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눈물_2012.01.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5.)

 

(신명기 22:8)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 흐른 죄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신앙생활은 일면에서는 교회생활, 교제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항상 모여야 한다. 연합이란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그러므로 항상 모임이나 연합에 대한 많은 강조가 뒤따른다. 그러나 또 그러한 강조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인들도 개성이 너무나 다양하고 뚜렷하기 때문에 연합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연합된다. 그러나 육신문제, 갈등과 비교, 시기와 다툼, 논쟁과 오해 등등 여러 인간적인 부스럼들이 연합을 훼방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만으로도 무엇인가 신령하게 느껴질 정도이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많은 갈등이 붉어지고 있는지 현실적으로 살펴보면 한편으론 적잖이 곤란해진다.

 

예전에 들은 우스개 소리가 생각난다. ‘예수 믿어도 지 성질대로 믿더만.’ 별로 덕이 안 되는 말이라 여겨지면서도 어찌보면 사실 그대로를 직설적으로 찌른 말 같아 씁쓸하다. 성령 안에서 연합해야 하는 것임에도 사실 얼마나 성령 밖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은지 모른다. 미안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구원받고 성품이 변화된다는 소위 성품구원’, 성화에 대해 듣지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미지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지도 인정해야 할 문제다.

 

어쩌면 우리가 갈등하는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은 모두 성화의 부족에 따른 갈등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유의 습성과 기질, 성격과 성향, 반응하는 것들의 문제에 있어서 변화와 개선이 너무나 힘듦을 느낀다. 물론, 이방인이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 육체와의 싸움에 있어서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여리고들이 가득하다. 아직 일곱 바퀴를 돌지 못했고, 아직 날 수를 채우지 못했다. 보다 나은 성화를 이루는 문제에 있어서 게으르고 지지부진한 나를 본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해서 교회의 연합은 종종 곤란한 지경에 이른다. 논쟁과 오해, 다툼과 갈등, 시기와 질투. 막말. 감정의 표출. 가장 일반적이고 대표적인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다. 상처 주는 말과 감정의 표출.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로부터 떨어지는 일들이 있다.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다.

 

(잠언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왜 그렇게 칼로 찌르는 것처럼 노골적이고 감정적으로 쏘아 붙여서 말해야 할까? 또는 왜 그렇게 배려 없이 농을 쳐야 할까?

 

(26: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입술로는 속이지만 감정을 품으면 금새 드러난다. 표정관리가 안 된다. 낮은 은을 입힌 토기는 살짝 부딪혀도 벗겨진다. 은이 아니라 토기일 뿐임이 드러난다.

(마가복음9:24)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극단적인 죄가 될 것인지 말씀조차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형제, 자매님을 너무 경솔하게 대하려고 한다. 지나치게 장난스럽거나 인격이나 감정을 상하게 할 그런 농을 친다. 육신적이고 덕이 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서스럼 없이 한다. 그러므로 한 켠에 여린 형제, 자매님들의 마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근심을 준다. 누군가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의 표출과 언어로 칼로 찌르듯 마음을 그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문제로 인해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으면 항상 이렇게 권면한다.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 생활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게 아니잖아요.’ 무미건조하게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온 종합감기약 하나 먹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좀 더 그 마음을 헤아려줄 수는 없었던 걸까? 오히려 우리가 먼저 그런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 배려해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이런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반복될 때 그런 반성어린 생각을 한다. 형제, 자매의 뺨을 때려 놓고선 우리가 주님 보고 신앙생활 하는 거지 형제, 자매님 보고 하는 거 아니잖아요. 뺨 때리는 거 생각하지 마세요. 그리고 나는 지금껏 얼마나 남모를 뺨을 때려왔을까? 실족케 해왔을까?

 

해답은 배려이다. 해답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계명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라사랑은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긍휼과 자비, 배려를 소유물로 삼는다. 우리가 형제, 자매들과 가깝고 친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배려해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랑의 부족, 배려의 부족으로 인해 수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희생양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것인가?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여전히 미워하고, 다투고, 함부로 말하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맘에 안 들면 못 본척하고 외면할 것인가. 가히 교회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사랑하고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8: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그러나 오히려 교회 안에서는 반대의 모습을 종종 보았다. 알고 보면 그게 다 그 형제, 자매님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책임을 회피한다.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처럼 공정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의 내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의 아름다움이다. 얼마나 잔인한가. 얼마나 긍휼과 배려가 없는가. 얼마나 이기적인가. 사랑의 반대현상인가.

 

어느 교회를 가든지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눈물을 듣고 보게 될 것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얼마나 이타적인 사랑의 용서와 배려에는 인색한 우리의 모습이 많은지. 그러므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쓴다는 연합의 문제는 항상 해결해야 될 과제로 묘사되어야 하는지. 사랑에 관해서는 가장 유능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사랑은 가장 치열한 성취의 문제로 저 표적에 놓였는지.

 

하나님께서 생활의 규례와 명령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새 집을 짓거든 할 수 있는대로 반드시 지붕의 난간을 만들어두라고 말이다. 혹 누군가 지붕에 올라갔다가 난간이 없음으로 해서 아차의 찰나, 떨어질지 두렵다고 말이다. 만에 하나 있을 실수로 인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지붕의 난간을 설치할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당부하신다.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 나의 형제와 자매에 대한 반응과 태도에 있어서 늘 난간을 두라고 말이다. 그 난간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배려이다. 경계를 두어야 한다. 배려의 난간을 울타리 쳐야 한다. , 나로 인해 형제, 자매님들이 시험 받고, 상처받고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저 친하고 가깝고, 쉽게 농친다고 덕이 되는 게 아니다. 배려해야 한다. 바울의 결심 속에 담긴 뜨거운 형제애를 보자. 형제가 문제를 삼는다면 그 맛있는 고기를 평생 동안 먹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이다. 얼마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정신인가.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에 대한 참된 존중과 긍휼인가. 우리가 고기는 못 끊더라도 좀 부족한 그리스도인도 품어주는 것. 난간을 두고 배려해줌으로써 상처주지 않는 것. 좀 미워도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삼가고 기도하는 것. 그런 최소한의 긍휼은 가져야 하지 않은가. 나는 난간을 둔 그리스도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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