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망했기 때문에_2013.01.15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4.)
(요 5:5-9, 개역)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루살렘 성전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못이 있었다. 못 주변에는 행각 다섯이 있어서 그곳에 병을 고치기 위해 모인 많은 병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 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셨을 때, 그는 누워 있었다. 그의 병은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성전 안에서 다시 만나셨을 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을 보아 그는 젊은 시절 언젠가 죄를 범했고 그 죄로 인해 병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장장 38년간이다. 올해 내 나이 33살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그 세월을 훌쩍 넘길 만큼 그 병자는 누워만 있었다. 누가 그를 여기 베데스다까지 옮겨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그를 도와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 때 뛰어내려 갈 수 조차 없었다. 즉, 그는 천사가 물을 동할지언정 그 어떤 생산적인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처지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다. ‘그는 도대체 거기에 왜 있는가?’
베데스다못이 병자들이 치료될 수 있는 곳이더라도 적어도 그 38년 된 병자에게는 그렇게 희망적인 곳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충분히 내려갈 수 없으며, 그를 넣어주기 위해 함께 기다려주는 사람들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숱한 세월을 견디고 그곳에서 기다렸음이 분명하다. 그가 무려 38년이나 된 병자란 사실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의 질문은 단촐하고, 심지어 그 병자의 노력을 생각했을 때 굉장히 무례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리고 병자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여 나를 넣어줄 자가 없어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님의 질문은 짧았지만 무엇인가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다. 그리고 병자의 대답 역시.
‘네가 그토록 낫고 싶으냐?’
‘예. 낫고 싶고 말구요. 낫고 싶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여 누가 나를 좀 넣어주면 좋겠는데 그럴 사람 조차 없습니다.’
‘그렇다. 네 갈망을 안다. 그러니 누가 너를 넣어주고 말 것 없이 그냥 일어나 가려무나.’
갈망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38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란 것을 생각해보았는가. 그 오랜 시간 그 병자는 낫고 싶은 단 하나의 갈망으로 인해 그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음에도 그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가슴 저리게 아팠었는지. 그가 얼마나 미친 기다림 속에서 낫고자 하는 그 하나의 갈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았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갈망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