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 길갈!_2012.02.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7.)

 

(여호수아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 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출애굽의 1세대들은 광야에서 쓰러졌다. 그들은 갈망했다. 바로의 학대로부터 구원받기를그러나 정작 애굽을 벗어나자 그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광야의 초라함.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했다. 오직 좋았던 것만. 참외, 고기, 부추. 잔인한 고통은 숨긴 채. 가나안 정탐을 실패하면서 그들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어쩌면 출애굽의 1세대들은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아 비참한 죽음으로 끝난 비운의 세대였다. 그들은 애굽에 머물면서도 노예이자 종의 신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벗어나자마자 불순종과 불신앙의 노예가 되어 광야의 종살이를 하고 말았다. 그들처럼 비극적인 세대가 또 있을까?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와 출애굽의 2세대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던 것이다. 불순종으로 광야의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던 징계의 쓴 잔을 다 채우고, 그 비극의 시간 동안 중단되어 버린 할례가 재개되었다. 그들은 다시 회복되었다. 구별된 증표를 다시 실행하였다. 하나님께서 지난 광야의 오랜 세월 중단되어버린 할례를 재기할 것을 명하셨다. 그들은 다시 구별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길갈에 당도하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야 너희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도다.’

 

애굽을 벗어나서도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날 때까지 애굽의 수치는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 어째서? 바로,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이었다. 사실 출애굽기 1세대들에게 있어 불순종과 불신앙은 친구 같은 존재였다. 1세대들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갚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째로 그것과 맞바꾸었다. 가장 슬픈 비극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제야 그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애굽의 흔적,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 애굽의 정신, 불신과 불순종. 모든 수치들이 걷어차였다. , 애굽의 수치. 바로 노예근성이다. 사실 출애굽의 1세대들은 간절히 출애굽을 소원하였지만 정작 그 애굽을 벗어났을 때 돌이켜 애굽을 그리워했다. 노예의 신분이 죽고 싶을 만큼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애굽을 나와서는 광야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보고 하나님을 불신했다. 그들은 매번 애굽을 재차 그리워했다. 그 수치와 모욕의 신분은 잊어버린 채 그곳에서 먹었던 외와 부추와 고기를 그리워하면서 말이다. 사람은 항상 그렇다. 현재의 좋은 것은 망각하려고 하고, 안 좋은 것은 과거의 좋은 것과 비교하면서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과거의 쓴 것은 또, 망각하고 있다. 철저한 모순과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모한 소모를 반복한다.

 

애굽의 수치가 굴러 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독 의미 깊게 다가오는 이유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끈질기게 그 이면에서는 노예적인 기질과 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출애굽의 1세대들. , 노예의 때를 그리워하던 쪼다 병신 같은 모습.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1세대들은 결코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광야에서 소멸됨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비극을 벗어나자 마자 재차 비극을 맞은 세대.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수치의 세대.

 

그 무모한 세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야 애굽의 수치가 굴러간 세대가 왔다.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는 세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진 세대. 가나안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과 도전정신으로 무장된 세대. 그들이 선 땅이 길갈이었다. 이제야 그 수치스러운 종의 근성, 노예의 기질을 벗어던지고 용맹하고 진취적이며 믿음으로 쟁취할 자들.

 

그리스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세상에서 벗어난 세대.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 종의 삶을 벗어난 세대. 그러나 어느 세대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까? 비극의 운명을 벗어나자 마자 다시 비극을 맞이하는 세대? 그렇지 않으면 길갈에 선 당당한 그리스도인?

 

어리석고 무모한 나는 여전히 내 삶의 많은 장소에서 길갈이 아니다. 여전히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지 않았다. 벗겨지지 않은 노예 근성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불찰하고 그러면서 광야를 돌고 있는 수치. 여전히 길갈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너무나 길갈이 그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