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범위; 삼상 13- 20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18:3-4)

 

 

 

 

 

 

 

I. 문맥을 통한 본문해석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맹한 자 요나단

2) 아브넬과 자신의 무기력을 본 요나단

3) 다윗을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요나단

4)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윗을 발견한 요나단

5) 언약의 증표로 군장을 주었을 가능성.

6) 본문에서 제외되었지만 반드시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삼상181!

7) 결론; 영적 통찰력의 소유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의의 사람 요나단

 

 

II. 본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1)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2) 사랑함으로 어떻게 언약이 맺어질 수 있는가.

 

 

 

 

 

 

 

 

 

 

 

 

I. 문맥을 통한 본문해석

 

우리가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고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며, 더불어 자신의 군장마저 주는 요나단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의 배경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용맹한 자 요나단

 

사무엘상 13~14장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과 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철공들을 잡아간 상태였으므로 이스라엘은 변변찮은 무기조차 없는 조악한 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장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요나단은 자신에게 속한 병기 잡은 자들을 이끌고 과감히 블레셋 진영으로 기습침투작전을 펼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용맹하며 도전적인 요나단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기습에 앞서 병기 잡은 자들에게 했던 말 곧,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란 선포는 그의 건전한 신앙을 보여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담은 도전적인 말로써 병기 잡은 자들의 마음을 격동케 하고 담대케 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과 신의의 사람 요나단을 여기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아브넬과 자신의 무기력을 본 요나단

 

그러나 골리앗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용맹한 요나단의 모습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이름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군대장과 아브넬도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며, 블레셋 진영에 소수의 병기 잡은 자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펼칠 만큼 용맹무도한 요나단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어떠한 용맹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이러한 이스라엘의 무기력과 용맹을 상실한 상태는 요나단의 마음에 큰 상심을 주었을 것이다. 더구나 요나단 자신 역시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과 용맹으로 골리앗과 맞서 싸우기 위해 뒤쳐나갈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깊은 좌절감과 상실감을 맛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나단에게 있어 매우 치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하며, 신앙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일련의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자신을 추슬러 용맹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지극히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뜨거운 심장으로 용맹을 발휘하여 군장도 없이 나아가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모습을 보고 큰 감격과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는 자연히 다윗이 승전하고 복귀하였을 때 그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고, 더불어 언약을 맺고 자신의 군장까지 내어줄 만큼 강렬한 감동이었다.

 

 

3) 다윗을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요나단

 

또한, 요나단이 자신의 군장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점은 다윗을 참으로 사시는 여호와의 참된 용사로 인정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자신보다도 더 다윗을 하나님의 용사로 높이여기는 태도이기도 하다. 요나단은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는 멋진 군장과 병기를 들고 있었지만 조금도 여호와를 위해서 용사가 되어 나가싸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군장하나 없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의 감동됨으로 나아가 때려눕혔다. 당연히 요나단은 그런 작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다윗을 보고 그를 가장 위대한 용사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자신이 소유한 군장을 마땅히 다윗이 차지해야할 것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요나단만이 다윗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경외심을 드러냈다는 것은 요나단이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앙의 건전한 상태에 깨어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다윗의 용맹을 보고 경악했을 뿐이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다윗을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가기에 앞서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이미 하나님의 신에 감동을 받은 상태에 있었다.

 

4) 하나님의 신이 임한 다윗을 발견한 요나단

 

요나단이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감동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고 용맹을 발휘해 골리앗을 이기는 모습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또 하나 골리앗이 나타나기 전 자신의 아버지 사울왕의 계속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그를 부리는 모습을 보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성경을 읽으면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신에 감동된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 바로 다음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음을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울왕에 임한 하나님의 신이 다윗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왕에게 임한 하나님의 신이 떠난 상태에서 이제 그 신의 감동됨이 다윗에게 임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이점은 다윗이 장차 사울을 계승하여 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것과 더 크게는 하나님의 역사의 후계자가 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요나단은 사실상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 다윗을 발견하고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무엘상 20장에서 요나단이 다윗을 떠나보내며 언약을 재확증할 때 그가 자신에게 여호와의 인자가 임하도록 기도해 줄 것과 자신의 집 후손들을 끊어버리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5) 언약의 증표로 군장을 주었을 가능성.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나가기에 앞서 그는 먼저 사울과 면담하였다. 사울은 소년 다윗이 어리므로 당연히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려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양을 치면서 짐승을 잡은 이야기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며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피력했다. 이로써 사울에게 신뢰를 얻었고, 사울은 그런 다윗을 내보내며 자신의 군장을 내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시험 삼아 입어보고는 맞지 않아 벗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광경을 요나단이 보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요나단은 이미 소년 다윗에게 군장이 어울리지 않고 맞지 않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이 자신의 군장을 다윗에게 주었다는 점은 그의 군장을 다윗이 입고 전쟁을 할 것을 염두한 행위가 아닐 것이란 것이다.

, 요나단의 이러한 행위는 앞서 다윗과 언약한 것에 대한 자신의 확증과 신뢰를 다윗에게 보여주는 증표와 비슷한 행위였을 것이란 것이다. 이는 또한, 다윗을 믿고 사랑하며 그를 좇을 것이라는 요나단의 결단을 다윗에게 보여주는 신뢰를 표면적으로 증거해 보이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6) 본문에서 제외되었지만 반드시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는 삼상181!

 

특별히 본문에 해당하는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고 언약을 맺으며, 군장을 주는 과정에는 사무엘상 181절이 계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약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복귀하였을 때 사울왕은 다윗을 불러 그의 출신을 물어본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자기 생명같이 사랑함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이 구절이 중요한가는 다음의 이유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사울의 악신을 쫓기 위해 수금을 타는 자로 왕궁을 출입하고 있었다. 이것은 요나단이 다윗의 신상을 이미 전해들은 바 있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다윗이 항시 왕궁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베들레헴의 아비집과 왕래하는 가운데 있었음으로 요나단은 실제로 다윗을 그 전까지는 보지 못했거나 보았더라도 다윗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모를 소년이 거인을 무찌르고 돌아왔을 때 감동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사울왕의 악신을 쫓던 그 소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면 어떠했겠는가! 요나단은 악신을 쫓던 신에 감동된 수금 치던 소년이 참으로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또한, 그가 하나님의 후계가자 될 것임을 확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요나단으로 하여금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7)결론; 영적 통찰력의 소유자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의의 사람 요나단

요나단은 다윗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계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왕자됨을 포기하고 왕위 계승을 온전히 다윗에게 양보한 겸손과 하나님 경외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다윗을 보호하고 옹위함으로써 신의의 사람임을 잘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얼마나 건전한 영혼의 소유자였는지 증거해준다.

 

 

II. 본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1)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이것은 신뢰를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동시에 제일 먼저 한 것이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은 것이었다. 언약을 맺음은 상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한 신뢰를 소유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이것은 경외와 섬김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군장을 그에게 주는 경외와 섬김을 드러내었다. 자신의 무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신뢰의 표현이자 그 안에 그를 여호와의 용사로 섬기려는 섬김과 경외심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섬김과 경외를 수반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보호와 변호를 통해 이해된다. 다윗을 질투하고 죽이려는 사울에게서 요나단은 다윗의 무죄함과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끊임없이 변호하고 증명해보이려 수고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보호와 변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이것은 상대를 위해 상대의 소원도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채워주고 싶은 열망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사울왕의 죽음위협으로 기로에 선 다윗을 위로하며 그의 소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이 이뤄주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소원을 채워주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다섯째, 이것은 상대를 위해 죽음을 불사를 수 있음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의 다윗에 대한 사랑과 태도는 그가 다윗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우리에게 호소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죽음조차 이길 수 없는 사랑을 소유한 것이다.

여섯째, 이것은 변치 않는 약속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떠나보내며 다시금 그와 맹세함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변치 않는 언약을 세우게 하는 것이다.

일곱째, 이것은 상대의 안전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요나단은 다윗의 신변을 보호해주고 그가 후계자에 오를 수 있도록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그를 숨겨주고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완전한 안전과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소망을 가진 것이다.

열 번째, 이것은 상대를 대적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음모를 매우 악하게 여겼으며, 그러한 사울의 악의를 책망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어떤 대적하는 세력도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열한 번째, 이것은 상대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며 함께 우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은 다윗의 고난을 자신의 고통처럼 슬퍼하며 괴로워했고, 울어주었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을 함께 하는 그 자체를 통해 증명된다.

열두 번째, 이것은 자신의 영광을 친히 상대에게 양보하는 것을 통해 이해된다. 요나단의 자신의 왕위계승을 기꺼이 포기하고 다윗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지원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욕이 굴복한 것을 포함한다.

열세 번째,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의 한 모형으로 인정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명같이 하나님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써 십자가의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였고, 하늘의 왕좌를 포기하고 낮은 곳에 자신을 굴복하실 수 있었다.

 

 

2) 사랑함으로 어떻게 언약이 맺어질 수 있는가.

언약은 상대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뢰는 언약의 필수조건이다. 이 신뢰는 그 중에서 부부간의 신뢰, 가족 간의 신뢰가 가장 깊고 진득한 신뢰로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의 공통점은 바로 사랑으로 연합된 그 안에 있는 신뢰란 점이다. 결국 사랑 안에 있는 신뢰는 그 어떤 신뢰보다도 깊고 강렬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는 얼마든지 언약이 맺어질 수 있다.

부부는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맺는다. 부모와 자식은 영원한 가족의 언약을 맺는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는 반드시 언약이 체결되며 성취되기 마련이다. 사랑 안에서는 은연중에 모든 것이 신뢰와 언약으로 묶여져있다.

보라! 어머니는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기꺼이 용돈을 내어준다. 아이들은 부모님께 언제든지 자신의 신분증을 맡겨둔다. 가족은 구성원들이 어느 시간이든 임의로 집안을 출입하는 것을 조금도 의심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는 어느 누가 허튼 짓을 할 것처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한가! 바로 사랑함으로 신뢰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가족 간의 부부간의 또 수없는 언약들이 채워져 있다.

가족들은 은연중에 이미 그들이 영원히 한 가족이란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프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부부는 은연중에 그들이 서로만을 사랑할 것이란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자기를 죽기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언약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 죄악 된 세대에서 끝없는 신뢰의 부서짐과 언약의 파괴됨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들은 서로 다른 비상금을 모은다. 자식은 부모를 속여 죄악을 지으러 나다닌다. 아내는 남편에게 통장을 공개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에게 어젯밤 왜 새벽에 귀가했는지 솔직해지지 않는다. 어떤 부부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외도를 하지 않았는지 의심하며 다툰다. 자식들은 부모들이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고 있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간섭과 반대를 행사하는 장애물이라고만 여긴다. 이것이 모든 것이 불법인 것이다.

한편, 참된 사랑 안에서 신뢰와 언약을 소유한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사랑으로 죄인을 향한 신뢰를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구원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다시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과 신뢰를 우리를 향한 사랑 안에서 나타내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도록 하신 것이다. 이 언약은 변치 않는 언약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 안에 있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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