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품을 소중한 덕목_2012.12.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0.)
(유 1:22-23, 개역)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 역시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유다는 도덕적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이런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미혹시키고 있는 상황을 만찬에 함께 참여하여 먹고 마시면서 위협을 가하는 적대세력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자연계의 현상에 빗대어 매우 날카롭게 묘사함으로써 그 위험성과 교묘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유1:10~13)
한편, 유다는 성도들에게 대한 권면과 당부를 잊지 않는다. 21절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자신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더불어 이어지는 형제애.
어떤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또, 어떤 자는 거의 미혹되었다. 쉬운성경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유 1:22-23, 쉬운) 『[22] 믿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23] 그들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되, 죄에 관한 것은 육체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
어떤 형제들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교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했다. 또, 어떤 이들은 거의 영지주의에 미혹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 가운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유다는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 잘못된 교리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라고 한다. 마땅히, 자기 자신도 미혹이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명령은 누구나 실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나, 믿음에 굳게 선 교회의 주요 일꾼들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한편,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유다가 지시한 지침을 보면, 유다는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강경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악한 자(영지주의자)를 그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요이1:10-11) 물론, 요한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교회 안에 미치는 파괴적인 현상을 고려할 때, 어떤 측면에서 영지주의에 오염된 형제를 출교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그것이 첫 번째 대안이 아니었다.
긍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상기해야 할 의미가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사도 바울의 두 서신에도 이러한 가치를 상기할 수 있는 두 구절을 발견한다.
(갈 6:1, 개역)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딤후 2:25, 개역)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다. 혹 그 연약함이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분명,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는 특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위험은 있다. 누구나 위기가 온다. 그 누구도 그 누구를 함부로 비평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물론, 교회의 권위로 교회에 위험을 가하는 어떤 세력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은 그만큼 드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긍휼이 있고, 우리에게 늘 긍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역시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해 변함이 없다. 우리는 먼저 긍휼을 가진 심령으로 형제,자매에게 다가서야 한다. 어떤 권면이라든지, 책망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여간 온유한 심령과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조심해야 할 어떤 문제가 아니라, 겸손한 심령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비평하고, 판단해서 징계하고 권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권면과 책망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도해야 된다. 우선 긍휼과 겸손의 심령을 갖고, 상대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이단 교리였다. 그것이 성도를 좀 먹는 악의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런 영지주의에 미혹되어가는 형제에 대한 긍휼과 마지막까지 그를 회복시키려는 어떤 노력을 마다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유다의 교훈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분히 교훈이 된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기준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다툼은 언제나 거기서 출발한다. 가치관이 좀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좀 다르다고 해서 그가 정죄 받을 만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다툼이 있고, 갈등이 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심판 받을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연약하다. 그런 만큼 심판은 아무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휼의 심령으로 다시 회유하고, 품어주는 것 그것이 먼저다.
가끔은 교회 안에서 궁극적인 동일한 목적에서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충돌한다. 목적은 교회가 잘 되는 것이고, 교제가 잘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여러 수단과 방편들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방법론 때문에 곧잘 갈등이 야기된다. 분쟁도 오간다. 그리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교회가 잘 되자는 의미에서 한 것이다. 목적과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이견을 양보하고, 이해하는데 부족했을 뿐이다. 갈등의 해답은 하나다. 긍휼히 여기라!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긍휼’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관인지 배운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게 있어서 ‘긍휼’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몸소 고난을 체험하시는 가운데, 우리에 대한 긍휼을 더욱 갖게 되셨다.
(히 5:7-10, 개역)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