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 길갈!_2012.02.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

 

(여호수아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 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출애굽의 1세대들은 광야에서 쓰러졌다. 그들은 갈망했다. 바로의 학대로부터 구원받기를그러나 정작 애굽을 벗어나자 그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광야의 초라함.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했다. 오직 좋았던 것만. 참외, 고기, 부추. 잔인한 고통은 숨긴 채. 가나안 정탐을 실패하면서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어쩌면 출애굽의 1세대들은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아 비참한 죽음으로 끝난 비운의 세대였다. 그들은 애굽에 머물면서도 노예이자 종의 신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벗어나자마자 불순종과 불신앙의 노예가 되어 광야의 종살이를 하고 말았다. 그들처럼 비극적인 세대가 또 있을까?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와 출애굽의 2세대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불순종으로 광야의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던 징계의 쓴 잔을 다 채우고, 그 비극의 시간 동안 중단되어 버린 할례가 재개되었다. 그들은 다시 회복되었다. 구별된 증표를 다시 실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난 광야의 오랜 세월 중단되어버린 할례를 재기할 것을 명하셨다. 그들은 다시 구별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야 너희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도다.’

 

애굽을 벗어나서도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날 때까지 애굽의 수치는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 어째서? 바로,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이었다. 사실 출애굽기 1세대들에게 있어 불순종과 불신앙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1세대들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갚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째로 그것과 맞바꾸었다. 가장 슬픈 비극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야 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애굽의 흔적,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 애굽의 정신, 불신과 불순종. 모든 수치들이 걷어차였다. , 애굽의 수치. 바로 노예근성이다. 사실 출애굽의 1세대들은 간절히 출애굽을 소원하였지만 정작 그 애굽을 벗어났을 때 돌이켜 애굽을 그리워했다. 노예의 신분이 죽고 싶을 만큼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애굽을 나와서는 광야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보고 하나님을 불신했다. 그들은 매번 애굽을 재차 그리워했다. 그 수치와 모욕의 신분은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먹었던 외와 부추와 고기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항상 그렇다. 현재의 좋은 것은 망각하려고 하고, 안 좋은 것은 과거의 좋은 것과 비교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과거의 쓴 것은 또, 망각하고 있다. 철저한 모순과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모한 소모를 반복한다.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독 의미 깊게 다가오는 이유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끈질기게 그 이면에서는 노예적인 기질과 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출애굽의 1세대들. , 노예의 때를 그리워하던 쪼다 병신 같은 모습.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1세대들은 결코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광야에서 소멸됨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은 세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수치의 세대.

 

그 무모한 세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야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 세대가 왔다.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는 세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진 세대. 가나안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도전정신으로 무장된 세대. 그들이 선 땅이 길갈이었다. 이제야 그 수치스러운 종의 근성, 노예의 기질을 벗어던지고 용맹하고 진취적이며 믿음으로 쟁취할 자들.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세상에서 벗어난 세대.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 종의 삶을 벗어난 세대. 그러나 어느 세대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비극의 운명을 벗어나자 마자 다시 비극을 맞이하는 세대? 그렇지 않으면 길갈에 선 당당한 그리스도인?

 

어리석고 무모한 나는 여전히 내 삶의 많은 장소에서 길갈이 아니다. 여전히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지 않았다. 벗겨지지 않은 노예 근성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불찰하고 그러면서 광야를 돌고 있는 수치. 여전히 길갈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너무나 길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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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지 않는 예수_2012.01.2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6.)

 

(에베소서6: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 즉,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의무였다. 그리고 신약시대 이제 모든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친히 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이제 사랑에 대해 새로운 표준이 나타났다.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뜨거운 열망은 구약시대 성막을 통해 재현되었지만, 이제 신약시대 친히 육체의 모양으로 인간들 가운데 함께 거하시며 최고조에 달한다. 하나님이면서 또한, 인간이신 완전한 분 예수.

 

우리는 비록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게 되었다. 어째서 그리스도인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랑하며, 그를 위해 목숨조차 버릴 수 있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로마서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의 마침표. 확증이 곧 예수님의 죽으심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주신 것에 보답이라도 하듯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의 피를 기꺼이 바쳤다.

 

그러나 알고 있는가. 이제는 순교의 피가 메마른 시기란 것을. 물론,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의 피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죽는 것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되묻게 된다. 그럼,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할까?

 

, 오히려 정말 우리는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위해 내 생명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사실적인 자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초대교회와 핍박의 세대에는 달랐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는 분명한 자각과 결심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결심과 열정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그 어색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 용납되는 세대가 오늘이다.

 

초대교회에는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립되고 구별되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또 다른 인류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복음의 후세대인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연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가장 많은 논란을 겪는 세대가 되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는커녕 그리스도인다워 질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상상이 된 것 같다. 그러나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피는 필요하다는 것. 오늘도 할 수 있는 대로 순교의 피는 뿌려져야 할 시대이다. 지나간 세대가 뿌린 순교의 피를 감상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상기시키는 이벤트를 언제까지 반복할 것인가. 오늘은 왜 그 피가 없는 것일까?

 

지나간 세대가 보여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오늘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랑에 대해 증명하라고 묻는 것만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할 것인가. 순교의 피를 흘린다는 것이 그토록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면, 다른 그 무엇으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을 증명할 것인가. 그러므로 정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세련되게 잘 건축된 교회당, 잘 정비된 교회정치, 봉사와 예배, 찬양단과 찬양들, CCM의 세대, MP3 설교의 다운로드. 신앙적인 모든 것이 풍성한 세대에게 감춰진 풍요 속의 빈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 우리는 사랑한다고 속고 있는 것인 아니었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교회 안에서 유능한 직분을 맡았고, 견고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장 서글픈 고뇌는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예수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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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눈물_2012.01.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

 

(신명기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신앙생활은 일면에서는 교회생활, 교제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항상 모여야 한다. 연합이란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항상 모임이나 연합에 대한 많은 강조가 뒤따른다. 그러나 또 그러한 강조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도 개성이 너무나 다양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연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연합된다. 그러나 육신문제, 갈등과 비교, 시기와 다툼, 논쟁과 오해 등등 여러 인간적인 부스럼들이 연합을 훼방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으로도 무엇인가 신령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많은 갈등이 붉어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한편으론 적잖이 곤란해진다.

 

예전에 들은 우스개 소리가 생각난다. ‘예수 믿어도 지 성질대로 믿더만.’ 별로 덕이 안 되는 말이라 여겨지면서도 어찌보면 사실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찌른 말 같아 씁쓸하다. 성령 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것임에도 사실 얼마나 성령 밖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구원받고 성품이 변화된다는 소위 성품구원’, 성화에 대해 듣지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미지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도 인정해야 할 문제다.

 

어쩌면 우리가 갈등하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모두 성화의 부족에 따른 갈등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유의 습성과 기질, 성격과 성향, 반응하는 것들의 문제에 있어서 변화와 개선이 너무나 힘듦을 느낀다. 물론, 이방인이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 육체와의 싸움에 있어서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여리고들이 가득하다. 아직 일곱 바퀴를 돌지 못했고, 아직 날 수를 채우지 못했다. 보다 나은 성화를 이루는 문제에 있어서 게으르고 지지부진한 나를 본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해서 교회의 연합은 종종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논쟁과 오해, 다툼과 갈등, 시기와 질투. 막말. 감정의 표출.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다. 상처 주는 말과 감정의 표출.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로부터 떨어지는 일들이 있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다.

 

(잠언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왜 그렇게 칼로 찌르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감정적으로 쏘아 붙여서 말해야 할까? 또는 왜 그렇게 배려 없이 농을 쳐야 할까?

 

(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입술로는 속이지만 감정을 품으면 금새 드러난다. 표정관리가 안 된다. 낮은 은을 입힌 토기는 살짝 부딪혀도 벗겨진다. 은이 아니라 토기일 뿐임이 드러난다.

(마가복음9:24)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극단적인 죄가 될 것인지 말씀조차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형제, 자매님을 너무 경솔하게 대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장난스럽거나 인격이나 감정을 상하게 할 그런 농을 친다. 육신적이고 덕이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서스럼 없이 한다. 그러므로 한 켠에 여린 형제, 자매님들의 마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근심을 준다. 누군가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의 표출과 언어로 칼로 찌르듯 마음을 그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문제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이렇게 권면한다.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 생활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잖아요.’ 무미건조하게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온 종합감기약 하나 먹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그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던 걸까? 오히려 우리가 먼저 그런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 배려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이런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반복될 때 그런 반성어린 생각을 한다. 형제, 자매의 뺨을 때려 놓고선 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뺨 때리는 거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는 지금껏 얼마나 남모를 뺨을 때려왔을까? 실족케 해왔을까?

 

해답은 배려이다. 해답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계명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라사랑은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긍휼과 자비, 배려를 소유물로 삼는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가깝고 친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랑의 부족, 배려의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희생양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여전히 미워하고, 다투고, 함부로 말하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맘에 안 들면 못 본척하고 외면할 것인가. 가히 교회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나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반대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알고 보면 그게 다 그 형제, 자매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책임을 회피한다.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처럼 공정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의 내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의 아름다움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얼마나 긍휼과 배려가 없는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사랑의 반대현상인가.

 

어느 교회를 가든지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눈물을 듣고 보게 될 것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얼마나 이타적인 사랑의 용서와 배려에는 인색한 우리의 모습이 많은지.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쓴다는 연합의 문제는 항상 해결해야 될 과제로 묘사되어야 하는지. 사랑에 관해서는 가장 유능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랑은 가장 치열한 성취의 문제로 저 표적에 놓였는지.

 

하나님께서 생활의 규례와 명령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새 집을 짓거든 할 수 있는대로 반드시 지붕의 난간을 만들어두라고 말이다. 혹 누군가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음으로 해서 아차의 찰나, 떨어질지 두렵다고 말이다. 만에 하나 있을 실수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지붕의 난간을 설치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당부하신다.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 나의 형제와 자매에 대한 반응과 태도에 있어서 늘 난간을 두라고 말이다. 그 난간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배려이다. 경계를 두어야 한다. 배려의 난간을 울타리 쳐야 한다. , 나로 인해 형제, 자매님들이 시험 받고, 상처받고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저 친하고 가깝고, 쉽게 농친다고 덕이 되는 게 아니다. 배려해야 한다. 바울의 결심 속에 담긴 뜨거운 형제애를 보자. 형제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 맛있는 고기를 평생 동안 먹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이다. 얼마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인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에 대한 참된 존중과 긍휼인가. 우리가 고기는 못 끊더라도 좀 부족한 그리스도인도 품어주는 것. 난간을 두고 배려해줌으로써 상처주지 않는 것. 좀 미워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가고 기도하는 것. 그런 최소한의 긍휼은 가져야 하지 않은가. 나는 난간을 둔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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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_2012.01.1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본질로 인해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이 십계명은 거의 돌판에 새겨진 유대교적 가치관으로 폐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대교적 발상일까? 그것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왜곡된 신앙의 행동양식일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결론을 미리 내뱉어보자면, 유대인보다도 훨씬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무지한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위해 십계명을 지키고 준수하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궁극의 목적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러한 율법의 문제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 선지자인지 의견이 분분할 만큼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접근과 해석, 실행방법은 파격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을 무시하는 행보였다. 그것은 유대교적 율법정신에서 보자면 거의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이 삶의 표준방식인 정통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전적으로 이단자 내지 사이코 사마리안이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나 믿음의 근거를 오직 은혜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이신칭의로 대변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믿음으로 얻는 의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이란 것이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율법적인 가르침이나 행위를 통한 의를 묘사하는 구시대적인 가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십계명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형성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자 도덕적인 계명이다. 십계명이란 것이 구원의 의를 얻기 위한 궁극의 장치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설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사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철저히 십계명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오히려 유대인보다도 더!

 

비록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행보가 자유롭긴 했지만 그것이 율법을 무시하거나, 그것이 무의한 것이기 때문에 폐기하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폐하기는커녕 완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에 의의 완성을 바랐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 내지 의의 완성은 전적으로 행동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심이나 마음의 문제, 심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 양심과 행위의 측면을 아울러 살펴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행위에만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거짓 예배와 경건, 거짓 신앙과 악의가 가득했다. 겉으로는 완전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한 양심과 정직한 마음의 문제는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고르반이라든지 의와 신은 버렸다.’라든지 그랬다.

 

예수님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심과 정신은 가장 율법적이고, 율법의 관점에서 완전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표준에 부합해서 율법을 준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 가장 부합되는 율법의 의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면에서는 율법의 훼손처럼 보였지만 참된 율법의 정신과 가치를 되살린 것이었다.

 

한편,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최소 축소판인 십계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전히 십계명은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마치 믿음의 의와는 다소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전도집회 때 믿음의 의와는 상반되는 행위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자주 접하는 가운데, 십계명의 가치를 믿음의 의와 구별하려는 수단으로만 편용하려는 경향도 가진다.

 

그러나 정말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십계명은 그런 존재감에 불과한 것일까? 구원을 받는다든지 영생을 소유한다든지 복음을 통과한다든지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취지에서 볼 때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한낱 율법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라면 이제 십계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접근, 십계명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전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가장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동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펴보자. 그 어떤 계명 하나도 그리스도인이 된 나에게 무의미한 행동양식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에게 를 안겨줄 참된 행동양식을 명령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참으로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게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이제 논증을 위해 예수님의 주장으로 되돌아 가자.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양심과 마음의 정직한 동기가 없이 그저 행동만 율법적으로 완전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으려는 절름발이 의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과 동기가 외면된 행동의 완전은 반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이 아니라 율법의 불완전한 성취이며, 율법정신의 왜곡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말하시고 싶었다. 그것은 마음과 행동이 일체가 되는 것이었다.

 

(요한일서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마음의 음욕은 간음, 미움은 살인, 노하면 살인. 이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었다. , 그것이 완전한 율법을 위해 마음에 이뤄져야 할 율법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제를 단순히 행동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정말 율법을 지킨다라면 양심의 문제에서조차 해결하고 준수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율법준수에 대한 높은 기준인가? 누가 이 기준에 도달할 것인 것? 그것이야 말로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때려 죽이지만 않으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도 자신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앞에 완전하다고 믿었다.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히려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자가 아니라 완전케 하는 자라고 주장하시면서 네 양심의 문제에서 미워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신다. 미워하는 것도 동일하게 살인에 불과하다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는 마음의 미움을 버리고, 행위에서도 살인하지 않는 것이 살인치 말라는 계명에 대한 준수였던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모두 율법을 지킨다는 관점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이자, 율법의 완성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은 율법에 대한 접근을 제시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이다.

 

, 그렇다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가. 십계명을 지킨다는 문제는 행위로 의를 얻는다는 무지한 유대인의 습관을 상기시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대신 우리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표준을 위해 십계명은 여전히 소중하며, 선하며 우리 행동의 정당한 표준양식이 되어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의로워졌기 때문에 십계명을 진정한 의미에서 따르고, 지키면서 생활해가야 한다. 참된 의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양심의 문제에서와 더불어 행동의 방식에서조차 십계명에 준해서 생활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지한 유대교적 습관이라고 치부해버릴 것인가?

 

다시금 십계명을 들여다 보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닌 세상의 많은 것을 사랑하면서 행동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는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방의 우상을 마음에 섬기면서도 겉으로는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속이는가. 살인과 간음, 도둑질의 문제. 우리는 얼마나 경건치 못한 내 양심의 실체를 경험하는가. 우리의 위선과 부정을 십계명 앞에서 비춰볼 때 우리기 비록 이신칭의는 이루었다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정직하지 못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 앞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내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십계명 앞에서 재조명하는 가운데 회개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얼마나 십계명의 참된 필요와 가치를 외면해 왔던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무모한 무지였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십계명 앞으로 가자. 오히려 십계명을 지켜 의롭다함을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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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세대에 대한 자각_2012.01.1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자연인(非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구절을 좀 진중하게 바라본다라면 성경은 확신할 수 없는 묵시록의 하나로 밖에 다가오지 않을 거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말씀이지만 사실 이 구절은 우리가 매일 같이 숨쉬고, 발을 디디며, 생존하고 사람들과 엮여서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한줄기 소망 없는 사망을 선포하고 있다. 생존과 평화, 안정과 번영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미래상을 단언하는 성경은 아주 배은망덕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사도 말기암 환자에게 며칠 뒤에 죽을테니 묘자리 알아보시죠.’라고 말하진 않는다. 조심스레 돌려 말한다. ‘준비하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에 반해 성경은 너무 잔인하다. 뭐 거의 막말수준이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지 생각해보자. 너무 익숙한 말씀이라고? 무지한 자각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연인과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라는 일반성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비로소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요약하면 이와 같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세면을 하고 식사를 한다. 출근이나 학교를 간다.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자가용이나 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 버스 안에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자연인도 있다. 모두 아침의 졸음이 아직 덜 가신 모습들이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나 자연인이나 패딩이나 코트를 입고 있다. 주로 대부분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 누가 자연인이고 그리스도인인지 육안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부분에 있어서도 자연인은 그리스도인의 친구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의 동료가 된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한다. 여유 시간이 되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한다. 어떤 반찬이 맛있고 없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

 

살아가는 문제나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앞으로의 장래에 대한 문제, 10년 뒤 사회적인 기반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불투명한 미래이다.

 

우리는 같이 호흡한다. 그가 마시는 공기를 그리스도인도 마신다. 현대나 기아, 삼성이나 쉐보레 중에 보통 차를 고른다. 생활 필수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인이 피서를 즐기는 곳은 그리스도인도 여유가 된다면 찾는 곳이다.

 

그리스도인도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사며, 사적인 만남을 위해 카페베네에 앉는다. GS편의점이나 홈플러스에서 쇼핑하고, 자판기를 이용한다.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적성의 문제라든지 직장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도덕적으로 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인 문제나 고민에 있어서 자연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가치관의 차이이다. 비중의 차이이다. 그 차이가 주는 삶의 다름은 자연인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종교적 행동에 국한될 뿐이다.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있어 그리스도인과 자연인이 다른 것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전적으로 다르지만, 육체의 모습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 ,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산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오히려 우리는 상당부분 자연인과 흡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아파도 기도만 하고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인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자가용이나 집을 마련하지 않을 것인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에 가지 않을 것인가? 돈을 벌지 않을 것인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공유되고 오버랩 되는 삶을 사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환경, 사회적 기반과 배경이 이 모든 나를 둘러싼 현상들은 자연인 못지 않게 우리 생존 문제의 견고한 기반이자 터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학생들도 진로나 적성, 직장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한다. 직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직장생활의 미래에 대한 준비나 구상을 한다. 이 세상은 사실 우리에게조차 얼마나 친밀한 것이며, 의미 깊은 주제인가.

 

그러나 베드로후서 3장을 보라. 바로 이것이 다 불탄다고 잘라 말한다.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당신에게 묻는다. 그게 불탄단 말이다. 학교생활, 학점, 졸업, 취업, 아르바이트. 그게 풀어지고 형체조차 없어진단 말이다. 정말 그걸 믿을 수 있는가. 이 놀라운 도시문명을 보자. 높은 빌딩과 잘 건축된 도시들, 집과 도로와 항만들, 녹지와 공원들, 쇼핑과 오락 및 문화의 공간들, 조명과 자동차들(누구는 베츠와 아우디), 잘 정비된 도로와 교통체계. 그것들이 잿더미가 된다. 아무 형체가 없다. 모든 화려한 문명의 이기들이 동일하게 한 줌의 재로 통일된다. 상상해보지 못한 변신이다. 단 한가지 남는 것은 숨겨져 있었던 모든 무형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 심각하게 공포스럽고 두려운 진실 아닌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획일화된 관념만 지닌 채,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자연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미진한 자각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곡을 찌르시는 한 마디를 보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미래가 어떤 것이었나.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첨단의 시대와 광속의 세대 앞에 놓인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니. 우리는 쉽사리 인정하고 자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라는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각오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우리는 TV라는 바보상자 앞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다가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진리를 대해왔다. 우리의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진리이자 현실이다. 더 이상 미화시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연이어 던지시는 하나님의 촌철살인 같은 말씀을 보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내가 되고 싶다는 분명한 자아상은 이 말씀에 부합하는가?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의 피만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다가올 세대의 공포를 직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팁을 주신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결코 잊어서는 안될 진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말이다. 너 역시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사회적 관계와 기반을 더불어 생존하고 있단다. 그러므로 해서 너희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자각과 정체성을 망각해버리곤 한단다. 넌 교회를 오고,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지. 기도도하고 봉사도 한단다. 그러나 그건 말이다. 상당부분 교회 안에서 네 생활이란다. 주중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의 많은 부분에서 너는 거의 자연인과 다르지 않은 활동을 하며 시간을 쓰고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미 자연인과 같이 동화되어 가지. 그러므로 다가올 세대의 비극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구나. 마치, 성경을 모르는 자연인처럼 말이다. , 그리스도인아. 곧 다가올 미래는 내가 의지하는 생존세계의 모든 기반이 잿더미가 될 거란다. 그러므로 너는 분명히 생각해야만 한단다. 도대체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될 것인지 말이다.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복음 안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란다. 그리스도인은 그 다운 자각과 자아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목적의식, 자아정체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란다. 바로 그것은 말이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거룩한 행실이란다. , 경건함이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덕적인 죄는 물론이거니와 내 행동과 삶의 가치관가 기준점에 있어 그것은 동인이 되어야 한단다. 정직과 진실함, 회개와 자아성찰, 검소함과 절제, 인내와 온유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거룩이며, 경건이란다. 그러므로 너여. 거룩함과 경건함을 구비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정립하고, 잿더미가 될 미래로 인해 지금 올무에 걸리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려무나. 올무에 거는 현상은 다가올 미래에 그저 잿더미에 불과할 테지만 숨은 모든 일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란다. 그것이 정녕 두려운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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