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그리스도인_2013.01.2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6.)

(삼상 24:4-6, 개역) [4]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공평한 이름이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맡형을 따라 동일한 대제사장,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각각 그 지체와 그 역할이 있다. 이로써 직분도 다르고, 그 역할과 권한도 달라진다. 누구는 사도, 누구는 선지자, 누구는 복음 전하는 자, 누구는 목사이자 교사이다.(4:11)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는 질서가 있다. 그것은 진리이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저 겉옷을 베는 것에 그쳤다. 그 후 가슴아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세우신다. 지금도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때때로 그리스도인도 그 겉옷을 베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직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후에는 가슴 아파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질서를 결국 부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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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아래서 증명된 믿음_2013.01.19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5.)

 

( 19:38, 개역)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그렇게 허무하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버렸다. 말고의 귀를 자를 만큼 담대했던 베드로도 없었다. 유대인의 왕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죄인이 달린 십자가 아래에는 가족과 세 명의 여인들이 있었을 뿐. 그리고 이 한 사람 아리마대 요셉.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은 고작 몇 구절 안 된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단 하나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의 시체를 옮겨 자기 무덤에 장사하였다는 사실이다.(27:60) 우리는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이렇게 단순하게 이해한다. 그가 유일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 앞에서 당돌히 요구했고, 그의 새 무덤에 안치했다라고. 그러나 이 요셉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다.

 

그는 유력한 지위의 공의회 의원이었다.(15:43) 동시에 그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 드러내지 못했다. 그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을 때 따르게 될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공의회 의원으로서 지위를 박탁당할 것이다. 하루 아침에 그는 권력과 존경과 삶의 기반에 중요한 부분들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마음에서 믿었지만 외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게 되었을 때, 제자들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었을 때, 자기 믿음을 드러내었다.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으로 돌아가보자. 제자들과 동행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이적을 베풀던 예수님. 예수를 시인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나누어진 현실. 분명 그때 아리마대 요셉은 판단받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만약, 제자들을 비롯 그 믿음을 드러낸 사람이 아리마대 요셉을 알았다면 그는 분명 판단 받았을지 모른다. 용감하지 못하고 비겁한 겁쟁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 날이 왔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소망이 처형된 날이 되자 제자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베드로가 한 일은 고작 말고의 귀를 자른 것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동안 그 믿음을 숨겨왔던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드러냈다. 그 숨은 믿음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지난 시간까지의 비겁자 같은 모습이 아니라 소망이 끊어졌다고 울부짖을 그 시점이 되었을 때 그 요셉의 믿음은 가장 눈부시게 증명되었다. 그는 겁쟁이란 오명을 그렇게 벗어 던지고 나타났다.

 

( 14:4, 개역)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제자들이 가장 훌륭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비록,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가장 많이 질타했음에도 말이다. 그때 아리마대 요셉은 비겁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을 때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든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이었다. 그리고 그는 친히 자기의 새 무덤으로 예수님을 안치했다. 그동안 유대인의 출교를 두려워해 은휘해 둔 그의 믿음의 비겁함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죽은 소망의 육체를 떠안고 그렇게 위험한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담대함을 한 방에 증명해냈다. 이토록 멋있게.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누구나 동일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같은 형틀에서 찍혀져 나온 붕어빵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평소에 그 믿음이 누구에게든 인정될 만큼 잘 드러난다. 그러나 누군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외모를 본다. 그래서 남의 하인을 판단하듯 그 신앙과 믿음을 드러나지는 것으로 판단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시간. 소망이 매달리고, 비전이 빛을 잃을 그 시간이 될 때 참된 믿음은 드러난다. 그때는 우리가 알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증명이 드러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역시 그 믿음이란 것은 평소에는 감춰진 경우가 많다. 연약해 보이고 소극적이고 종종 잘 주목 받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잠잠히 주를 섬기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많이 있다. 드러나는 열심이 없다고 그 믿음을 판단하는 우를 자주 범하기도 한다. 그런 우리에게 요셉과 로마서는 이런 우리 경솔함에 대해 권면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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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했기 때문에_2013.01.1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4.)

 

( 5:5-9, 개역)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못이 있었다. 못 주변에는 행각 다섯이 있어서 그곳에 병을 고치기 위해 모인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 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그의 병은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성전 안에서 다시 만나셨을 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는 젊은 시절 언젠가 죄를 범했고 그 죄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장장 38년간이다. 올해 내 나이 33살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그 세월을 훌쩍 넘길 만큼 그 병자는 누워만 있었다. 누가 그를 여기 베데스다까지 옮겨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그를 도와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 때 뛰어내려 갈 수 조차 없었다. ,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지언정 그 어떤 생산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처지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다. ‘그는 도대체 거기에 왜 있는가?’

 

베데스다못이 병자들이 치료될 수 있는 곳이더라도 적어도 그 38년 된 병자에게는 그렇게 희망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충분히 내려갈 수 없으며, 그를 넣어주기 위해 함께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숱한 세월을 견디고 그곳에서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가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란 사실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촐하고, 심지어 그 병자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무례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병자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여 나를 넣어줄 자가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짧았지만 무엇인가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다. 그리고 병자의 대답 역시.

네가 그토록 낫고 싶으냐?’

. 낫고 싶고 말구요. 낫고 싶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여 누가 나를 좀 넣어주면 좋겠는데 그럴 사람 조차 없습니다.’

그렇다. 네 갈망을 안다. 그러니 누가 너를 넣어주고 말 것 없이 그냥 일어나 가려무나.’

 

갈망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38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란 것을 생각해보았는가. 그 오랜 시간 그 병자는 낫고 싶은 단 하나의 갈망으로 인해 그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음에도 그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가슴 저리게 아팠었는지. 그가 얼마나 미친 기다림 속에서 낫고자 하는 그 하나의 갈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갈망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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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면 넘어진다._2013.01.1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3.)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과 가르치심. 그 비유가 어렵게 다가온다. 한번은 제자들이 물었다. 왜 비유로 가르치시는지.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함께 들어도 깨닫는자는 깨닫고 그렇지 않은 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그 사역의 특징을 알려준다. 크게는 두 가지. 적게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가르치심, 복음전파, 치유사역. 사실 어떤 측면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학자나 설교자와 같은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병든 자들을 이적으로 치료하셨다. 그것도 전문적인 의사도 아니셨다. 의학을 배우거나 실습하지도 않았다. 만약, 누군가 가르치는 학자인 동시에 의학박사나 의사출신이라 하여서 치료사역을 병행한다면야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셨다. 당시의 시선으로 보자면, 목수 출신으로 학벌은 없었다. 그러나 비범함을 갖고 태어나셔서 가르치시는 탁월함을 보였다. 동시에 전혀 의술을 몰랐음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행해서 각종 병든 자를 치료하는 초능력자의 면을 갖고 계셨다. 이런 가르치는 재능과 병 고침의 초능력은 자연스러운 매치였을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영역에서 탁월함을 가지신 한 분. 마치, 존경 받을 만한 선생과 기적을 일으키는 초능력자가 한 사람 안에 나타난 것처럼.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의 정체에 대해 의견을 분분하게 만들었다.

 

사실 예수님께서 왜 가르치시는 일과 복음전하는 일 외에 추가적으로 특별히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이적을 행하셨던 것일까? 다르게 말해서, 왜 부업으로 전혀 생뚱 맞은 치료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글쎄, 그것은 병든 영혼, 죽은 영혼이 치유될 것을 상징할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도 그 영혼이 상할 때가 있다. 그때도 예수님은 성도의 영혼을 치료해주실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치유에 대한 상징인지 모른다. 한편, 당시에는 그러한 특별한 이적. 다른 것도 아닌 병든 자 치료하는 이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 치료와 긍휼을 베푸는 주님을 보여주신 것일 수 있다. 당시에는 의술이 부족했다. 사람들에게는 치료사역이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충분히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치료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얻기도 하고,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치유라는 실제적인 도움을 통해 긍휼과 은혜를 베풀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 사역의 두 가지 대조되는 사역을 통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르치는 일이란 것은 특별히 박학다식함 내지 논리정연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충분한 지식, 논리적인 서술, 풍부한 비유설명 등은 강한 설득력의 바탕이다. 가르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 그것은 매우 이성적인 영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치료사역은 그냥 이적이었다. 그것은 의학내지 의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식과 이성을 무시하는 초능력이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인정될 수 있는 치료일 수 있고, 거짓 마술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식이나 이성의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1차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이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지적으로 아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면 또 한 가지를 알게 된다. 신앙이 단순히 이성의 산물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령과 그 충만, 마음에 임하는 어떤 거룩한 감화력.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 때로는 상식적인 것을 벗어난 그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 도무지 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그 어떤 경험.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논지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가르침만 따른 삶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에는 이적이 공존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이적과 같은 것들이 공존한다. , 예수님의 모습처럼. 따라서, 신앙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도 한계는 있다. , 신앙을 하나의 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모순은 있다. 그것은 절묘하게 서로 오버랩된다. 균형 잡힌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수많은 사상적 다툼, 수많은 이단과 미신적인 신앙. 많은 문제의 그 원인에는 균형을 잃어버림이 있었다.

 

쉽게 말해, 신앙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 불지 알 수 없다고. 성령은 자유롭다. 하나님의 사역은 매우 자유롭게 일하신다. 그러므로 때로는 이성과 합리적인 것을 뛰어 넘는다. 우리가 단지 신앙생활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 위에서 이해하려고만 하면 부자연스러워진다. 마치, 또 하나의 율법주의처럼 어떤 정해진 틀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바람은 자유자재로 분다. 어떤 모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시다. 그러나 놀랍게도 때때로 하나님은 질서와 법칙을 뛰어넘으신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람이 홍해를 가르고,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온다. 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그 시험은 더 크다. 앞뒤를 살펴보건대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접어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교한 판단을 통해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하다. ? 하나님은 합리성이 결여된 이적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후좌우 불합리한 그것이라고 생각될 때, 때로는 그 여부를 떠나서 그냥 묵인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가장 큰 시험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되새겨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개인영역과 신앙의 환경 전반에 대해서 때로는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에만 근거해서 판단하려 하지 않았었는지. 그래서 참아야 할 때 그렇지 못했고, 인내해야 할 때 그렇지 못했던 연약함을. 내게도 예수님의 그 병 고치시는 이적이 필요한 그런 삶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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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라 일컫는 하나의 보석_2013.01.08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2.)

 

(마 1:25, 개역)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의 아버지이지만 실제 혈육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증거하는 성경에 대해 우리는 쉽게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가 마리아의 잉태소식을 듣고 대처했던 행동에 그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을 눈감아주었다. 비록 그가 마리아의 부정에도 불구 결혼을 강행할 용기는 없었지만, 부정한 마리아를 공개처형에 폭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존경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그 배신감과 분노를 생각할 때, 시대적 상황이나 유대교의 율법사상에서 간주할 때 그것은 굉장한 관용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분노하지 않았다. 배신감은 느꼈을지언정 그 깊은 상심은 있었을지언정 그는 그것을 덮어두기로 했다.

 

두 번째, 요셉의 의로운 증거는 그가 천사의 계시로 마리아와의 결혼을 진행한 후 이다. 요셉은 잉태한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 아마, 마리아가 요셉과 정상적인 혼인을 했다는 것은 잉태한 후 그리 오래지 않아 결혼을 했을 거란 가정을 두게 한다. 만삭이 되었다면 아마 마리아는 결혼도 하기 전에, 굳이 요셉이 폭로하지 않았더라도 돌에 쳐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의 출생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잉태한 시점과 결혼의 시점이 너무 동떨어지면 곤란할 수 있었다. 소위 속도위반으로 드러날 테니. 글쎄, 성경에서 그 시기에 대한 상호 거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표현은 없기에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추측건대 요셉은 그리 늦지 않게 결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임신기간이 10개월임을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기간을 혼인 후에도 수절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혈기왕성한 남자다. 남자라면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충분히 공감하리라. 요셉 만만세!! 요셉이 왜 의로운 사람인지 더 이상의 추가검증은 불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가치와 증거는 바로 절제에서 드러난다. 요셉의 자기절제의 능력은 충분히 우리 절제의 한 표본이 된다. 절제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미덕이 되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해진다.

 

(고전 9:25, 개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에는 반드시 절제가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 걸까? 답은 이미 명시되었다. 모든 것! Everything!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뿐 아니라 무엇인가 하고자 희망하는 것 및 무엇인가 피하고자 희망하는 모든 것. , 자기 의지내지 자신이 희망하는 모든 선함과 이기심을 다 통틀어서이다. 그것이 옳은 일일지라도 절제는 필요하며, 그것이 그른 것이라도 절제는 당연히 요구된다.

 

식욕,성욕,명예욕,수면욕,탐욕 욕구는 항상 절제의 첫 번째 대상이다. 또한, 단순한 식욕 뿐 아니라 몸에 해로운 음식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욕심을 이루는 그 수단과 방편 안에도 절제해야 할 세부적인 요소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식욕을 절제한다고 안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가려서 먹는 것은 필요한 절제가 된다. 잠을 자는 것은 창조의 섭리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적당히 자야 한다. 지나치게 잠을 안 자려고 자기를 학대하는 방식도 굳이 유익하지는 않다. 물론,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렇게 행할 때도 있겠지만 밤 늦게 사사로운 소일거리를 한 답시고 몸을 괴롭힐 이유는 없다.

 

요약해서 죄악 된 것에 대한 절제는 두 말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생각을 영역을 확장해보자. 선한 것에도 절제는 요구된다. 어떤 이들은 열심당이다. 열정과 의욕이 넘쳐서 쉽게 다른 형제, 자매님들과 충돌되기도 한다. 열심도 좋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잘 절제된 열심을 품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것도 절제하지 않으면 시험의 도구가 된다. , 선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해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해 한다. 신앙생활 동안 여러 번 보았다. 열심 있는 형제들이 스스로의 열심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제 풀에 꺾여 나가 떨어지는 것을.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선한 목적일지라도 오히려 자신의 신앙에 시험이 될만한 것이 있다라면 그것을 절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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