너무나 사실적이고, 실제적이기에 추상적이란 표현과는 너무나 동떨어진다. 물론, 성경은 모든 케이스를 다 다루고 있지는 않다. ‘case by case’로 접근하면 추상적이다라는 옆 길로 빠진다. 성경은 1900년 전 기록이기 때문에 그런 접근으로는 당연히 답이 안 나오는 것이 많다. 문화도 다르고,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당연히 안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쳐주는 불변의 진리는 바로 원리이다.

 

‘case by case’로 접근할 때는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 6:3, 개역)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 23:31, 개역)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럼, 그럼. 그리스도인은 포도주는 안 되지. 술은 안 되는 고얌.

(딤전 5:23, 개역)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빠밤! 이건 머지…-_-;;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셔야 되나요? 안 마셔야 되나요?’ YES, NO로 답하시오. 이런 방식은 그 자체로 시험에 들게 한다. 정답은 원리로 부터 찾아야 한다. 포도주를 마시는 그 이유, 동기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기준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의 기준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이와 같다.

 

(고전 10:31, 개역)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어떤 행위를 하고자 하는 모든 동기 안에 바로 이 원리가 적용된다. 건강을 위해 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정당하게 취할 수 있다. 술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안 된다. 라는 법은 존재한 적이 없다. 흑백논리는 율법시대의 원리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바로,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한 가지 자유로움을 찾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시대가 ‘A는 되고, B는 안 된다.’란 식으로, 흑백의 논리로 정답의 경계선을 그어놓았었다면, 지금은

어떤 동기로 부터인가에 따라 A가 될 수도 있고, B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십계명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로, 그것이 원리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원리를 알면 어떤 사례를 막론하고 적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직한 동기. 그것밖에 살필 것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통해 다양한 사례에 적용해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때로는 이런 경우도 있다. ‘A도 괜찮고, B도 괜찮은데 어떤걸 하는게 더 좋을까요? 두 가지 사례 모두 하나님 앞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경우에도 고민은 있다. 뭘 선택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올바르냐는 문제말이다. 이에 대한 답은 죄송하지만, ‘너 알아서 하세요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 양심에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라 한다라면. 사실 그건 크게 고민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되는 것이란 확신이 선다면 좀 더 좋고, 좀 덜 좋고의 차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면 이런 결론이 나는 것이다. ‘신앙은 너무 어렵고, 힘들어요.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판단할 수가 없군요. 머리 아파요. 구원 안 받았을 땐, 내 마음대로 하니까 쉬웠는데.’

 

그러므로 신앙을 쉽게 누리자. 비록, 죄는 마음대로 못 짓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절제의 고난이 수반된다. 그건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조차 성령충만 안에 들어가면 즐거움이 된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 ‘정직한 동기의 원리를 적용해보자. 그러면 답은 금방 나온다. 어떤 것이든 꺼리낌이 없는 것이라면 쓸데없이 많이 고민하지 말자.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자. 그러면 신앙생활이 훨씬 자유로워진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요청했다. ‘시장에서 내다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바울은 드세요또는 드시지 마세요라고 답을 준 적이 없다. 바울은 오히려 조금은 생뚱맞게 동문서답을 했다.

저기요. 하나니은 한 분이시고, 모든 만물이 그 분께 났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달라서 어떤 사람은 우상의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을 알면서도 먹어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먹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먹어도 그만, 못 먹어도 그만입니다. 다만, 먹는 자들로 인해 약한 자들이 문제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죄입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첫 서신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언급된다.

누군가는 혼인도 금하고, 어떤 식물은 금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 사람들은 바울에게 요청하기를 어떤 식물을 먹느냐, 마느냐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논쟁하고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그것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 자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식물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감사함으로 먹으면 뭔들 못 먹겠느냐는 것이다. 다만, 우상의 제물인 줄 알면서 먹는다면 먹는 사람도 마음이 꺼리끼고, 그걸 보는 약한 형제가 마음에 문제가 되니. 정작 죄가 되는 것은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가 아니라 다른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그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 십계명에 언급하는 죄는 당연히 NO라는 답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는 거의 대부분 YES, NO로 답하기보다는 어떤 목적과 동기에 따르느냐가 더 높은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동기에서 비롯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고, 삼가할 수도 있고 그것은 자유로운 문제이다. 그리스도인 역시 무엇이든지 먹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정직과 양심의 문제일 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을 알면, 신앙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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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그 마음._2012.11.04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6.)

 

( 10:12, 개역)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라는 말은 너무나 익숙하다. 잠언은 말씀한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라고.

마음이 왜 소중한 것인가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깊은 처소이다. 그래서 종종 영혼과 마음은 같은 의미로도 쓰여진다. 심령이라고 한다.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섬기지 않는 것이 나뉘는 그 처음이다. 마음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 뿌리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들면서 마음의 상태를 땅의 상태에 비유하셨다.

돌짝 같은 마음, 가시덤불이 우거진 마음, 바위 같은 마음, 잘 밭갈아진 마음. 그 모든 비유들은 실제 마음의 상태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호세아도 외친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묵은 땅이라고 했다. 마음을 밭갈지 않으면, 계속해서 다듬고 돋아나는 잡초를 솎아내지 않으면 마음에 잡초가 무성이 우거진다. 잡초가 뿌리깊게 땅에 파고들어 질겨진다. 그래서 씨를 뿌릴 수 없다. 실과를 얻기 위해 유실수를 심을 수 없다. 먹을 채소를 기를 수 없다. 소득 없이 잡초로 무성한 죽은 땅. 그것이 묵은 땅의 의미이다.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밭갈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기다린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다린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늘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묵은 땅을 기경하는 일이다. 그랬을 때, 그 땅에 하나님의 의가 비처럼 쏟아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가 스스로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때때로 하나님은 모든 섭리를 초월해 일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편에서 해야 할 일들은 먼저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과 방식들은 너무나 위대하고 다양하시다. 물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이해하는 일반적인 원리와 방식들을 따라 일하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예상할 수 없고 또, 일반적인 원리에 초월하는 방식으로도 일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우리가 어떤 하나의 형식과 틀 안에 가둬놓고 공식화 시킨다는 것은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실지언정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의무에는 스스로 충실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을 밭갈고 깨우는 일은 우선은 우리가 할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종종 우리에게 의를 비처럼 내려주시고 싶어 하시지만 우리 마음의 너무나 무성한 잡초들과 돌맹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주실 수가 없다.

 

기도와 회개, 자백과 탄원은 마음을 밭가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묵은 땅을 무엇으로 기경할까. 그것은 기도와 말씀이다. 디모데는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그렇다. 우리가 신령해지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말씀과 기도이다. 기도할 때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정직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거짓과 위선. 속임과 방탕. 교만과 분노. 모든 죄악을 낱낱의 것을 고백하고 아뢰게 된다. 바로, 그것이 잡초를 솎아내는 모습이다. 돌맹이를 걷어내는 모습이다.

 

우리 마음 어딘가에는 죄의 처소가 있다. 성령께서도 거하시지만 불쾌한 불청객도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 싸운다. 성령의 소욕과 죄의 소욕이 서로 싸우면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더욱 마음을 밭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성령의 소욕이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밭갈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도 무기력하다.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지 말자. 그것만 달라고 아우성 하지 말자. 과연, 내가 내 마음을 밭갈고 있는 것이었는지 반성해보자.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해야만 한다. 오히려 구해보자. 내 묵은 마음을 기경하도록 해달라고. 그 힘을 구해보자. 어쩌면 그것이 마음을 갈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것보다 더 빠른 지름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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