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고서1장. 의심의 공격_2007.07.02
(약1: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I.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표지
II.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1)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의심하는 자는 어째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로 묘사되었는가.
3)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5)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어째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 규정케 하는가.
III. 결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죄이다.
IV. 적용1. 의심이 불러올 가공할만한 파괴력.
1) 의심은 두려움을 창조한다. 2) 의심은 불신앙의 씨앗이다. 3) 의심은 하나님 약속의 파괴자다.
4) 의심은 시험의 시기에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V. 적용2. 우리가 의심에 빠지는 이유
1) 경험의 부족 2) 현실에 잠식당함. 3) 믿음의 눈을 흐리는 이기심 4) 지나친 기대심리
5) 조급한 마음 6) 예기치 않은 변수 7) 하나님 뜻을 찾지 못함.
VI. 적용3.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I.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표지
(*표지; 인식할 수 있게 하는 표상적 또는 개념적 특성)
먼저, 이 본문은 믿음으로 구해야 될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의심가운데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정죄 받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특별히 야고보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을 정죄하며 믿음을 좇아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 본문 역시 믿음으로 구하는 행위에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사도 야고보는 믿음으로 구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반대되는 의심으로 구하는 행위의 조악함을 기술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의심으로 구하는 것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는 것이다.
둘째,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라는 것이다.
넷째, 이 사람의 모든 일에는 정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심하는 자’에 대한 사도 야고보의 참혹한 책망을 들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심하는 행위는 곧 죄악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있어 의심이란 것은 본질적인 신앙의 미덕인 믿음과 정면 대치되는 것으로써 이것은 마음을 나뉘게 하며 요동치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질서를 파괴시키고 하나님이 받으실 의로운 기준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의심은 죄악의 행위이며 이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께 구하는 바를 받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사실이다.
의심,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은혜 베푸실 것을 대적하는 진리이다. 이것은 바로 인류를 죄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시험받는 하와의 마음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심하는 자를 정죄하심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II.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
1)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실존과 약속, 진리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실존과 속성에 대한 정확히 이해가 없다면 그는 말씀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을 신뢰 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정상적인 믿음이란 것은 이성적인 접근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대상에 귀속된다. 우리가 오감과 지각을 통하여 대상을 판단함에 있어 그것을 스스로가 제시하는 논리를 따라 이해하고 판단함이 불가한 상태로 대상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은 것이다.
우리는 더러 전혀 생소한 이단 종파에 빠져든 광신도들을 보며 기이히 여기게 된다. 그러한 거짓된 진리에 그들이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놀랍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진리라고 판단되었으며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런 거짓 교리를 신봉하는 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대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판단하게 되면 계속적인 관계맺음과 접촉을 허락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연속적인 접촉은 그 대상에 대한 더욱 분명하고 확고한 신뢰를 유발시킨다. 독특하게도 사람은 계속적인 접촉을 하지 못하게 될 때 대상에 대한 의구심이 다시금 올라오기 마련이다. 인간의 지각은 계속적인 관계 맺음 속에서 대상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며 자신의 판단 안에서 형상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연속적인 관계 가운데 머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의미 안에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적인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믿음은 체험을 통해 확증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조금도 빗나감이 없음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더욱 분명한 신뢰와 인정을 하게끔 되어있다. 경험은 지식을 통한 신뢰에다 확증이란 인치심을 더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지식과 경험, 스스로의 판단에서의 확신과 확증은 대상에 대한 믿음을 충분히 유발시킨다. 이 믿음은 대상이 행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한다는 것은 의구심이 죽은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는 그 안에는 의심이 능력을 발휘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하는 바에 있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을 해주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계속적인 하나님과의 교감 안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할 뿐 아니라 명확한 신뢰 가운데 믿음을 돈독히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참으로 구하는 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너희 마음 가운데 확증하란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는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2) 의심하는 자는 어째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로 묘사되었는가.
단지 바다일 뿐 아니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이다. 바다는 본질적으로 잠잠하지만 바람이 불게 되면 출렁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파고를 치며 배를 삼키고 땅을 삼키기까지 한다. 고요한 바다를 성난 파도로 넘실거리게 바꿔놓는 힘이 바로 바람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홍수 때 심판의 물이 바람에 의해 극지방으로 몰려갔다고도 말씀하셨다. 곧, 바다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바람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이 요동치는 바다는 곧, 의심하는 자의 마음이다!
의심하는 자는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지킬 수 없다. 그는 어느 쪽으로 행동을 취해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며 무질서와 혼돈, 무지와 방황 아래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그의 마음을 붙잡아줄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그 결국 그의 의심이 불신앙이란 성난 파도가 되어 땅을 삼키고 발악하도록 방치한다. 그의 의심과 불신앙이 그를 신앙의 땅에서 삼키고 몰아낼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요동하는 바다의 물살에 휩쓸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가 똑바로 서서 내딛을 수 있는 믿음의 땅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의심하는 자의 출렁이는 마음에는 두 가지의 바람이 분다. 첫째, 외부로부터 부는 바람에 요동친다.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된 교리들, 세상의 유혹, 이웃으로부터 받는 핍박 등이 이것이다. 둘째, 자신의 내면에서 부는 바람으로 요동친다. 곧,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구심, 육신의 소욕을 좇으려는 이기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 등이다.
이 모든 바람이 의심하는 자의 마음의 바다에 불어 닥쳐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꽁꽁 얼어 붙여버릴 극지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의 마음에는 항상 두 가지의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그 바람을 막을 어떤 방패막이가 없다. 그는 혼란스러워한다. 어디에 자신의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한다. 그는 불안하다. 그는 두렵고 무서워한다. 그는 곤혹스러워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그 바람을 막지 못한다면 결코 그의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확증하며 무엇이라고 하셨던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때 베드로는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그리스도를 보며 주님을 시험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시험의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의심함으로써 시험의 바다 가운데 자신을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손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의 마음은 무섭고 두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의심하였기 때문이다. 의심은 스스로를 시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기억하라!
3)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절은 의심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것임을 확증시켜주고 있다. 앞서의 구절까지는 의심하는 자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민망한 눈길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눈에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요동치는 바다 물결처럼 천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어떻게 심판할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란 모든 기대와 소망을 그만 접으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미움을 살 것이란 것이다.
‘악한 인간도 자신의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런 주님께서 이 의심하는 자를 향하여서는 ‘내가 아무 것도 네게 줄 것이 없다. 너에게는 어떤 분깃도 없도다. 너는 내 진노를 샀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찌하여 의심하는 자는 이토록 하나님의 정죄와 미움을 사는 것인가.
첫째, 그는 의심 가운데 거함으로 자신이 구하는 바의 명확한 목적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옳은 것인지 스스로가 분별할 수 없다면 자신이 무엇을 구해야 되며 얻어야 될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저기 어린 소년을 보라. 그는 어머니의 심부름을 따라 마트에 물품을 사러 갔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사야하는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구해야할 것이란 말인가. 그는 확신할 수 없고 의심할 것이다. 그럼으로 그는 아무 것도 사지 못하거나 막돼버린 것을 사버리고 어머니께 꾸중을 들어야 될 것이다.
둘째, 의심하는 자가 구하는 것은 죄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혹 죄가 될 것인지 선이 될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확증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가 그것을 결정하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되었을 때 자칫 그는 죄로 귀속되는 어떠한 행위에 자신을 맡겨버릴 위험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의심 가운데 죄를 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의심 가운데 행하는 것은 자신을 시험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하와를 보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였다. 그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한 채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범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고 말았다. 하와는 의심 가운데 행하는 자신을 취하고 마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력히 권면하신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14:23)
인류의 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바로 하와의 마음 가운데 피어오른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하와의 의심은 명확치 않은 판단에 자신을 내맡기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완전한 범죄가 되어 하와의 영생을 속이고 죽여 버렸다. 우리가 의심 가운데 무엇인가를 취할 때 우리는 범죄 하게 되는 것이다. 위험에 우리를 방치하고 자신을 시험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심가운데 행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4)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문이 말하는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려는 목적과 의도,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이 취해야할 어떤 행동을 찾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를 확신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얻고자하는 바를 확증하지 못하고 있음에 따라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 구함과 동시에 의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고, 방향을 잡지 못한다. 그는 그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그를 짓누르는 갈등과 괴로움만이 그 영혼 위에서 미소 짓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라는 말씀에 우리가 거하지 못할 때, 실상 대부분 우리는 두 마음을 품는 것에 머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될 것인가. 이제 하나님께 여쭤보아야만 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취해야할 것인지를 말이다. 내가 확신함으로 행동 할 수 있도록 구해야 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5)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어째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 규정케 하는가.
마음은 모든 행위의 동기이다. 그의 마음이 두 마음을 품고 정함이 없다면 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이 확신하는 올바른 기준을 따라 일관된 행동을 취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명의 절름발이가 있다. 그는 선천적으로 오른다리가 왼다리보다 짧다. 그러므로 그의 걸음걸이는 항상 삐뚤어지고 불안해지고 만다. 그가 잘못 걸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한 쪽 다리가 더 짧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디를 가든지 제대로 걷지 못한다. 그의 걸음걸이는 모든 곳에서 정함이 없이 절뚝거릴 뿐이다.
두 명의 여인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본처도 사랑하지만 그의 두 번째 여자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함이 없는 불완전한 사랑이다. 그는 두 여인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정함 없이 분주하고, 서로 상충되는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요동쳐야만 할 것이다. 그의 본처는 꽃은 싫어하고 향수는 좋아한다. 그는 그녀 앞에서 자신도 꽃을 싫어하고 향수는 좋아하노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여인은 꽃을 좋아하고 향수는 질색이라고 고함을 지른다. 이제 그는 그녀 앞에 가서 꽃을 선물하며 향수는 집어 던진다.
다른 의미에서 두 마음을 품는 자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를 질서 가운데 잡아두는 것은 요동치는 바다 물결 속에서 산산이 조각나 흩어져버리고 없다. 한 조각은 대서양으로 흘러가겠지만 한 조각은 태평양으로 떠내려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요동친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그저 없다.
III. 결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죄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르길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한다. 또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책망하며 권고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을 붙잡을 때 그리고 그것 안에 자신을 두게 될 때 우리는 안팎으로 불어오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시험의 바다에 빠뜨리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의심하고 시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을 시험의 바다로 몰아내며, 바람에 놀라 의심하여 빠져드는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판단과 정죄로부터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지 못함으로써 남들의 판단과 정죄에 자신의 순수성을 상실하며 비관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확증하라! 자신을 남들의 비난에서부터 보호하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배움에 자신을 못 박아야 된다.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고 말씀 안에서 교제하며 그 안에서 계시되는 그리스도로 확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의심가운데 거하는 자신을 발견케 될 것이다.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오늘날 수많은 기성교회의 신자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지 않음으로 자기 구원의 문제를 시험에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서 의심가운데 자신을 방치함으로 의심의 신앙생활을 먹고 마시며,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히 말씀하실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게 얻기를 구하지 말라. 네 믿음을 확증하라!’
이제 여기 더 큰 꿈을 위해 미국 유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형제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자신이 유학을 다녀오는 것이 유익한지, 교회에 머물면서 봉사를 행하는 것이 유익한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문제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답을 얻기 위해 기다려야 될 것이다. 표를 예매하기 전에 차라리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기도하라. 스스로가 합법적이라 판단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시험과 죄로 이끌지 모를 행위에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니 그 자체로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니는 죄의 유무를 논하기에 앞서 그저 의심 가운데 행동하였다는 그 사실이 죄가 되는 것이다.
갖고 싶었던 물품을 구입한 자매여! 그 물품을 사서 돌아서면서 이것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의심하지 말라. 그 물품을 산 것이 죄가 되었든 아니든 의심 가운데 먹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다.
항상 자신의 행위를 적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그곳에 자신을 두라. 자신의 행위가 올바른 것이란 확신을 찾도록 힘쓰라. 이로써 자신을 의심과 정죄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형제여!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판단 받지 말라. 너의 선한 것이 남들의 기준에서 틀리다는 이유로 비방을 받는 것에서 자신을 지키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롬14:16)
자신의 옳은 것이 남의 비방을 인해 스스로를 의심하는 정죄에 빠져 자신의 옳은 일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판단한 후 남의 걸림이 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게 믿는 바를 실천하여 덕을 세우라. 그러했을 때 남의 비방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의심하면서 요동치는 바다로 던져짐을 모면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선한 것을 비방하지 않도록 삼가라.
IV. 적용1. 의심이 불러올 가공할만한 파괴력.
1) 의심은 두려움을 창조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24:38)
주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이 모여 주님을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주님은 살과 뼈는 없지만 자신이 부활하여 그들 앞에 있음을 보이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순간 두려워하며 의심하였다.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바다 위로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들어갔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으셨다.
의심은 우리 안에 두려움을 창조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 안에 평강을 파괴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며 우리 생활과 환경을 보면서 낙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며 의심할 때 우리 안에는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유령처럼 고개를 들고 우리를 사로잡는다. 자칫 이러한 두려움이 오래도록 우리 안에 머물게 되면 우리는 믿음의 침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침륜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에게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는 검이 아니라 한 줄 단어들의 조합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무기력에 빠지며 모든 열심을 상실한다. 이런 침륜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에서 완전히 떨어지게 되곤 한다.
2) 의심은 불신앙의 씨앗이다.
의심의 결국은 불평과 불만과 불신앙이다. 이것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광야를 맴돌던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로 종종 등장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불평과 원망과 불만과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여러 번 시험하였으며 진노하게 하였다. 이로써 하나님은 40년간 그들이 광야를 맴돌며 약속한 땅을 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엎드러질 것이라고 저주하셨다.
불신앙에 우리가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신앙에 빠진 자들을 심판할 진노를 품고 계시다. 우리에게 약속한 좋은 언약과 약속들을 집어던지며 ‘너는 내가 네게 주기로 결심한 축복들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두려워하라!
3) 의심은 하나님 약속의 파괴자다.
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파괴시킨다. 그렇지 않다면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란 약속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심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며 정죄하며 판단하며 그것을 대적하여 싸움을 일으킨다. 이것은 의심하는 자의 마음에 도사리는 요동치는 바다이다.
보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의심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을 짓밟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 가운데서 떨어져나갔는가!
의심은 인류를 타락시킨 마귀의 가장 위대한 수작이었음을 기억하라. 역설적으로 의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을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로 전락시킨다.
반면, 믿음은 소망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11:23)
또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4:20)
4) 의심은 시험의 시기에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베드로의 의심은 스스로를 시험으로 내몰았다. 그 바다는 바로 베드로를 삼킬 바다였던 것이다. 베드로가 의심하지 않았다면 그는 스스로를 시험에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시험의 시기에 직면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더욱 빛을 발휘하게 된다. 시험의 시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의 끈을 놓쳐버렸을 때 그는 반드시 시험에 빠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손을 잡지 못하고 시험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사단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청구하였으나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라고 말씀하신다. 시험의 시기에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 믿음을 지키기 위해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자. 그리고 믿음으로 화합하자. 이것이 우리가 시험의 시기를 이기는 힘이 될 것이다.
V. 적용2. 우리가 의심에 빠지는 이유
우리 마음에 있는 의심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걱정과 염려, 근심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이루어지지 않음에서 온다. 의심과 믿음의 부재는 모든 걱정의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는 것일까.
1) 경험의 부족
그리스도 은혜의 체험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경험을 한다고 해서 늘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금방 잊어버리며 영구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
정상적인 경험은 믿음의 완전한 동기가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믿음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됨을 자신의 삶속에서 많이 경험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2) 현실에 잠식당함.
자신이 보는 현실적 환경에 지나치게 지배당함으로 해서 그 너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고 만다. 근시안적인 시각과 사고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장애에 갇히게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표면적인 것들로 인해 불신앙에 빠지곤 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못하고 모세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자기들을 이끌어낸 신이라며 금송아지를 빗어낸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의 강대함과 장성함을 보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땅이라고 폄하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표면에만 집착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눈이다. 의심으로 물든 죽음의 눈은 모든 하나님의 능력을 죽인다.
3) 믿음의 눈을 흐리는 이기심
이기심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뜻과 소원이 성취되는 것에 집착함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을 접목할 방법을 찾지 못해 걱정을 야기한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다. 우리는 종종 너무 현실적인 조건들을 바라본다. 자신의 구체적인 요구와 필요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약속들로부터 위안을 얻지 못한다. 자신의 구체적인 요구와 필요, 그 세부적인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종종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자세로 자신의 생각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가 판단하는 온전한 결과가 참된 온전함이 아닐 수 있다. 참으로 내게 필요하신 것을 아시는 주님을 믿는다면 그분 보시 좋은 대로 우리에게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과 요구를 계속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님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드리자.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기대하는 답과 다른 답이 주어질 때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는 위험에서 구원을 받자.
4) 지나친 기대심리
기대하는 마음이 클 경우도 근심을 야기한다. 자신이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나 기대하는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이룬다는 확신을 얻지 못할 때 근심한다.
5) 조급한 마음
조급한 마음도 걱정을 유발시킨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내의 부재역시 근심을 야기한다.
6) 예기치 않은 변수
예기치 못한 변수에 대한 우려로부터 근심은 온다. 무엇인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당황케 하는 어떠한 변수가 돌출하여 순항하는 문제를 어지럽게 만들고 두려워하는 결과에 가능성을 실어주는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변수는 평안 가운데 있던 마음을 쉽사리 두려움과 불안과 의심을 일으킨다.
7) 하나님 뜻을 찾지 못함.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근심한다. 하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 일을 지시해주지 않으신다. 꿈에서 나타나 계시해주지 않으신다. 누군가의 교제를 통해서도 명확한 결론을 확정지을 수 없다. 이렇게 사방이 막막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다는 현실 안에서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기도 한다.
한편, 이런 걱정과 근심, 두려움의 원리들은 내면적인 장애와 더불어 환경적인 장애 모두 올 수 있다. 다시 말해, 환경적인 여건이 순조로움에도 내면에서는 불안해할 수도 있고 내면적인 여건이 순조롭다가도 환경적인 장애로 내면의 장애가 싹틀 수 있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내면적이고 환경적인 장애는 함께 우리에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환경적인 장애는 믿음의 부재 시 쉽게 내면의 장애를 크게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리적인 환경에 거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물리적인 환경을 시각으로 인지함으로 판단하고 사고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물리적인 실체의 영향력을 벗어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일반적 물리질서의 영향력을 뛰어 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며 믿지 못하는 자들의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걱정과 근심,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고 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경험을 통한 체득, 성령 안에서의 기도, 무엇보다 말씀의 깊은 묵상을 통한 계시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VI. 적용3. 우리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 믿음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을 믿는 믿음이다. 형제여! 지금 소원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음으로 의심하고 염려하고 있는가. 평안을 찾으라. 그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행하실 것이니 그것에 맡겨두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8)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욥 23:13)
자매여! 지금 남모를 시련의 잔을 마시며 눈물을 머금고, 이 시련의 때를 버틸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이 때가 되면 눈물을 변하여 웃음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눈물과 고난, 시련과 갈등 그 모든 것이 당신을 파괴할 것처럼 달려들었으나 그 결국을 바라보라.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실상 하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친히 행하시고 허락하심으로써 선을 이루 실 것이다. 심지어 성도의 실패와 죄악마저도 그것이 분명 잘못된 것이며 징계를 부른 것이지만 그것을 바꾸어서 선을 이루는 것으로 합력하게 이끄신다.
욥은 어떠하였는가! 사단은 그를 궤멸시킬 것처럼 무섭게 시험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변케 하여 사단의 질투를 불사르고 욥으로 하여금 참된 순전함에 이르게 하고, 더 큰 축복을 누리도록 하지 않았던가.
그럼으로 고난 받는 그대여! 변치 않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위로를 얻고 평안을 찾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