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치면 넘어진다._2013.01.10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3.)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수많은 행적과 가르치심. 그 비유가 어렵게 다가온다. 한번은 제자들이 물었다. 왜 비유로 가르치시는지.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함께 들어도 깨닫는자는 깨닫고 그렇지 않은 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그 사역의 특징을 알려준다. 크게는 두 가지. 적게는 세 가지로 설명된다. 가르치심, 복음전파, 치유사역. 사실 어떤 측면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학자나 설교자와 같은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병든 자들을 이적으로 치료하셨다. 그것도 전문적인 의사도 아니셨다. 의학을 배우거나 실습하지도 않았다. 만약, 누군가 가르치는 학자인 동시에 의학박사나 의사출신이라 하여서 치료사역을 병행한다면야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셨다. 당시의 시선으로 보자면, 목수 출신으로 학벌은 없었다. 그러나 비범함을 갖고 태어나셔서 가르치시는 탁월함을 보였다. 동시에 전혀 의술을 몰랐음에도 기적적인 능력을 행해서 각종 병든 자를 치료하는 초능력자의 면을 갖고 계셨다. 이런 가르치는 재능과 병 고침의 초능력은 자연스러운 매치였을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영역에서 탁월함을 가지신 한 분. 마치, 존경 받을 만한 선생과 기적을 일으키는 초능력자가 한 사람 안에 나타난 것처럼.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의 정체에 대해 의견을 분분하게 만들었다.

 

사실 예수님께서 왜 가르치시는 일과 복음전하는 일 외에 추가적으로 특별히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이적을 행하셨던 것일까? 다르게 말해서, 왜 부업으로 전혀 생뚱 맞은 치료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글쎄, 그것은 병든 영혼, 죽은 영혼이 치유될 것을 상징할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도 그 영혼이 상할 때가 있다. 그때도 예수님은 성도의 영혼을 치료해주실 것이다. 그러한 영적인 치유에 대한 상징인지 모른다. 한편, 당시에는 그러한 특별한 이적. 다른 것도 아닌 병든 자 치료하는 이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 치료와 긍휼을 베푸는 주님을 보여주신 것일 수 있다. 당시에는 의술이 부족했다. 사람들에게는 치료사역이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충분히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치료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이목을 얻기도 하고,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기도 하면서 그들에게 치유라는 실제적인 도움을 통해 긍휼과 은혜를 베풀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 사역의 두 가지 대조되는 사역을 통해 또 한 가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가르치는 일이란 것은 특별히 박학다식함 내지 논리정연함이 요구되는 일이다. 충분한 지식, 논리적인 서술, 풍부한 비유설명 등은 강한 설득력의 바탕이다. 가르치는 일에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 그것은 매우 이성적인 영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치료사역은 그냥 이적이었다. 그것은 의학내지 의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식과 이성을 무시하는 초능력이었다. 사람에 따라 그것은 인정될 수 있는 치료일 수 있고, 거짓 마술로 치부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상식이나 이성의 것이 아니었다.

 

신앙은 1차적으로는 이성적인 것이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지적으로 아는 것.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면 또 한 가지를 알게 된다. 신앙이 단순히 이성의 산물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성령과 그 충만, 마음에 임하는 어떤 거룩한 감화력.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 때로는 상식적인 것을 벗어난 그 어떤 것을 경험하는 것. 도무지 될 수 없는 것이 되는 그 어떤 경험.

 

그러므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논지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와 가르침만 따른 삶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신앙에는 이적이 공존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이적과 같은 것들이 공존한다. , 예수님의 모습처럼. 따라서, 신앙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도 한계는 있다. , 신앙을 하나의 이적으로 이해하는 것에도 모순은 있다. 그것은 절묘하게 서로 오버랩된다. 균형 잡힌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수많은 사상적 다툼, 수많은 이단과 미신적인 신앙. 많은 문제의 그 원인에는 균형을 잃어버림이 있었다.

 

쉽게 말해, 신앙은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로 불지 알 수 없다고. 성령은 자유롭다. 하나님의 사역은 매우 자유롭게 일하신다. 그러므로 때로는 이성과 합리적인 것을 뛰어 넘는다. 우리가 단지 신앙생활을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 위에서 이해하려고만 하면 부자연스러워진다. 마치, 또 하나의 율법주의처럼 어떤 정해진 틀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바람은 자유자재로 분다. 어떤 모양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니시다. 그러나 놀랍게도 때때로 하나님은 질서와 법칙을 뛰어넘으신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람이 홍해를 가르고, 엘리야가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였던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온다. 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일수록 그 시험은 더 크다. 앞뒤를 살펴보건대 그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을 접어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교한 판단을 통해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하다. ? 하나님은 합리성이 결여된 이적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후좌우 불합리한 그것이라고 생각될 때, 때로는 그 여부를 떠나서 그냥 묵인하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가장 큰 시험이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되새겨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개인영역과 신앙의 환경 전반에 대해서 때로는 너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에만 근거해서 판단하려 하지 않았었는지. 그래서 참아야 할 때 그렇지 못했고, 인내해야 할 때 그렇지 못했던 연약함을. 내게도 예수님의 그 병 고치시는 이적이 필요한 그런 삶이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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