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그리스도인_2012.08.0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2.)

 

(대상 10:13-14, 개역) [13]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사무엘상에는 사울의 일대기가 정교하게 서술 되어진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그것도 신앙의 실패자의 표상인 사울을 정교하게 서술한다는 것이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물론, 그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이다.

 

사울의 삶과 실패와 그의 빗나간 가치관에 대한 묵상은 나 역시 많이 했던 부분이다. 여기 역대상에서 사울을 상기하면서 두 구절을 들어 요약해주고 있다. 사울은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신을 잃어버리고, 악신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것이 신앙인에게 어울릴까? 무척이나 다른 세계임에도 불구, 사울은 그 경계를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렇게 사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유에 대해 역대상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울의 범죄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범죄는 무엇이었을까? 예전에도 말했든 사울이 도덕적, 윤리적인 범죄를 했다는 성경 기록은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범죄를 범했던 것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더 큰 죄를 지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던 것. 하나님께 묻고, 의뢰하고 청했던 것이 아니라 신접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을 자기 삶 속에서 철저히 배제시켜 버렸다. 그는 철저히 회개하지 않았던 배신자였다. 마치 사울의 모습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이 한 사람에게 반영 되어진 축소판 같았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존재이다. 특별히 죄에 대한 새로운 양심을 부여 받은 우리들은 성령 안에서 행할 수록, 양심의 눈이 밝아질수록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작은 죄에 대해서도 가책을 느낀다. 범죄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가장 조심스런 부분이며, 더러운 오물을 밟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세상, 정욕, 교만, 이기심, 육신의 것, 분노, 무절제, 다툼, 게으름, 영적침체, 걱정 등. 그리스도인에게 대표적인 죄이다. 한편, 이 죄는 어떠한가? 기도 가운데 충분히 하나님께 묻고, 의뢰하지 않음. 성급함.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림. 말씀을 등한시 함. 사람의 지혜를 구함.

 

말씀 가운데서, 스스로의 기도 가운데서 충분히 하나님께 묻고 그 응답을 기다리기 전에 사람에게 먼저 물어 보고,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 세상이 제공해주는 정보를 의뢰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보통의 다양한 죄들에 비해 훨씬 더 큰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사울이 죽었다. 그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 범죄는 도덕적인 것도 윤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말씀을 등한시 했다. 그는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묻지 않았다. 자기의 욕망대로 나아갔고, 회개치 않았다. 사울에게 하나님은 없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울에게 분노한 이유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 삶에 얼마나 하나님을 의뢰하고, 묻고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가 있는 것일까? 이 태도는 습관이 되었던가. 이 태도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에 올라와 있었던가. 그리스도인의 범죄가 그토록 경계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것이야 말로 항상 고려되어야 할 삶의 지표는 아니었던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것이 범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우선 원칙이다. 삶 속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 범사에 하나님을 간섭하시도록 하는 것.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귀찮지만 그랬을 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섬기는 자의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기억하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범죄는 모든 범죄의 원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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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탄생_2012.08.04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1.)

 

(왕하 16:20, 개역) 『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하 20:21, 개역)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아하스는 악한 왕이었다. 우상숭배자 불신자였다. 성경은 그가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했다고 증거한다. 또한, 이방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 아마, 몰렉 우상을 섬겼던 것 같다. 심지어 아하스왕은 앗수르왕의 초청으로 다메섹에 갔다가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단의 구조와 제도를 본따 예루살렘에 단을 세웠다. 철저한 우상숭배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성경은 히스기야왕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노라고 말이다.

 

다윗 이후 유다의 신앙부흥과 회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왕이 히스기야왕이었다. 그는 분명히 종교적 개혁가이자 유다의 영적부흥과 중흥의 리더였다. 그리고 히스기야왕도 잠들었다. 이제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를 이었다. 성경은 므낫세 왕에 대해서도 증거한다.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쪼차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하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시을 숭배하여 섬겼노라고.

 

므낫세는 섬길 수 있는 우상은 모조리 모아다 섬겼던 유다 최악의 우상숭배자였다. 심지어 성전 마당에서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점을 쳤다. 그는 지독한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종교혼합주의자였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므낫세로 이어지는 유다왕의 종교적 취향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는 것일까.

 

우상숭배자에게서 여호와 신앙의 부흥가가, 신앙의 부흥가에게서 혼합주의 우상숭배자가 나왔다. 이 분명한 모순이 사실은 가장 일반적이다.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은 어떻게 이뤄졌던 것일까. 오늘날 우리교회가 현재의 성도 규모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신앙의 전승과 그리스도인의 계승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그 혈통을 통해 이뤄져 왔던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복음의 확장은 너무나 더딜 뿐이다. 복음이 수없이 많은 우상숭배자들과 각양각색의 불신자들에게 전해지면서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신자였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거룩해지고 그 복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가족들에게도 전파되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의 밑에서 탄생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인이 탄생되기도 하지만 숫적으로 비교하자면 오히려 불신자의 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비율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한편, 불신자는 어떻게 탄생될까. 대부분의 불신자는 불신자 부모로부터 탄생된다. 당연하다. 불신자 부모가 자녀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따로 있다.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 안에서 불신자들이 탄생된다. 부모는 믿고 거룩하게 되었으나 그 자녀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화합치 않은 불신자들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장성해가면서 교회를 떠나고, 구원의 확신이 없고. 세상의 종의 된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현상이 매우 희귀한 현상이 아니라 조금만 주위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어느 정도 보편적인 현상이란 것이다.

 

우상숭배자 아하스에게서 위대한 부흥개혁가 히스기야 왕이 탄생했다. 그렇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불신자의 부모 밑에서 비롯된 예가 너무나 많다. 오히려 믿는 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리스도인보다 불신자의 부모 밑에서 믿음의 투쟁과 좌절을 극복한 그리스도인이 훨씬 더 뜨겁고 강한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인보다 불신자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인이 더 출중한 예가 많다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위대한 신앙개혁가 히스기야 왕에게서 유다 제일의 우상숭배자이자 종교혼합주의자 므낫세왕이 탄생했다. 가장 지독한 우상숭배자.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켰던 무모한 왕. 불신자의 자녀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현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자녀가 지독한 불신자가 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탄생은 어디서부터인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더 많이는 불신자의 자녀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 불신자는 어디서부터인가. 대부분의 불신자는 불신자로부터 비롯된다.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귀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옛날 복음의 수혜를 가장 크게 입었던 영국과 미국이 오늘날 빈 껍데기가 되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할까. 17~18세기를 복음이 불로 태웠던 잉글랜드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녀들은, 그 후손들은 불신자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좀 씁쓸한 사실이지만, 교회는 뜨겁지 않다. 복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편 교회는 뜨거웠고, 오래갔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복음의 수혜를 입는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코 복음과 교회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복음은 여행을 했으며, 교회는 역사는 옮겨다녔다.

 

한때는 불신자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탄생했고,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던 교회가. 나라가. 지역이 이제는 불신자들만 자라나는 황무지가 되기도 한다. 한때는 복음의 수혜를 조금도 볼 수 없었고, 불신자로부터 불신자만 탄생했던 나라와 지역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으로 탄생되는 기적의 장소가 된다. 그렇게 복음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로 매 시대에 불변하면서 타올랐던 것이 아니라 옮겨다니며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로부터 탄생되었던가. 불신자는 어디로부터 탄생되었던가. 그 출처를 알고 발견하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닌가. 불신자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는 아름다운 현상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서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이치가 항상 적용된다라면 세상은 이미 복음화되었을 것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책임. 그리스도인 부모가 된다는 것의 책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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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이스라엘_2012.07.22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0.)

 

(왕하 8:22, 개역)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일찍이 다윗왕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 전 국가적인 평안을 선포하였을 때는 주변의 많은 이방국가들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쳤었다. 그러나 이제 북이스라엘고 남유다로 분열되고 날이 갈수록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차츰 그 속국들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국력의 쇠퇴이기 이전에 신앙의 퇴보였다.

 

여호와를 정직하게 섬기는 왕이 부족했다. 그나마 유다는 선한 왕들이 있었지만 북이스라엘은 아예 없었다. 다윗왕국의 위용은 단순히 국력이 아니라 신앙의 충만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다윗왕이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순항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했고, 전 국가적인 영적침체와 신앙의 퇴보가 반복되었다. 그것이 분열과 국력의 쇠퇴로 이어졌고, 차츰 속국들이 그 틈을 노려 이탈해가기 시작했다.

 

한편, 이러한 현상을 개인의 신앙에도 적용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교와 영성에 밝아져 있을 때는 우리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마음에서 올라오는 기쁨과 감사함이 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수고로움 속에서도 심령의 낙을 누리며 늘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다. 시험과 고난의 고통을 이기고 극복해나갈 담대함과 용기와 위로를 마음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침체되고, 우리의 기쁨이 꺼지면 차츰 감사가 식어지고, 평강이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활 속에서 믿음과 은혜로 다스렸던 육신의 것들과 세속의 찌끼들이 통제의 사슬에서 이탈해가기 시작한다. 나태해지고, 불평이 많아지고, 제어하고 정복했던 육신의 감정과 기질, 세속의 욕망과 거짓들을 구속하는 힘과 능력이 후퇴하면서 그것들이 내 삶의 찌꺼기처럼 달라붙기 시작한다.

 

마치, 말씀에서처럼 에돔도 립나도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원인은 영적침체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독은 영적침체일 것이다. 통일왕국의 그 충만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그리워하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분열되는 것, 우상이 고개를 드는 것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개인의 신앙에도 히스기야가 필요하다. 부흥이, 중흥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고, 우리의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이 분열될 때, 침체가 반복된다. 신앙이 후퇴되기 시작할 때 차츰 정복하고 다스렸던 육신의 것들과 죄들이 다시 살아나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윗왕의 통일 이스라엘과 같은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 무너질 때는 히스기야왕 같은 개혁이 내 안에 필요하다. 다스리자. 그리고 부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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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시험_2012.07.16

(Subject: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9.)

 

(왕하 5:10-11, 개역) [10]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맞나 보다. 나아만 장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성경은 나아만 장군을 이와 같이 소개한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며,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나아만 장군은 아람을 구원했다. 그는 큰 용사이다.’  (쥔짜 최고 최고!!)

 

그러나문둥병자이다.’ (>.<)

 

참 정말 참담하지 않을 수 없다. 옥의 티란 말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처럼 모든 면면에서 남부러울 것이 없을 장수 나아만이건만 혀를 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나아만이나 우리나 어떤 부분에서는 불만족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에게 불만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 ...’(ㅋㅋㅋ. 정직해지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나아만이 치료되길 원했다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문둥병을 치유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며, 그의 깊은 육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집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엘리사 선지자를 알게 된 나아만은 특별히 왕에게 탄원하여 그를 만나기 위해 갔다.

 

그는 기대반, 의심반 그 위대한 선지자. 자신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해줄 수 있다는 그 선지자를 만나 완치될 꿈 같은 기대와 상상을 하며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내내 그 생각 밖에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 하나님의 선지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정말 능력이 뛰어날까? 그가 어떻게 나를 반겨줄까? 내 문드러진 이 몸을 어떻게 치료해줄까? 만약, 정말 치료가 되면 뭘 해볼까?’ 등등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엘리사의 집 앞에 당도한 나아만 장군. 대장수의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전장에서보다 그는 더 떨렸을 것이다. ‘이런 기분 처음이얌-_-;;’

 

나아만 장군은 집 앞에서 엘리사를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아니, 종이 나왔다. 종이 대답했다.

곧 주인님 나오십니다요. 나으리. 잠시만 기다려 주옵소서. 굽신굽신’ (X)

저희 주인님께서 요 앞에 요단강에 가셔서 일곱 번 샤워하고 나오라십니다.) (O)

 

캬오~’ 나아만 장군은 순신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지금 장난하냐? 지금 대 아람제국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이 먼 길을 치료받고자 왔는데. 선지자란 사람이 얼굴 한 번 안 비취고 종 한 놈 내보내서 요단강에 씻고 오라고? 지금 내가 무슨 동내 강아진 줄 아나? 내가 지금 맘만 먹으면 너희들 다 죽이고, 선지자고 뭐고 이 집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어. 적어도 나와서 공손히 인사해서 나를 안으로 들이고, 정성껏 치료해줘야 되는거 아니야? 이런, 괘씸한부글부글

 

나아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였더라도 우리는 심하게 화가 났을 것이다. 그 못난 자존심이 분명 삐쭉거렸을 거다. 나아만의 지위와 명예를 생각해볼 때 가히 엘리사의 대접은 극도로 무례한 것이었다. 분명하다.

 

바로 이 장면으로부터 아주 평범한 시험을 찾아본다. 엘리사는 왜 그토록 무례하게 그를 대우했던 것일까? 그 이유가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벌어진 상황에서부터 역추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나아만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대장군이었다. 그것도 소국(小國)의 장군이 아니라 당시로써는 대제국인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다. 그는 매우 권세 있는 자였다. 그의 힘의 구도에서 볼 때, 사실 엘리사는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이긴 하지만 칼사위 한 번에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엘리사가 얼마나 무례하게 했는지 생각해볼 때, 나아만은 얼마든지 격노할 수 있었다. 안면몰수하고 완전 무시당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 나아만이 직면한 시험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녕 나아만이 치료되는 해법은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였다. 그러나 나아만의 생각과 달랐고, 그에 대한 정당한 예우를 하지 않았기에 그는 시험에 들었던 것이다. , 교만의 시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물었던 그 질문과 같이 나아만에게 정말 낫고 싶은 갈망이 있는지 시험하였다.

 

엘리사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엘리사의 무례한 예우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그의 권세와 명예로부터 비롯된 교만을 시험하는 동시에, 그가 그 수모를 극복하면서까지 진정으로 낫고자 하는 그 깊은 갈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참으로 자신을 낮춰 요단강에 벗고 들어가기까지 하는 그 낮은 마음. 갈망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순간 나아만은 그 모든 시험 앞에서 실패할 뻔 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온 지혜로운 종들이 나아만을 설득시켰다. 나아만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 종들이 아니었다면 나아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자신을 낮춘 나아만은 승리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험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특별한 시험이 아닌 평범한 시험이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의 교만을 시험하신다. 우리의 자존심이 번뜩이는 그 순간. 그 교만. 은근한 오만. 욕심. 자기명예. 지푸라기 같은 우리조차 얼마나 교만이 뿌리 깊게 우리를 지배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자존심을 버리고 굴복해야 할 그 순간에 우리를 실패로 이끌어간다. 우리 안에 진정한 갈망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버린다.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이방의 가나안 여인. 예수님이 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자신을 개에게 까지 낮추었던 그 여인에게 기적이, 은혜가 임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렇다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그것이었던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일들에서부터 항상 우리 마음의 겸손한 여부를 확인하신다. 우리가 정말 갈망하는지 보신다. 가나안 여인처럼 그 갈망이 자신을 그토록 낮추 수 있는지 확인하신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얼마나 습관적으로 우리는 그런 은밀한 시험을 실패로 반복해왔는지 생각해보았던 것일까?

 

우리가 얼마나 나아만 보다 교만한 마음으로 살고 있는 순간이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가나안 여인과 같은 겸손과 낮아짐과 갈망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지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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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청_2012.07.0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8.)

 

(열왕기하2:17-18)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엘리야의 승천은 예고되었지만 그 즉시 갑작스레 벌어졌다. 엘리사는 비명을 질렀다. 그가 비록 엘리야의 뒤를 이어 그의 몸에서 떨어진 옷조각을 가지고 동일한 이적을 행하는 모습이 바로 보여지지만 당황하여서 매우 흥분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엘리야의 승천을 비단 엘리사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일부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도 먼 발치에서 보았다. 그리고 요단의 물을 가르고 건너서 되돌아오는 엘리사의 모습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과 이적이 엘리야는 승천시키고, 엘리사는 동일한 능력을 받아 물을 가르고 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의 무리들에게 되돌아왔을 때, 기꺼이 절을 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임했음을 보았기에 그들은 엘리사를 예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엘리야를 찾기를 원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엘리야가 완전히 승천해버렸다고 믿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었고, 여전히 충분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엘리사에게 깍듯이 예우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능력이 혹시 엘리야를 어느 산, 골짜기에 내려놓았는지 모를 일이라며 엘리야를 찾아봐야겠다고 나섰다.

 

엘리사는 당연히 그것을 막았다. 엘리사는 직감했다. 이제 엘리야의 능력과 영감이 자신에게 임했고,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이어받았음을 말이다. 엘리야는 완벽히 승천한 것이 명백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찾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일 뿐.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은 믿지 않았다.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쉽게 말해, 그들은 도마처럼 내가 직접 보고,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 그런 주의였다. 무리가 강청하되 엘리사로 하여금 무안할 정도로 강청하였기에 엘리사는 무모한 짓임을 알지만 그들로 하여금 찾아볼 것을 허락했다. 결과는 당연했다. 사흘을 찾았지만 엘리야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영원히 승천하였음이 분명했다. 선지자의 무리들이 돌아오자 엘리사가 말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어 낼 때도 그러했지만. 그리고 곧 뒤에서 펼쳐질 수넴 여인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지만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것으로 인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성경에는 종종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도 그 점을 지적하셨다.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영감은 분명히 엘리야의 시대가 종식되고, 그 능력이 위임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그것이 일련의 정당한 절차와 예견된 형식을 따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혼란을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혼란 속에서 증명되고, 탄생되는 것이다. 정녕 모든 선지자 무리들에게 갑작스러운 엘리야 시대의 종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였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엘리사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선지자의 생도들 무리가 엘리야를 찾으러 나서야겠다고 흥분하고 나섰을 때, 엘리사는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럴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그저 무모한 짓이며, 이제 엘리야는 승천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이제 엘리야의 사역과 그 역할은 자신이 수행해나가야 할 것임을 말이다. 물론,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엘리사가 그들을 만류하는 그 안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생도들 무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았음에도 확신할 수 없었다. 믿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정확히 확인해보길 원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우리 역시 정확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건과 현상 앞에서 우리는 순전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지 못할 때가 정녕 많이 있다. 우리는 검증하고 싶어한다. 검증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종종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 믿음의 부족이 검증되는 꼴이 나타난다.

 

무모한 강청을 했다. 강청을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가 떡 세덩이를 강청했던 일화를 통해 강청하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말씀하는 성경도 있지만, 적어도 여기에서는 강청하는 것이 무모한 짓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왜 강청하며, 무엇을 강청할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정당한 강청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인지. 때로는 믿음의 부재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 우리가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 나의 어떤 바램을 하나님 앞에 열거하는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방식의 강청을 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은 흥분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지거나 자기 안에서 피어나는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강청하게 된다. 그러나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들의 흥분은 무모한 강청을 하고 있었다. 사흘이라는 시간을 허비하고, 노동한 결과 그들이 얻는 대가는 고작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그 한 마디였던 것이다. 흥분했고, 강청했던 그들이 얻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저 무안해졌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강청하는 사람들이다. 때로는 영혼을 위해 강청한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강청함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자기의 이기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모한 강청을 하기도 한다. 강청하기에 앞서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이유로부터 이것을 구하려고 하는 것일까? 왜 지금 나는 흥분해있는 것일까? 나의 강청은 정직한 것일까? 시간이 흐른 뒤에 나의 무모함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청해야할 때가 있고, 강청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그 때와 시기에 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 믿음의 부족이. 또는 내 곁에서 만나는 선지자와 같은 분들의 말을 내 상식과 수준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으로 해서 무모한 강청과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선지자의 생도들처럼 그 현상을 받아들이기에 엘리사의 조언은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비록 엘리사가 영감을 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확인하고 검증해야 된다고 스스로의 생각을 더 믿고 의지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과 현상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의 조언과 가르침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지 않을지 모른다. 스스로 검증해봐야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때 분명 우리 믿음의 부족이 가장 선명히 검증되어질 것이다.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이 강청하는 바와 그 이유를 살필 줄 안다면 우리는 때를 따라 필요한 강청을 구별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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