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지 않다._2012.12.1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9.)
(히 3:6-14, 개역)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 ‘믿지 않는 악심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하라’,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케 잡으라. 함께 참예하리라’
사도시대의 복음의 확장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과 정치적인 핍박은 굉장히 컸다. 히브리서 뒤에 나오듯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토굴에 사는 것.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이 직면한 극한 고통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의 터전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신이 믿은 바에 대해 마지막까지 지킨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당시에도 많은 배교자들이 있었다. 다만, 그 성격이 좀 달랐을 뿐. 우리 세대 누가 칼 앞에 서고, 톱에 켬을 당하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라서가 아니다. 우리의 시련은 가족의 반대이며, 자기 삶의 정체성을 그리스도께 양도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에 가장 큰 난처함이다.
신앙의 대열에서 떨어져가는 자들. 믿음의 배교의 현상들이 나타남을 보면서 히브리서 기자(바울?)는 여러 문장을 할애하여 호소한다. ‘시작할 때 그 처음의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가라고 말이다.’ 위기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 ‘강퍅해지는 마음, 미혹되는 마음, 악심으로 떨어지는 것. 죄의 유혹의 강팍함’ 모든 문제가 마음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믿은 그날부터 영원한 부르심의 나라에 갈 때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거듭났다. 거듭난 삶을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부터 영원까지이다. 중도파산이란 없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와 오늘의 경험을 통해서도 발견한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수많은 시험과 도전과 방해물들에게 직면된다.
신실한 형제, 자매? 그 말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 말일까? 신실한 그 누구도 내일은 신앙의 대열에서 이탈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므로 신실하다는 의미는 현재로서는 굉장히 국부적인 의미이다. 신실함의 여부는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켰는가 그것일 것이다. 마치, 휫필드의 그 말처럼.
‘내가 누구였는지는 심판날에 드러나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처음 믿은 그 믿음, 그 신앙의 고백,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발견. 그 경험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키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걸림돌들이 작용한다. 무엇? 강팍한 마음. 실패한 경험들.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불평들. 하나님에 대한 불신들. 하나님에 대한 반항적인 어떤 욕구들. 교만들.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왜곡된 인식으로 변질되곤 한다. 처음 받은 은혜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하찮게 여기게 한다. 구원받은 것조차 후회되고, 원망스러워지곤 한다. 그 모든 것이 걍팍해지는 마음이다. 미혹되는 마음이다..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이 그러했다.
가나안 정탐 후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 저 장대한 아낙자손의 손 들에 우리를 붙여 멸망시켜려고 한다. 왜곡된 인식.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강팍함. 미혹의 영.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미혹의 영이 운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미혹 속에서 하나님을 온전하고 정상적으로 인식하고 바라보지 못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것은 진실로 두려운 것임을 비로소 느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신실하고, 인간은 부정하다고 배우지만. 그만큼 알고 인식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미혹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믿음의 견고한 것을 놓치는 일이 이처럼 빈번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 우리는 안식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건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미혹의 영. 강퍅해지는 마음. 믿지 않는 어떤 악심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 쓴 뿌리. 믿음의 대열에서의 이탈. 그것은 정녕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혼미하게 만드는 분명한 어둠의 요소들이며, 우리 신앙의 실제적인 적들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그러한 실제의 적들에게 미혹됨으로 그 마음이 흐려졌다. 처음 받은 그 구원의 소망과 만족감을 잃어버렸다. 사도들이 뜨겁게 일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된, 성령과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을 다 잃어버렸다. 가슴도 식고, 기쁨도 식었다. 미혹의 영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악심이 돋아난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 곁에 있던 그 누군가가 그러한 시험의 깊은 곳으로 인도되고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