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했기 때문에_2013.01.1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4.)

 

( 5:5-9, 개역)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못이 있었다. 못 주변에는 행각 다섯이 있어서 그곳에 병을 고치기 위해 모인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 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그의 병은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성전 안에서 다시 만나셨을 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는 젊은 시절 언젠가 죄를 범했고 그 죄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장장 38년간이다. 올해 내 나이 33살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그 세월을 훌쩍 넘길 만큼 그 병자는 누워만 있었다. 누가 그를 여기 베데스다까지 옮겨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그를 도와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 때 뛰어내려 갈 수 조차 없었다. ,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지언정 그 어떤 생산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처지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다. ‘그는 도대체 거기에 왜 있는가?’

 

베데스다못이 병자들이 치료될 수 있는 곳이더라도 적어도 그 38년 된 병자에게는 그렇게 희망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충분히 내려갈 수 없으며, 그를 넣어주기 위해 함께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숱한 세월을 견디고 그곳에서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가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란 사실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촐하고, 심지어 그 병자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무례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병자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여 나를 넣어줄 자가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짧았지만 무엇인가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다. 그리고 병자의 대답 역시.

네가 그토록 낫고 싶으냐?’

. 낫고 싶고 말구요. 낫고 싶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여 누가 나를 좀 넣어주면 좋겠는데 그럴 사람 조차 없습니다.’

그렇다. 네 갈망을 안다. 그러니 누가 너를 넣어주고 말 것 없이 그냥 일어나 가려무나.’

 

갈망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38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란 것을 생각해보았는가. 그 오랜 시간 그 병자는 낫고 싶은 단 하나의 갈망으로 인해 그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음에도 그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가슴 저리게 아팠었는지. 그가 얼마나 미친 기다림 속에서 낫고자 하는 그 하나의 갈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갈망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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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치면 넘어진다._2013.01.1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3.)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과 가르치심. 그 비유가 어렵게 다가온다. 한번은 제자들이 물었다. 왜 비유로 가르치시는지.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함께 들어도 깨닫는자는 깨닫고 그렇지 않은 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그 사역의 특징을 알려준다. 크게는 두 가지. 적게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가르치심, 복음전파, 치유사역. 사실 어떤 측면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학자나 설교자와 같은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병든 자들을 이적으로 치료하셨다. 그것도 전문적인 의사도 아니셨다. 의학을 배우거나 실습하지도 않았다. 만약, 누군가 가르치는 학자인 동시에 의학박사나 의사출신이라 하여서 치료사역을 병행한다면야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셨다. 당시의 시선으로 보자면, 목수 출신으로 학벌은 없었다. 그러나 비범함을 갖고 태어나셔서 가르치시는 탁월함을 보였다. 동시에 전혀 의술을 몰랐음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행해서 각종 병든 자를 치료하는 초능력자의 면을 갖고 계셨다. 이런 가르치는 재능과 병 고침의 초능력은 자연스러운 매치였을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영역에서 탁월함을 가지신 한 분. 마치, 존경 받을 만한 선생과 기적을 일으키는 초능력자가 한 사람 안에 나타난 것처럼.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의 정체에 대해 의견을 분분하게 만들었다.

 

사실 예수님께서 왜 가르치시는 일과 복음전하는 일 외에 추가적으로 특별히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이적을 행하셨던 것일까? 다르게 말해서, 왜 부업으로 전혀 생뚱 맞은 치료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글쎄, 그것은 병든 영혼, 죽은 영혼이 치유될 것을 상징할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도 그 영혼이 상할 때가 있다. 그때도 예수님은 성도의 영혼을 치료해주실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치유에 대한 상징인지 모른다. 한편, 당시에는 그러한 특별한 이적. 다른 것도 아닌 병든 자 치료하는 이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 치료와 긍휼을 베푸는 주님을 보여주신 것일 수 있다. 당시에는 의술이 부족했다. 사람들에게는 치료사역이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충분히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치료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얻기도 하고,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치유라는 실제적인 도움을 통해 긍휼과 은혜를 베풀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 사역의 두 가지 대조되는 사역을 통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르치는 일이란 것은 특별히 박학다식함 내지 논리정연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충분한 지식, 논리적인 서술, 풍부한 비유설명 등은 강한 설득력의 바탕이다. 가르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 그것은 매우 이성적인 영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치료사역은 그냥 이적이었다. 그것은 의학내지 의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식과 이성을 무시하는 초능력이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인정될 수 있는 치료일 수 있고, 거짓 마술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식이나 이성의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1차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이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지적으로 아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면 또 한 가지를 알게 된다. 신앙이 단순히 이성의 산물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령과 그 충만, 마음에 임하는 어떤 거룩한 감화력.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 때로는 상식적인 것을 벗어난 그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 도무지 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그 어떤 경험.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논지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가르침만 따른 삶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에는 이적이 공존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이적과 같은 것들이 공존한다. , 예수님의 모습처럼. 따라서, 신앙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도 한계는 있다. , 신앙을 하나의 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모순은 있다. 그것은 절묘하게 서로 오버랩된다. 균형 잡힌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수많은 사상적 다툼, 수많은 이단과 미신적인 신앙. 많은 문제의 그 원인에는 균형을 잃어버림이 있었다.

 

쉽게 말해, 신앙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 불지 알 수 없다고. 성령은 자유롭다. 하나님의 사역은 매우 자유롭게 일하신다. 그러므로 때로는 이성과 합리적인 것을 뛰어 넘는다. 우리가 단지 신앙생활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 위에서 이해하려고만 하면 부자연스러워진다. 마치, 또 하나의 율법주의처럼 어떤 정해진 틀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바람은 자유자재로 분다. 어떤 모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시다. 그러나 놀랍게도 때때로 하나님은 질서와 법칙을 뛰어넘으신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람이 홍해를 가르고,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온다. 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그 시험은 더 크다. 앞뒤를 살펴보건대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접어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교한 판단을 통해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하다. ? 하나님은 합리성이 결여된 이적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후좌우 불합리한 그것이라고 생각될 때, 때로는 그 여부를 떠나서 그냥 묵인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가장 큰 시험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되새겨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개인영역과 신앙의 환경 전반에 대해서 때로는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에만 근거해서 판단하려 하지 않았었는지. 그래서 참아야 할 때 그렇지 못했고, 인내해야 할 때 그렇지 못했던 연약함을. 내게도 예수님의 그 병 고치시는 이적이 필요한 그런 삶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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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라 일컫는 하나의 보석_2013.01.08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2.)

 

(마 1:25, 개역)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의 아버지이지만 실제 혈육의 아버지는 아니었다.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증거하는 성경에 대해 우리는 쉽게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가 마리아의 잉태소식을 듣고 대처했던 행동에 그것이다.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을 눈감아주었다. 비록 그가 마리아의 부정에도 불구 결혼을 강행할 용기는 없었지만, 부정한 마리아를 공개처형에 폭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존경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그 배신감과 분노를 생각할 때, 시대적 상황이나 유대교의 율법사상에서 간주할 때 그것은 굉장한 관용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분노하지 않았다. 배신감은 느꼈을지언정 그 깊은 상심은 있었을지언정 그는 그것을 덮어두기로 했다.

 

두 번째, 요셉의 의로운 증거는 그가 천사의 계시로 마리아와의 결혼을 진행한 후 이다. 요셉은 잉태한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 아마, 마리아가 요셉과 정상적인 혼인을 했다는 것은 잉태한 후 그리 오래지 않아 결혼을 했을 거란 가정을 두게 한다. 만삭이 되었다면 아마 마리아는 결혼도 하기 전에, 굳이 요셉이 폭로하지 않았더라도 돌에 쳐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의 출생시기를 고려하더라도 잉태한 시점과 결혼의 시점이 너무 동떨어지면 곤란할 수 있었다. 소위 속도위반으로 드러날 테니. 글쎄, 성경에서 그 시기에 대한 상호 거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표현은 없기에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추측건대 요셉은 그리 늦지 않게 결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통상적으로 임신기간이 10개월임을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기간을 혼인 후에도 수절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은 혈기왕성한 남자다. 남자라면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충분히 공감하리라. 요셉 만만세!! 요셉이 왜 의로운 사람인지 더 이상의 추가검증은 불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가치와 증거는 바로 절제에서 드러난다. 요셉의 자기절제의 능력은 충분히 우리 절제의 한 표본이 된다. 절제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미덕이 되는지는 다음 구절에서 명백해진다.

 

(고전 9:25, 개역)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에는 반드시 절제가 수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 걸까? 답은 이미 명시되었다. 모든 것! Everything!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뿐 아니라 무엇인가 하고자 희망하는 것 및 무엇인가 피하고자 희망하는 모든 것. , 자기 의지내지 자신이 희망하는 모든 선함과 이기심을 다 통틀어서이다. 그것이 옳은 일일지라도 절제는 필요하며, 그것이 그른 것이라도 절제는 당연히 요구된다.

 

식욕,성욕,명예욕,수면욕,탐욕 욕구는 항상 절제의 첫 번째 대상이다. 또한, 단순한 식욕 뿐 아니라 몸에 해로운 음식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욕심을 이루는 그 수단과 방편 안에도 절제해야 할 세부적인 요소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식욕을 절제한다고 안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가려서 먹는 것은 필요한 절제가 된다. 잠을 자는 것은 창조의 섭리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적당히 자야 한다. 지나치게 잠을 안 자려고 자기를 학대하는 방식도 굳이 유익하지는 않다. 물론, 상황과 경우에 따라 그렇게 행할 때도 있겠지만 밤 늦게 사사로운 소일거리를 한 답시고 몸을 괴롭힐 이유는 없다.

 

요약해서 죄악 된 것에 대한 절제는 두 말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생각을 영역을 확장해보자. 선한 것에도 절제는 요구된다. 어떤 이들은 열심당이다. 열정과 의욕이 넘쳐서 쉽게 다른 형제, 자매님들과 충돌되기도 한다. 열심도 좋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잘 절제된 열심을 품어야 한다. 아무리 선한 것도 절제하지 않으면 시험의 도구가 된다. , 선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해가 될 수 있음을 고려해 한다. 신앙생활 동안 여러 번 보았다. 열심 있는 형제들이 스스로의 열심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제 풀에 꺾여 나가 떨어지는 것을.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선한 목적일지라도 오히려 자신의 신앙에 시험이 될만한 것이 있다라면 그것을 절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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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Lord come?_2013.01.0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1.)

 

( 22:10-12, 개역)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신약시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무렵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이 생존할 때 재림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 서신서 전반에 당시가 말세 내지 곧 예수님이 오신다고 여러 번 표현되어 있다. 지금보면 이미 2000년이 지났건만. 어쨌든 그것이 당시의 믿음이었다고 하니.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성경이다. 그는 환상을 보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못할 어떤 미지의 세상과 환란을 보았다. 역사의 종말을 보았고,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분명, 그 환상이 당시의 시대상과는 다른 그 무엇이었음이 분명했었음에도 계시록의 마지막은 결국 타 서신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여전히 때가 가깝다고 말한다. 분명, 요한이 본 환상은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동떨어졌음에도 말이다. 2000년이 지났고, 주님 오시기 전의 모든 예언은 다 이루어졌음에도 사도 시대부터 말세라 칭해지던 그 종국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어도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주님은 언제 오실까?’

 

어찌보면 무모한 질문 같다. 당장 오실 것처럼 생각한 사도들의 시대로부터도 2000년이 다 되도록 실현되지 않은 주님의 재림. 정말 예언이 다 이뤄진 세상의 말미라고 말하는 우리 세대조차 여전히 기다리는 주님. 2000년간 말세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오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날. 도적과 같이 임하신다. 그렇다 어쩌면 우리가 점점 주님의 오심에 대해 무감각해져가는 그것이 주님의 오심의 또 다른 증거인지 모르겠다. 주님은 여전히 안 오신다고 차츰 믿어갈 때, 그렇게 갑자기. 정말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신다면 바로 그것이 실현되는 한 날이 온다면 정말 당황스러울 것 같다. 정말 주님이 오신다고 믿고 생활하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기 세대와는 다른 세대를 통해 종말을 보았던 사도 요한 조차 때가 가깝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활하시고 2000년이 흘렀다는 그 시간적인 의미는 그리 중요하진 않은가 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정말 때가 가깝다고 믿는 그것. 주님의 언제든지 오심에 깨어있는 삶을 사는 그것. 그게 더 중요한 것인가 보다. 2000년이 다 되어가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하셨다. ? 때가 가까워 곧 이뤄질 예언이기에. 그러니 2000년이란 것이 아무리 무구한 역사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시간으로써 큰 의미가 있는가. 경점일 뿐. 그러나 시간 속에 구속되어져 살아가는 우리는 경점이 아니기에 주님의 다시 오심은 너무나 지루한 역사의 기다림처럼 보여진다. 마음은 무뎌진다. 그러나 성경은 확증은 변함이 없다. 때가 가까웠다. 주님이 오신 이후 복음과 성령의 역사가 이뤄지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때는 가까움 그 자체이다. , 언제든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 소망의 믿음으로 세상에 속하지 말고, 깨어 기다리는 삶의 자세로 나그네의 인생을 사는 것 바로 그것을 일깨우시는 가르침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너무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주님은 안 오실 것만 같이 비춰졌다. 그래서 세상을 조금씩 사랑했고, 세상과 조금씩 타협했고, 세상의 것을 좀 더 얻고 싶어 갈등했다. 구별된 참된 삶의 모습이 아닌 슬그머니 한 쪽 발을 걸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롭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그리하라고. 선물은 각자 그 행한대로 받는 것이라고. 모두가 자신의 가치관과 그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아주 평범한 그 일상의 반복이 변함없이 이뤄지는 그 한 날. 그날이 바로 주님이 오시는 날인 것이다. 어제나 오늘, 과거나 현재 아무런 차이가 없이 항상 동에서 해가 뜨고, 서에서 해가지고 그렇게 일상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제각각 그 살아오던 삶의 양식대로 살아오는 그 평범한 날 주님은 갑자기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 삶에 대해서 그 행한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은 단지 시간의 개념에서 멀리 있는 그 날이 아니다. 생활의 관점에서 지금 내 삶의 이 모습이 반복되는 그 평범한 날 주님은 감쪽같이 나타나실 것이다.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 오실 날을 사모하지 않았던 이상 놀랄지 모를 일이다. 정말 주님 오실 날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살아온 것일까. 대답은 아니다.

 

체질이 풀어질 그 날이 다가온다. 내가 보고, 내가 딛고, 내가 만지고, 내가 누리는 모든 삶의 풍요와 양식과 문명이 태워질 날이 앞에 있다. 시대를 자각해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이 세대를 살아간다. 주님은 오신다. 분명, 다시 오신다. 그러나 나태하고 세상에 마음이 혹 하는 나는 불의하고 더럽다. 웃는 그리스도인의 얼굴 뒤에 감춰진 이방인의 불의와 더러움의 묘한 가면을 걸치고 있다. ‘주님은 아직 안 오셔라는 시간적인 관념에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시켜버리지 말자. 아니다. 때가 가까웠다. 마음을 깨우고 근신하자. 속히 오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줄 상이 있다. 무엇을 받을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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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품을 소중한 덕목_2012.12.2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0.)

 

( 1:22-23, 개역)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다서 역시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유다는 도덕적폐기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이런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미혹시키고 있는 상황을 만찬에 함께 참여하여 먹고 마시면서 위협을 가하는 적대세력으로 묘사한다. 또한,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자연계의 현상에 빗대어 매우 날카롭게 묘사함으로써 그 위험성과 교묘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10~13)

 

한편, 유다는 성도들에게 대한 권면과 당부를 잊지 않는다. 21절에서는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자신을 지키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더불어 이어지는 형제애.

 

어떤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 어떤 자는 거의 미혹되었다. 쉬운성경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 1:22-23, 쉬운) [22] 믿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23] 그들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 구원하십시오.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되, 죄에 관한 것은 육체의 욕망으로 더럽혀진 옷까지도 미워하십시오.

 

어떤 형제들은 영지주의적 가르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영지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교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 혼란스러워했다. , 어떤 이들은 거의 영지주의에 미혹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 가운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향해 유다는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도와 잘못된 교리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라고 한다. 마땅히, 자기 자신도 미혹이 되지 않도록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물론, 이 명령은 누구나 실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나, 믿음에 굳게 선 교회의 주요 일꾼들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한편,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다. 유다가 지시한 지침을 보면, 유다는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강경한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 사도 요한은 악한 자(영지주의자)를 그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요이1:10-11) 물론, 요한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자를 따르는 무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영지주의적 가르침이 교회 안에 미치는 파괴적인 현상을 고려할 때, 어떤 측면에서 영지주의에 오염된 형제를 출교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은 그것이 첫 번째 대안이 아니었다.

 

긍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상기해야 할 의미가 바로 이것일지 모른다. 사도 바울의 두 서신에도 이러한 가치를 상기할 수 있는 두 구절을 발견한다.

 

( 6:1, 개역)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딤후 2:25, 개역)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다. 혹 그 연약함이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분명,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는 특별히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위험은 있다. 누구나 위기가 온다. 그 누구도 그 누구를 함부로 비평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물론, 교회의 권위로 교회에 위험을 가하는 어떤 세력을 판단할 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럴만한 상황은 그만큼 드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긍휼이 있고, 우리에게 늘 긍휼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역시 다른 형제, 자매에 대해 변함이 없다. 우리는 먼저 긍휼을 가진 심령으로 형제,자매에게 다가서야 한다. 어떤 권면이라든지, 책망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여간 온유한 심령과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조심해야 할 어떤 문제가 아니라, 겸손한 심령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주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비평하고, 판단해서 징계하고 권면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은 미약하다. 그러므로 권면과 책망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도해야 된다. 우선 긍휼과 겸손의 심령을 갖고, 상대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

 

영지주의는 초대 교회에 가장 위협적인 이단 교리였다. 그것이 성도를 좀 먹는 악의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그런 영지주의에 미혹되어가는 형제에 대한 긍휼과 마지막까지 그를 회복시키려는 어떤 노력을 마다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유다의 교훈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충분히 교훈이 된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고, 기준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다툼은 언제나 거기서 출발한다. 가치관이 좀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이 좀 다르다고 해서 그가 정죄 받을 만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다툼이 있고, 갈등이 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심판 받을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연약하다. 그런 만큼 심판은 아무에게나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긍휼의 심령으로 다시 회유하고, 품어주는 것 그것이 먼저다.

 

가끔은 교회 안에서 궁극적인 동일한 목적에서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충돌한다. 목적은 교회가 잘 되는 것이고, 교제가 잘 되는 것이다. 모두가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여러 수단과 방편들 중에서 어떤 것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러한 다양한 방법론 때문에 곧잘 갈등이 야기된다. 분쟁도 오간다. 그리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교회가 잘 되자는 의미에서 한 것이다. 목적과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서로의 이견을 양보하고, 이해하는데 부족했을 뿐이다. 갈등의 해답은 하나다. 긍휼히 여기라!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긍휼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관인지 배운다. 왜냐하면, 나 자신에게 있어서 긍휼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몸소 고난을 체험하시는 가운데, 우리에 대한 긍휼을 더욱 갖게 되셨다.

 

( 5:7-10, 개역)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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