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리스도안에서_2010.02

 

 

(1:3-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3-13 그리스도 안에서

 

3절부터 13절까지에만 9번이 반복되는 어절이 있다. 바로그리스도 안에서이다.

 

1)구원(1:3-7)

 

하늘에만 있는 신령한 복이 있는데 그 복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함 곧, 구원이다. 구원은 가장 신령한 복이다. 구원의 복주시는 목적은 흠없게 하기 위함이다. 구원을 통해 우리는 아들의 권세를 취득한다. 이로써 우리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헤의 풍성함은 구원으로 나타났는데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과 대속적 죽음으로 흘린 피로 실현되었다.

 

2)구원의 계획(1:8-12)

 

구원의 계시와 함께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신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그 넓이가 넓어진다.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개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유를 통일케 하는 것을 포함한다.

세상은 마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과 통일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피의 복음으로 다시 분리된 것을 통일코자 하신다. 하늘의 것이든 땅의 것이든, 자유자든 종이든, 영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이든 전부 말이다.

하나님게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고자 계획하신 구속의 계획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켜 나가는 일을 해나가신다. 그리고 통일은 오래지 않아 이뤄질 것이다. 연합지 않는 세력은 심판의 날 소멸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통일, 구속의 계획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자들이고 연합된 자들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뒤를 이은 복음의 기업이며, 성도의 기업이며, 하늘나라의 기업이며, 구속의 기업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찬송받기 합당한 하나님과 그 영광 찬송함을 회복케 될 것이다.

 

3)구속의 보증(1;13-14)

 

구속의 보증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다.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게획 안에 있다. 누군가 보증을 도장 찍었다면 먼저 보증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진리의 말씀이 있었다. 그것은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실존에 있어 말씀이란 것은 증거이다. 확증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말씀이 없는 하나님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그리스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구속은 없으며, 말씀이 없는 속죄는 없으며,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신앙의 김족인 진리를 죽이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제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다. 로마서 1017절에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일 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생기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쳐진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다는 전제를 둔다.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에 언제나 우리 구원의 재확증도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그가 못박히신 것은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동인이 무엇인가. 말씀이다. 우리 믿음과 구원의 근거는 문자로 쓰여진 성경이기에 말씀의 부족은 종종 구원의 의심으로 야기된다.

성령은 공개적으로 약속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되었지만 조금은 어렵다. 그라나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직접 약속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임재하고 내주하심으로 성도의 구원을 확증하고 인쳐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버리운 자라고 했다. 성령님은 마치 완제품의 검사필마크와 같다. 보증이 되시고 보증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믿는 믿음에 있어 다시는 재검증, 재설정, 재시도가 요구치 않게 된 것이다. 믿음의 행위가 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일찌라도 참 믿음의 성령 인치심이 있었다면 우리의 의심조차 무능력한 것이란 의미다. 그 어떤 불신과 의심, 두려움도 우리 구원의 보장에 아무런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디 믿고 의심하기에 익숙한 우리의 본성을 생각할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성령님의 보증으로 말미암아 요한복음 1028절에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령님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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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_2010.03.27

1. 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2. 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3. 아담과 하와의 갈등

4. 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5. 적용

1)개인적인 적용

2)교회적인 적용

5:22-33 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한 한 분이 계셨다.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알려주신 그 분은 자신의 영원 속에서 기묘한 일을 시작하셨다. 바로, 창조였다. 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개념들이 나타났다. 빛과 어둠, 위 아래, 모여짐과 드러남, 종류, 계절과 일자, 주관, 날다, 번성, . 그것들은 영원 속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작업을 통해 나타났다.

많은 창조물 중 하나님은 매우 도전적이고 기발한 창조를 시도했다. 바로 아담이었다. 유일하게 그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영이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유일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을 유쾌하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혼자 서있는 아담의 모습이 홀로 있는 여호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리 만드신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를 통해 실현시켰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같은 영을 소유했고, 그들은 같은 몸에서 나왔으며, 그들이 서로 깊이 사랑하길 원하셨다.

1.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민망하게 만든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홀로 있는 아담을 외면하고 하와를 주지 않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랑은 존재의 필요성을 가장 정직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궁극적인 동인과 목표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다른 것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하신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더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를 통해 교회가 탄생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고, 마귀로 말미암아 야기된 죽음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사랑임을 증명하셨다.

그 사랑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길 원하셔서 주름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길 원하신다.

교회의 애칭은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가 신부인 이유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은 무한한 사랑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이다. 그렇다고 신부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적인 증거를 보일 수 없다. 사랑을 받는 신부는 필연적으로 순종적이 된다.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잠잠히 말하며, 겸손해지며, 그 어떤 거스르는 말로 신랑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바로 그것이 완전한 사랑을 하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한 교회를 향한 이상적 모형이다.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그 사랑을 한없이 공급받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 교회.

2.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당신은 아담인가? 아니면 하와인가? 아담과 하와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과 교회의 그림자다. 이것을 32절에서는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이어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길 원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만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특별한 공동체, 남편과 아내의 위치와 질서,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기 원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위치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할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3.아담과 하와의 갈등

아담은 자기 몸처럼 하와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나의 아내의 허물과 잘못을 그냥 너그럽고, 온유하게 모두다 받아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뭔가 불평하며 아내를 책망하고 싶다. 아내는 나를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와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아담은 눈을 뜬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하나님이 흠있고, 허물 많은 교회를 얼마나 처절하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얼마나 자주 불순종하며, 교만하며, 말대꾸를 하며, 변명을 늘어놓는지.

하와는 아담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말이 복종이지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아담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의 냉소적인 한 마디는 자주 내 마음을 도려낸다. 그는 도대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걸까?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준 계명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복종하라니.

그 순간 하와도 눈을 뜬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얼마나 깊은 경외와 사랑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었는지. 교회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하고 있는지.

4.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아담과 하와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책망해야 할까? 아니다. 정말 그들이 상기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인가이며, 그리스도는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했는가이며, 그럼에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얼마나 소홀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아담이 하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대신,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대신, 아담과 하와는 함께 교회의 위치로써 하나님 앞에 교회의 의무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5.적용

적용1) 개인적인 적용

남편과 아내들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남편과 아내 각자에 대한 의무를 감시하는 것이 될 때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의무이다. 가정도 그 자체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도 나의 리브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30살이 되도록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좋아한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사랑한다.’는 말은 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 나의 리브가는 나를 존경해줄까? 그것도 왠지 자신이 없다.

사실 나는 사랑할 자격도 존경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내게 주어진 사랑의 의무를 노력해야 하고, 리브가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 교회의 위치로써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는 너무 앞서 자랐지만 실천할 능력이 없기에 아직 내게 리브가를 주시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슬퍼하진 않는다. 자격 없이 얻는 것은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홀로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냥 그것이 좋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두렵다. 나는 강해보이는 척하지만 실은 조금도 강하지 않은 것이다.

적용2) 교회적인 적용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아내의 머리 위치에 있음으로 앞에서 주도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위치에서는 아내처럼 형제도 복종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많은 형제들이 앞서 일하다 교만에 빠져 교회를 대적하며, 돌아선다. 자기 아내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어긴 것이라 질책하면서 정작 자신은 교회의 위치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는 불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안에는 아내에 대한 존중과 경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상하 수직의 관계에서 아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내의 의견도 존중해야 되며, 아내의 권리도 존중해야 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순수한 경외를 동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반성하고 고쳐야할 잘못조차 용인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냥 토라지는 것으로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기심이란 것과 남편의 의무를 잘못 사용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방식에 길들여지면 그 남편은 병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 역시 남편을 사랑할 의무가 있는데 이 사랑이란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야할 남편의 입장을 생각할 때, 남편이 자신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나친 순종이 변질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남편의 태도까지 순종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신앙을 져버리거나 교회와 등질 때 순종하는 아내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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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범위; 삼상 13- 20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18:3-4)

 

 

 

 

 

 

 

I. 문맥을 통한 본문해석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맹한 자 요나단

2) 아브넬과 자신의 무기력을 본 요나단

3) 다윗을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요나단

4)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윗을 발견한 요나단

5) 언약의 증표로 군장을 주었을 가능성.

6) 본문에서 제외되었지만 반드시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삼상181!

7) 결론; 영적 통찰력의 소유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의의 사람 요나단

 

 

II. 본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1)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사랑함으로 어떻게 언약이 맺어질 수 있는가.

 

 

 

 

 

 

 

 

 

 

 

 

I. 문맥을 통한 본문해석

 

우리가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고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며, 더불어 자신의 군장마저 주는 요나단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배경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맹한 자 요나단

 

사무엘상 13~14장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 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철공들을 잡아간 상태였으므로 이스라엘은 변변찮은 무기조차 없는 조악한 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장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요나단은 자신에게 속한 병기 잡은 자들을 이끌고 과감히 블레셋 진영으로 기습침투작전을 펼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용맹하며 도전적인 요나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기습에 앞서 병기 잡은 자들에게 했던 말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란 선포는 그의 건전한 신앙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담은 도전적인 말로써 병기 잡은 자들의 마음을 격동케 하고 담대케 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과 신의의 사람 요나단을 여기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아브넬과 자신의 무기력을 본 요나단

 

그러나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용맹한 요나단의 모습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군대장과 아브넬도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며, 블레셋 진영에 소수의 병기 잡은 자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펼칠 만큼 용맹무도한 요나단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어떠한 용맹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이러한 이스라엘의 무기력과 용맹을 상실한 상태는 요나단의 마음에 큰 상심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요나단 자신 역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과 용맹으로 골리앗과 맞서 싸우기 위해 뒤쳐나갈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과 상실감을 맛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나단에게 있어 매우 치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하며, 신앙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일련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추슬러 용맹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지극히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뜨거운 심장으로 용맹을 발휘하여 군장도 없이 나아가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고 큰 감격과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는 자연히 다윗이 승전하고 복귀하였을 때 그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더불어 언약을 맺고 자신의 군장까지 내어줄 만큼 강렬한 감동이었다.

 

 

3) 다윗을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요나단

 

또한, 요나단이 자신의 군장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점은 다윗을 참으로 사시는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자신보다도 더 다윗을 하나님의 용사로 높이여기는 태도이기도 하다. 요나단은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는 멋진 군장과 병기를 들고 있었지만 조금도 여호와를 위해서 용사가 되어 나가싸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군장하나 없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의 감동됨으로 나아가 때려눕혔다. 당연히 요나단은 그런 작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다윗을 보고 그를 가장 위대한 용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자신이 소유한 군장을 마땅히 다윗이 차지해야할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요나단만이 다윗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경외심을 드러냈다는 것은 요나단이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의 건전한 상태에 깨어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다윗의 용맹을 보고 경악했을 뿐이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윗을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가기에 앞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이미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은 상태에 있었다.

 

4)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윗을 발견한 요나단

 

요나단이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감동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고 용맹을 발휘해 골리앗을 이기는 모습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또 하나 골리앗이 나타나기 전 자신의 아버지 사울왕의 계속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그를 부리는 모습을 보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성경을 읽으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신에 감동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 바로 다음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음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울왕에 임한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에서 이제 그 신의 감동됨이 다윗에게 임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점은 다윗이 장차 사울을 계승하여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것과 더 크게는 하나님의 역사의 후계자가 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사실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 다윗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무엘상 20장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떠나보내며 언약을 재확증할 때 그가 자신에게 여호와의 인자가 임하도록 기도해 줄 것과 자신의 집 후손들을 끊어버리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5) 언약의 증표로 군장을 주었을 가능성.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나가기에 앞서 그는 먼저 사울과 면담하였다. 사울은 소년 다윗이 어리므로 당연히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짐승을 잡은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며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피력했다. 이로써 사울에게 신뢰를 얻었고, 사울은 그런 다윗을 내보내며 자신의 군장을 내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시험 삼아 입어보고는 맞지 않아 벗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광경을 요나단이 보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나단은 이미 소년 다윗에게 군장이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이 자신의 군장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점은 그의 군장을 다윗이 입고 전쟁을 할 것을 염두한 행위가 아닐 것이란 것이다.

, 요나단의 이러한 행위는 앞서 다윗과 언약한 것에 대한 자신의 확증과 신뢰를 다윗에게 보여주는 증표와 비슷한 행위였을 것이란 것이다. 이는 또한, 다윗을 믿고 사랑하며 그를 좇을 것이라는 요나단의 결단을 다윗에게 보여주는 신뢰를 표면적으로 증거해 보이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6) 본문에서 제외되었지만 반드시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삼상181!

 

특별히 본문에 해당하는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언약을 맺으며, 군장을 주는 과정에는 사무엘상 181절이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약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복귀하였을 때 사울왕은 다윗을 불러 그의 출신을 물어본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자기 생명같이 사랑함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이 구절이 중요한가는 다음의 이유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사울의 악신을 쫓기 위해 수금을 타는 자로 왕궁을 출입하고 있었다.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의 신상을 이미 전해들은 바 있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다윗이 항시 왕궁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베들레헴의 아비집과 왕래하는 가운데 있었음으로 요나단은 실제로 다윗을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다윗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모를 소년이 거인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 감동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사울왕의 악신을 쫓던 그 소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 어떠했겠는가! 요나단은 악신을 쫓던 신에 감동된 수금 치던 소년이 참으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또한, 그가 하나님의 후계가자 될 것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요나단으로 하여금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7)결론; 영적 통찰력의 소유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의의 사람 요나단

요나단은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왕자됨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온전히 다윗에게 양보한 겸손과 하나님 경외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다윗을 보호하고 옹위함으로써 신의의 사람임을 잘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얼마나 건전한 영혼의 소유자였는지 증거해준다.

 

 

II. 본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1)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이것은 신뢰를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동시에 제일 먼저 한 것이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은 것이었다. 언약을 맺음은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한 신뢰를 소유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이것은 경외와 섬김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군장을 그에게 주는 경외와 섬김을 드러내었다. 자신의 무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신뢰의 표현이자 그 안에 그를 여호와의 용사로 섬기려는 섬김과 경외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섬김과 경외를 수반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보호와 변호를 통해 이해된다. 다윗을 질투하고 죽이려는 사울에게서 요나단은 다윗의 무죄함과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끊임없이 변호하고 증명해보이려 수고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보호와 변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이것은 상대를 위해 상대의 소원도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채워주고 싶은 열망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죽음위협으로 기로에 선 다윗을 위로하며 그의 소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이뤄주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소원을 채워주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다섯째, 이것은 상대를 위해 죽음을 불사를 수 있음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과 태도는 그가 다윗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우리에게 호소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죽음조차 이길 수 없는 사랑을 소유한 것이다.

여섯째, 이것은 변치 않는 약속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떠나보내며 다시금 그와 맹세함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변치 않는 언약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 이것은 상대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그가 후계자에 오를 수 있도록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숨겨주고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소망을 가진 것이다.

열 번째, 이것은 상대를 대적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음모를 매우 악하게 여겼으며, 그러한 사울의 악의를 책망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대적하는 세력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열한 번째, 이것은 상대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함께 우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의 고난을 자신의 고통처럼 슬퍼하며 괴로워했고, 울어주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함께 하는 그 자체를 통해 증명된다.

열두 번째, 이것은 자신의 영광을 친히 상대에게 양보하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의 자신의 왕위계승을 기꺼이 포기하고 다윗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지원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욕이 굴복한 것을 포함한다.

열세 번째,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의 한 모형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같이 하나님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써 십자가의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였고, 하늘의 왕좌를 포기하고 낮은 곳에 자신을 굴복하실 수 있었다.

 

 

2) 사랑함으로 어떻게 언약이 맺어질 수 있는가.

언약은 상대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뢰는 언약의 필수조건이다. 이 신뢰는 그 중에서 부부간의 신뢰, 가족 간의 신뢰가 가장 깊고 진득한 신뢰로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의 공통점은 바로 사랑으로 연합된 그 안에 있는 신뢰란 점이다. 결국 사랑 안에 있는 신뢰는 그 어떤 신뢰보다도 깊고 강렬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는 얼마든지 언약이 맺어질 수 있다.

부부는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맺는다. 부모와 자식은 영원한 가족의 언약을 맺는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는 반드시 언약이 체결되며 성취되기 마련이다. 사랑 안에서는 은연중에 모든 것이 신뢰와 언약으로 묶여져있다.

보라! 어머니는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기꺼이 용돈을 내어준다. 아이들은 부모님께 언제든지 자신의 신분증을 맡겨둔다. 가족은 구성원들이 어느 시간이든 임의로 집안을 출입하는 것을 조금도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는 어느 누가 허튼 짓을 할 것처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한가! 바로 사랑함으로 신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가족 간의 부부간의 또 수없는 언약들이 채워져 있다.

가족들은 은연중에 이미 그들이 영원히 한 가족이란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프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부부는 은연중에 그들이 서로만을 사랑할 것이란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자기를 죽기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 죄악 된 세대에서 끝없는 신뢰의 부서짐과 언약의 파괴됨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들은 서로 다른 비상금을 모은다. 자식은 부모를 속여 죄악을 지으러 나다닌다. 아내는 남편에게 통장을 공개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어젯밤 왜 새벽에 귀가했는지 솔직해지지 않는다. 어떤 부부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외도를 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며 다툰다. 자식들은 부모들이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고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간섭과 반대를 행사하는 장애물이라고만 여긴다. 이것이 모든 것이 불법인 것이다.

한편, 참된 사랑 안에서 신뢰와 언약을 소유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신뢰를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구원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다시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과 신뢰를 우리를 향한 사랑 안에서 나타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도록 하신 것이다. 이 언약은 변치 않는 언약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 안에 있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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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고서1. 의심의 공격_2007.07.02

 

 

 

 

(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I.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표지

 

II.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1)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의심하는 자는 어째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로 묘사되었는가.

3)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5)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어째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 규정케 하는가.

 

III. 결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죄이다.

 

IV. 적용1. 의심이 불러올 가공할만한 파괴력.

1) 의심은 두려움을 창조한다. 2) 의심은 불신앙의 씨앗이다. 3) 의심은 하나님 약속의 파괴자다.

4) 의심은 시험의 시기에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V. 적용2. 우리가 의심에 빠지는 이유

1) 경험의 부족 2) 현실에 잠식당함. 3) 믿음의 눈을 흐리는 이기심 4) 지나친 기대심리

5) 조급한 마음 6) 예기치 않은 변수 7) 하나님 뜻을 찾지 못함.

 

VI. 적용3.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I.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표지

(*표지;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적 또는 개념적 특성)

 

먼저, 이 본문은 믿음으로 구해야 될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의심가운데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정죄 받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정죄하며 믿음을 좇아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본문 역시 믿음으로 구하는 행위에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도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반대되는 의심으로 구하는 행위의 조악함을 기술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의심으로 구하는 것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라는 것이다.

넷째, 이 사람의 모든 일에는 정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심하는 자에 대한 사도 야고보의 참혹한 책망을 들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심하는 행위는 곧 죄악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있어 의심이란 것은 본질적인 신앙의 미덕인 믿음과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써 이것은 마음을 나뉘게 하며 요동치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질서를 파괴시키고 하나님이 받으실 의로운 기준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의심은 죄악의 행위이며 이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받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이다.

의심,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은혜 베푸실 것을 대적하는 진리이다. 이것은 바로 인류를 죄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시험받는 하와의 마음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심하는 자를 정죄하심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II.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1)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실존과 약속,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실존과 속성에 대한 정확히 이해가 없다면 그는 말씀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정상적인 믿음이란 것은 이성적인 접근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대상에 귀속된다. 우리가 오감과 지각을 통하여 대상을 판단함에 있어 그것을 스스로가 제시하는 논리를 따라 이해하고 판단함이 불가한 상태로 대상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더러 전혀 생소한 이단 종파에 빠져든 광신도들을 보며 기이히 여기게 된다. 그러한 거짓된 진리에 그들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진리라고 판단되었으며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거짓 교리를 신봉하는 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대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판단하게 되면 계속적인 관계맺음과 접촉을 허락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연속적인 접촉은 그 대상에 대한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신뢰를 유발시킨다. 독특하게도 사람은 계속적인 접촉을 하지 못하게 될 때 대상에 대한 의구심이 다시금 올라오기 마련이다. 인간의 지각은 계속적인 관계 맺음 속에서 대상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며 자신의 판단 안에서 형상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연속적인 관계 가운데 머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의미 안에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믿음은 체험을 통해 확증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조금도 빗나감이 없음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욱 분명한 신뢰와 인정을 하게끔 되어있다. 경험은 지식을 통한 신뢰에다 확증이란 인치심을 더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지식과 경험, 스스로의 판단에서의 확신과 확증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충분히 유발시킨다. 이 믿음은 대상이 행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의구심이 죽은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는 그 안에는 의심이 능력을 발휘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하는 바에 있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을 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계속적인 하나님과의 교감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뿐 아니라 명확한 신뢰 가운데 믿음을 돈독히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구하는 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너희 마음 가운데 확증하란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는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2) 의심하는 자는 어째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로 묘사되었는가.

 

단지 바다일 뿐 아니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이다. 바다는 본질적으로 잠잠하지만 바람이 불게 되면 출렁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파고를 치며 배를 삼키고 땅을 삼키기까지 한다. 고요한 바다를 성난 파도로 넘실거리게 바꿔놓는 힘이 바로 바람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홍수 때 심판의 물이 바람에 의해 극지방으로 몰려갔다고도 말씀하셨다. , 바다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바람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이 요동치는 바다는 곧, 의심하는 자의 마음이다!

의심하는 자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지킬 수 없다. 그는 어느 쪽으로 행동을 취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무질서와 혼돈, 무지와 방황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의 마음을 붙잡아줄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 결국 그의 의심이 불신앙이란 성난 파도가 되어 땅을 삼키고 발악하도록 방치한다. 그의 의심과 불신앙이 그를 신앙의 땅에서 삼키고 몰아낼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요동하는 바다의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가 똑바로 서서 내딛을 수 있는 믿음의 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의심하는 자의 출렁이는 마음에는 두 가지의 바람이 분다. 첫째, 외부로부터 부는 바람에 요동친다. ,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교리들, 세상의 유혹, 이웃으로부터 받는 핍박 등이 이것이다. 둘째, 자신의 내면에서 부는 바람으로 요동친다. ,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구심, 육신의 소욕을 좇으려는 이기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 등이다.

이 모든 바람이 의심하는 자의 마음의 바다에 불어 닥쳐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꽁꽁 얼어 붙여버릴 극지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의 마음에는 항상 두 가지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그 바람을 막을 어떤 방패막이가 없다.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어디에 자신의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는 불안하다. 그는 두렵고 무서워한다. 그는 곤혹스러워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 바람을 막지 못한다면 결코 그의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확증하며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때 베드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며 주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시험의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의심함으로써 시험의 바다 가운데 자신을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의 마음은 무섭고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의심은 스스로를 시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기억하라!

 

3)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의심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것임을 확증시켜주고 있다. 앞서의 구절까지는 의심하는 자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민망한 눈길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눈에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요동치는 바다 물결처럼 천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란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만 접으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미움을 살 것이란 것이다.

악한 인간도 자신의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 주님께서 이 의심하는 자를 향하여서는 내가 아무 것도 네게 줄 것이 없다. 너에게는 어떤 분깃도 없도다. 너는 내 진노를 샀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찌하여 의심하는 자는 이토록 하나님의 정죄와 미움을 사는 것인가.

 

첫째, 그는 의심 가운데 거함으로 자신이 구하는 바의 명확한 목적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옳은 것인지 스스로가 분별할 수 없다면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되며 얻어야 될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저기 어린 소년을 보라. 그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따라 마트에 물품을 사러 갔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사야하는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할 것이란 말인가. 그는 확신할 수 없고 의심할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아무 것도 사지 못하거나 막돼버린 것을 사버리고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야 될 것이다.

 

둘째, 의심하는 자가 구하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혹 죄가 될 것인지 선이 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확증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가 그것을 결정하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을 때 자칫 그는 죄로 귀속되는 어떠한 행위에 자신을 맡겨버릴 위험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의심 가운데 죄를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의심 가운데 행하는 것은 자신을 시험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하와를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다. 그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범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고 말았다. 하와는 의심 가운데 행하는 자신을 취하고 마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력히 권면하신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14:23)

 

인류의 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바로 하와의 마음 가운데 피어오른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하와의 의심은 명확치 않은 판단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완전한 범죄가 되어 하와의 영생을 속이고 죽여 버렸다. 우리가 의심 가운데 무엇인가를 취할 때 우리는 범죄 하게 되는 것이다. 위험에 우리를 방치하고 자신을 시험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심가운데 행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4)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문이 말하는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려는 목적과 의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취해야할 어떤 행동을 찾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를 확신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얻고자하는 바를 확증하지 못하고 있음에 따라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구함과 동시에 의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고, 방향을 잡지 못한다. 그는 그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를 짓누르는 갈등과 괴로움만이 그 영혼 위에서 미소 짓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에 우리가 거하지 못할 때, 실상 대부분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것에 머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될 것인가. 이제 하나님께 여쭤보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취해야할 것인지를 말이다. 내가 확신함으로 행동 할 수 있도록 구해야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5)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어째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 규정케 하는가.

 

마음은 모든 행위의 동기이다. 그의 마음이 두 마음을 품고 정함이 없다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확신하는 올바른 기준을 따라 일관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명의 절름발이가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오른다리가 왼다리보다 짧다. 그러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항상 삐뚤어지고 불안해지고 만다. 그가 잘못 걸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한 쪽 다리가 더 짧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디를 가든지 제대로 걷지 못한다. 그의 걸음걸이는 모든 곳에서 정함이 없이 절뚝거릴 뿐이다.

두 명의 여인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본처도 사랑하지만 그의 두 번째 여자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함이 없는 불완전한 사랑이다. 그는 두 여인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정함 없이 분주하고, 서로 상충되는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요동쳐야만 할 것이다. 그의 본처는 꽃은 싫어하고 향수는 좋아한다.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도 꽃을 싫어하고 향수는 좋아하노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여인은 꽃을 좋아하고 향수는 질색이라고 고함을 지른다. 이제 그는 그녀 앞에 가서 꽃을 선물하며 향수는 집어 던진다.

 

다른 의미에서 두 마음을 품는 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를 질서 가운데 잡아두는 것은 요동치는 바다 물결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 흩어져버리고 없다. 한 조각은 대서양으로 흘러가겠지만 한 조각은 태평양으로 떠내려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요동친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그저 없다.

 

 

III. 결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죄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르길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한다. 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책망하며 권고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붙잡을 때 그리고 그것 안에 자신을 두게 될 때 우리는 안팎으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시험의 바다에 빠뜨리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시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을 시험의 바다로 몰아내며, 바람에 놀라 의심하여 빠져드는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판단과 정죄로부터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지 못함으로써 남들의 판단과 정죄에 자신의 순수성을 상실하며 비관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확증하라! 자신을 남들의 비난에서부터 보호하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배움에 자신을 못 박아야 된다.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고 말씀 안에서 교제하며 그 안에서 계시되는 그리스도로 확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의심가운데 거하는 자신을 발견케 될 것이다.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오늘날 수많은 기성교회의 신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지 않음으로 자기 구원의 문제를 시험에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서 의심가운데 자신을 방치함으로 의심의 신앙생활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히 말씀하실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얻기를 구하지 말라. 네 믿음을 확증하라!’

 

이제 여기 더 큰 꿈을 위해 미국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형제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자신이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유익한지, 교회에 머물면서 봉사를 행하는 것이 유익한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문제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될 것이다. 표를 예매하기 전에 차라리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기도하라. 스스로가 합법적이라 판단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시험과 죄로 이끌지 모를 행위에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니 그 자체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니는 죄의 유무를 논하기에 앞서 그저 의심 가운데 행동하였다는 그 사실이 죄가 되는 것이다.

갖고 싶었던 물품을 구입한 자매여! 그 물품을 사서 돌아서면서 이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의심하지 말라. 그 물품을 산 것이 죄가 되었든 아니든 의심 가운데 먹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다.

항상 자신의 행위를 적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곳에 자신을 두라.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란 확신을 찾도록 힘쓰라. 이로써 자신을 의심과 정죄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형제여!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판단 받지 말라. 너의 선한 것이 남들의 기준에서 틀리다는 이유로 비방을 받는 것에서 자신을 지키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4:16)

 

자신의 옳은 것이 남의 비방을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는 정죄에 빠져 자신의 옳은 일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판단한 후 남의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게 믿는 바를 실천하여 덕을 세우라. 그러했을 때 남의 비방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의심하면서 요동치는 바다로 던져짐을 모면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선한 것을 비방하지 않도록 삼가라.

 

 

IV. 적용1. 의심이 불러올 가공할만한 파괴력.

 

1) 의심은 두려움을 창조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24:38)

 

주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이 모여 주님을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주님은 살과 뼈는 없지만 자신이 부활하여 그들 앞에 있음을 보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순간 두려워하며 의심하였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갔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으셨다.

 

의심은 우리 안에 두려움을 창조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 안에 평강을 파괴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며 우리 생활과 환경을 보면서 낙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며 의심할 때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유령처럼 고개를 들고 우리를 사로잡는다. 자칫 이러한 두려움이 오래도록 우리 안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믿음의 침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침륜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는 검이 아니라 한 줄 단어들의 조합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무기력에 빠지며 모든 열심을 상실한다. 이런 침륜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에서 완전히 떨어지게 되곤 한다.

 

2) 의심은 불신앙의 씨앗이다.

 

의심의 결국은 불평과 불만과 불신앙이다. 이것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를 맴돌던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로 종종 등장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불평과 원망과 불만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여러 번 시험하였으며 진노하게 하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40년간 그들이 광야를 맴돌며 약속한 땅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질 것이라고 저주하셨다.

불신앙에 우리가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에 빠진 자들을 심판할 진노를 품고 계시다. 우리에게 약속한 좋은 언약과 약속들을 집어던지며 너는 내가 네게 주기로 결심한 축복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두려워하라!

 

3) 의심은 하나님 약속의 파괴자다.

 

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란 약속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심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며 정죄하며 판단하며 그것을 대적하여 싸움을 일으킨다. 이것은 의심하는 자의 마음에 도사리는 요동치는 바다이다.

보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의심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을 짓밟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 가운데서 떨어져나갔는가!

의심은 인류를 타락시킨 마귀의 가장 위대한 수작이었음을 기억하라. 역설적으로 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을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로 전락시킨다.

 

반면, 믿음은 소망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11:23)

 

또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0)

 

4) 의심은 시험의 시기에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14:28)

 

베드로의 의심은 스스로를 시험으로 내몰았다. 그 바다는 바로 베드로를 삼킬 바다였던 것이다. 베드로가 의심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를 시험에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시험의 시기에 직면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된다. 시험의 시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의 끈을 놓쳐버렸을 때 그는 반드시 시험에 빠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손을 잡지 못하고 시험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시험의 시기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믿음을 지키기 위해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자. 그리고 믿음으로 화합하자. 이것이 우리가 시험의 시기를 이기는 힘이 될 것이다.

 

 

V. 적용2. 우리가 의심에 빠지는 이유

 

우리 마음에 있는 의심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걱정과 염려, 근심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음에서 온다. 의심과 믿음의 부재는 모든 걱정의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일까.

 

1) 경험의 부족

그리스도 은혜의 체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한다고 해서 늘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금방 잊어버리며 영구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

정상적인 경험은 믿음의 완전한 동기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믿음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됨을 자신의 삶속에서 많이 경험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2) 현실에 잠식당함.

 

자신이 보는 현실적 환경에 지나치게 지배당함으로 해서 그 너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만다. 근시안적인 시각과 사고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장애에 갇히게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표면적인 것들로 인해 불신앙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못하고 모세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자기들을 이끌어낸 신이라며 금송아지를 빗어낸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강대함과 장성함을 보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땅이라고 폄하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표면에만 집착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눈이다. 의심으로 물든 죽음의 눈은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죽인다.

 

3) 믿음의 눈을 흐리는 이기심

 

이기심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이 성취되는 것에 집착함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을 접목할 방법을 찾지 못해 걱정을 야기한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다. 우리는 종종 너무 현실적인 조건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구체적인 요구와 필요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약속들로부터 위안을 얻지 못한다. 자신의 구체적인 요구와 필요, 그 세부적인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종종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자세로 자신의 생각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판단하는 온전한 결과가 참된 온전함이 아닐 수 있다. 참으로 내게 필요하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그분 보시 좋은 대로 우리에게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과 요구를 계속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님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드리자.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기대하는 답과 다른 답이 주어질 때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위험에서 구원을 받자.

 

4) 지나친 기대심리

 

기대하는 마음이 클 경우도 근심을 야기한다. 자신이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나 기대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이룬다는 확신을 얻지 못할 때 근심한다.

 

5) 조급한 마음

 

조급한 마음도 걱정을 유발시킨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내의 부재역시 근심을 야기한다.

 

6) 예기치 않은 변수

 

예기치 못한 변수에 대한 우려로부터 근심은 온다. 무엇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당황케 하는 어떠한 변수가 돌출하여 순항하는 문제를 어지럽게 만들고 두려워하는 결과에 가능성을 실어주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변수는 평안 가운데 있던 마음을 쉽사리 두려움과 불안과 의심을 일으킨다.

 

7) 하나님 뜻을 찾지 못함.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한다. 하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 일을 지시해주지 않으신다. 꿈에서 나타나 계시해주지 않으신다. 누군가의 교제를 통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확정지을 수 없다. 이렇게 사방이 막막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현실 안에서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기도 한다.

 

한편, 이런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원리들은 내면적인 장애와 더불어 환경적인 장애 모두 올 수 있다. 다시 말해, 환경적인 여건이 순조로움에도 내면에서는 불안해할 수도 있고 내면적인 여건이 순조롭다가도 환경적인 장애로 내면의 장애가 싹틀 수 있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내면적이고 환경적인 장애는 함께 우리에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환경적인 장애는 믿음의 부재 시 쉽게 내면의 장애를 크게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리적인 환경에 거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물리적인 환경을 시각으로 인지함으로 판단하고 사고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물리적인 실체의 영향력을 벗어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일반적 물리질서의 영향력을 뛰어 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며 믿지 못하는 자들의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고 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경험을 통한 체득, 성령 안에서의 기도, 무엇보다 말씀의 깊은 묵상을 통한 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VI. 적용3.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 믿음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을 믿는 믿음이다. 형제여! 지금 소원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음으로 의심하고 염려하고 있는가. 평안을 찾으라. 그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행하실 것이니 그것에 맡겨두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8)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23:13)

 

자매여! 지금 남모를 시련의 잔을 마시며 눈물을 머금고, 이 시련의 때를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이 때가 되면 눈물을 변하여 웃음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눈물과 고난, 시련과 갈등 그 모든 것이 당신을 파괴할 것처럼 달려들었으나 그 결국을 바라보라.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실상 하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친히 행하시고 허락하심으로써 선을 이루 실 것이다. 심지어 성도의 실패와 죄악마저도 그것이 분명 잘못된 것이며 징계를 부른 것이지만 그것을 바꾸어서 선을 이루는 것으로 합력하게 이끄신다.

욥은 어떠하였는가! 사단은 그를 궤멸시킬 것처럼 무섭게 시험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변케 하여 사단의 질투를 불사르고 욥으로 하여금 참된 순전함에 이르게 하고, 더 큰 축복을 누리도록 하지 않았던가.

그럼으로 고난 받는 그대여!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위로를 얻고 평안을 찾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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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8-25)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I. 주관하시는 자 되는 그리스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권세 있는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는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위에 계시다. 또한, 그리스도는 세상에 주신 모든 권세들을 통하여 세상에는 권세를 입고 주관하는 자가 있으며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음을 알게 해주신다.

인간에게 주신 권세와 상하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마땅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골로새서의 이 본문에서는 그러한 사실의 일례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교회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된다. 이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모형이다. 결과적으로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께로 나왔음으로 남편이나 아내나 모두 교회를 섬기며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된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함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을 발견한다. 남편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 긍휼인가 체험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은 성도가 그리스도께 복종함의 한 모형일 것이다.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해야 된다. 이는 인생의 가장 기본적인 섭리를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해야 됨을 보이시는 모형이 된다. 십계명의 첫 번째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 하나님만을 섬기며 복종해야 된다. 인간의 첫 번째 계명은 부모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의 모형이 그대로 부모란 모습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물의 창조자이며 모든 생명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복종하는 것처럼 우리 육체의 창조자가 되시며 생명을 주신 부모님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육체의 관계를 통한 반영이다.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 세상의 모든 권세는 주님께로부터 왔다고 하였다. 세상의 모든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태도로 권세 있는 자들을 섬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섬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체험하게 된다.

육신의 상전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섬김 속에서 계시되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재차 말씀하신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서 주님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든 권세의 질서 속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우리 본연의 의무를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다.

 

 

II. 사랑을 주는 자 되는 그리스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며 복종하고 더불어 모든 세상의 권세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의무를 실천하고 발견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의무인 사랑을 베풀게 된다.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의무를 기억해야 된다. 아내는 그리스도를 섬기듯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 이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의무를 지킴으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복종하게 된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의 한 모형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이기심이 죽은 완전한 이타주의의 사랑이다. 그리나 인간은 연약하다. 이기심을 버리고 완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끝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러한 연약한 우리의 사랑. 남편의 아내 사랑함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 절감하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실행하신다. 우리는 복종하며,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것이다.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다. 자식은 부모님께 순종하고 복종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복종과 순종을 모형으로 나타내듯 부모님은 자식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III. 각 사람의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그리스도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판단하신다. 우리는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님께, 부하의 입장에서 상전에게,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명령과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실천하는가.

부모님은 자식을 향해, 상전은 부하를 향해, 남편은 아내를 향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인간 사랑하심을 보이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섬기는 모든 섬김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것을 판단하시고 행위를 요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행위를 따라 보응해주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러한 보응은 사람의 관계에서도 보응 받음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받을 유업의 상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의 참 형상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함으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 그의 외모가 아름답고 남 보기에 좋아도 그가 섬김을 실천할 줄 모를 때 그는 불의를 행하는 자로 전락한다. 때로는 그가 눈 가림으로 섬기는 척을 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꼭 마음의 완전한 복종과 순종을 따라 섬기라는 의미로만 해석하기는 무리가 따른다. 다른 의미에서 우리 마음의 섬김이 다소 부족할지라도 우리는 행함에 있어서 자신을 꺾는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본질상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섬김은 완전치 못하고, 우리의 헌신 속에는 사실상 많은 이기심과 불평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우리 자신과의 싸움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내면에서 이러한 분쟁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행위를 굴복하는 것을 힘쓴다면 그것을 두고 단지 가식이나 눈 가림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주로 이렇게 강조하신다. (니 마음과 행위를 따라서가 아니라)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겠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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