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_2010.03.27

1. 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2. 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3. 아담과 하와의 갈등

4. 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5. 적용

1)개인적인 적용

2)교회적인 적용

5:22-33 하나님과 교회의 사랑, 그리고 순종

시작과 끝이 없으신 영원한 한 분이 계셨다.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알려주신 그 분은 자신의 영원 속에서 기묘한 일을 시작하셨다. 바로, 창조였다. 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많은 개념들이 나타났다. 빛과 어둠, 위 아래, 모여짐과 드러남, 종류, 계절과 일자, 주관, 날다, 번성, . 그것들은 영원 속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작업을 통해 나타났다.

많은 창조물 중 하나님은 매우 도전적이고 기발한 창조를 시도했다. 바로 아담이었다. 유일하게 그에게는 하나님을 닮은 영이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유일할 뿐이었다. 이는 하나님을 유쾌하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혼자 서있는 아담의 모습이 홀로 있는 여호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리 만드신 여자를 아담의 갈빗대를 통해 실현시켰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같은 영을 소유했고, 그들은 같은 몸에서 나왔으며, 그들이 서로 깊이 사랑하길 원하셨다.

1.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민망하게 만든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

홀로 있는 아담을 외면하고 하와를 주지 않는 하나님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랑은 존재의 필요성을 가장 정직하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궁극적인 동인과 목표는 바로 교회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다른 것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하신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더 명백해졌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를 통해 교회가 탄생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고, 마귀로 말미암아 야기된 죽음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시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사랑임을 증명하셨다.

그 사랑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길 원하셔서 주름이나 흠이 없이 거룩하길 원하신다.

교회의 애칭은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가 신부인 이유는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가장 큰 기쁨은 무한한 사랑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의 가장 큰 영광이다. 그렇다고 신부에게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적인 증거를 보일 수 없다. 사랑을 받는 신부는 필연적으로 순종적이 된다.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잠잠히 말하며, 겸손해지며, 그 어떤 거스르는 말로 신랑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다.

바로 그것이 완전한 사랑을 하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한 교회를 향한 이상적 모형이다.

죽기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 그 사랑을 한없이 공급받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 교회.

2.아담은 하와를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당신은 아담인가? 아니면 하와인가? 아담과 하와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과 교회의 그림자다. 이것을 32절에서는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공언한다. 그리고 이어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명령하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교회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길 원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자만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가정이라는 특별한 공동체, 남편과 아내의 위치와 질서,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통해 하나님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기 원하셨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의 위치에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순종해야 할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3.아담과 하와의 갈등

아담은 자기 몸처럼 하와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나의 아내의 허물과 잘못을 그냥 너그럽고, 온유하게 모두다 받아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뭔가 불평하며 아내를 책망하고 싶다. 아내는 나를 충분히 이해해주지 못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와를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아담은 눈을 뜬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를. 하나님이 흠있고, 허물 많은 교회를 얼마나 처절하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얼마나 자주 불순종하며, 교만하며, 말대꾸를 하며, 변명을 늘어놓는지.

하와는 아담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말이 복종이지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니 아담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의 냉소적인 한 마디는 자주 내 마음을 도려낸다. 그는 도대체 나를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걸까?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준 계명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복종하라니.

그 순간 하와도 눈을 뜬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 얼마나 깊은 경외와 사랑에서 부터 비롯된 것이었는지. 교회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하고 있는지.

4.아담과 하와가 함께 바라봐야 할 곳.

아담과 하와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서로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책망해야 할까? 아니다. 정말 그들이 상기해야 될 것은 하나님은 얼마나 신실하게 사랑하시는 분인가이며, 그리스도는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복종했는가이며, 그럼에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써 얼마나 소홀했는지 생각해야 한다.

아담이 하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대신,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대신, 아담과 하와는 함께 교회의 위치로써 하나님 앞에 교회의 의무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고전 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5.적용

적용1) 개인적인 적용

남편과 아내들에 대한 말씀을 보면서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남편과 아내 각자에 대한 의무를 감시하는 것이 될 때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의무이다. 가정도 그 자체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나도 나의 리브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30살이 되도록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적이 없다.‘좋아한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코 사랑한다.’는 말은 할 자신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다. , 나의 리브가는 나를 존경해줄까? 그것도 왠지 자신이 없다.

사실 나는 사랑할 자격도 존경을 받을 자격도 없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한다. 내게 주어진 사랑의 의무를 노력해야 하고, 리브가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 교회의 위치로써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봐야 할 것인데 그것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다. 머리는 너무 앞서 자랐지만 실천할 능력이 없기에 아직 내게 리브가를 주시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슬퍼하진 않는다. 자격 없이 얻는 것은 불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며, 홀로 있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냥 그것이 좋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두렵다. 나는 강해보이는 척하지만 실은 조금도 강하지 않은 것이다.

적용2) 교회적인 적용

교회 안에서 형제들이 아내의 머리 위치에 있음으로 앞에서 주도적으로 일한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위치에서는 아내처럼 형제도 복종해야 한다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에 많은 형제들이 앞서 일하다 교만에 빠져 교회를 대적하며, 돌아선다. 자기 아내가 순종하지 않는 것은 말씀을 어긴 것이라 질책하면서 정작 자신은 교회의 위치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는 불순종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 안에는 아내에 대한 존중과 경외도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상하 수직의 관계에서 아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내의 의견도 존중해야 되며, 아내의 권리도 존중해야 된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 대한 순수한 경외를 동반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가 반성하고 고쳐야할 잘못조차 용인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냥 토라지는 것으로 남편의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그것이 이기심이란 것과 남편의 의무를 잘못 사용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방식에 길들여지면 그 남편은 병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 역시 남편을 사랑할 의무가 있는데 이 사랑이란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야할 남편의 입장을 생각할 때, 남편이 자신의 의무를 올바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는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나친 순종이 변질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남편의 태도까지 순종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 신앙을 져버리거나 교회와 등질 때 순종하는 아내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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