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_2012.01.1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본질로 인해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이 십계명은 거의 돌판에 새겨진 유대교적 가치관으로 폐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대교적 발상일까? 그것은 믿음이 아닌 행위로 구원받으려는 왜곡된 신앙의 행동양식일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만한 결론을 미리 내뱉어보자면, 유대인보다도 훨씬 십계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이다.

 

무지한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위해 십계명을 지키고 준수하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을 지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궁극의 목적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러한 율법의 문제에 정면 도전하고 나섰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거짓 선지자인지 의견이 분분할 만큼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접근과 해석, 실행방법은 파격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을 무시하는 행보였다. 그것은 유대교적 율법정신에서 보자면 거의 하나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이 삶의 표준방식인 정통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전적으로 이단자 내지 사이코 사마리안이었다.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구원이나 믿음의 근거를 오직 은혜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로 말미암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선포한다. ‘이신칭의로 대변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 ‘믿음으로 얻는 의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이란 것이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율법적인 가르침이나 행위를 통한 의를 묘사하는 구시대적인 가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십계명을 살펴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형성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자 도덕적인 계명이다. 십계명이란 것이 구원의 의를 얻기 위한 궁극의 장치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조차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직설적으로 풀어서 말하자면, 사실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철저히 십계명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다. 오히려 유대인보다도 더!

 

비록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행보가 자유롭긴 했지만 그것이 율법을 무시하거나, 그것이 무의한 것이기 때문에 폐기하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폐하기는커녕 완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것에 의의 완성을 바랐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 내지 의의 완성은 전적으로 행동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양심이나 마음의 문제, 심적인 동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했다. , 양심과 행위의 측면을 아울러 살펴볼 때, 그것은 전적으로 행위에만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거짓 예배와 경건, 거짓 신앙과 악의가 가득했다. 겉으로는 완전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선한 양심과 정직한 마음의 문제는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고르반이라든지 의와 신은 버렸다.’라든지 그랬다.

 

예수님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범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심과 정신은 가장 율법적이고, 율법의 관점에서 완전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각에서 보는 표준에 부합해서 율법을 준수하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 가장 부합되는 율법의 의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면에서는 율법의 훼손처럼 보였지만 참된 율법의 정신과 가치를 되살린 것이었다.

 

한편,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최소 축소판인 십계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전히 십계명은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마치 믿음의 의와는 다소 상반된 감정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전도집회 때 믿음의 의와는 상반되는 행위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자주 접하는 가운데, 십계명의 가치를 믿음의 의와 구별하려는 수단으로만 편용하려는 경향도 가진다.

 

그러나 정말 여전히 그리스도인에게 십계명은 그런 존재감에 불과한 것일까? 구원을 받는다든지 영생을 소유한다든지 복음을 통과한다든지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취지에서 볼 때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한낱 율법적 행위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라면 이제 십계명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접근, 십계명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전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가장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동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십계명을 하나하나를 면밀히 살펴보자. 그 어떤 계명 하나도 그리스도인이 된 나에게 무의미한 행동양식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십계명은 그리스도인에게 를 안겨줄 참된 행동양식을 명령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참으로 십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게 될 자격을 갖춘 것이다.

 

이제 논증을 위해 예수님의 주장으로 되돌아 가자.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양심과 마음의 정직한 동기가 없이 그저 행동만 율법적으로 완전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으려는 절름발이 의를 인정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과 동기가 외면된 행동의 완전은 반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이 아니라 율법의 불완전한 성취이며, 율법정신의 왜곡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전을 말하시고 싶었다. 그것은 마음과 행동이 일체가 되는 것이었다.

 

(요한일서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마음의 음욕은 간음, 미움은 살인, 노하면 살인. 이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었다. , 그것이 완전한 율법을 위해 마음에 이뤄져야 할 율법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제를 단순히 행동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정말 율법을 지킨다라면 양심의 문제에서조차 해결하고 준수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율법준수에 대한 높은 기준인가? 누가 이 기준에 도달할 것인 것? 그것이야 말로 율법을 완전케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때려 죽이지만 않으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해도 자신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앞에 완전하다고 믿었다. 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는 것처럼 보이면서 오히려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자가 아니라 완전케 하는 자라고 주장하시면서 네 양심의 문제에서 미워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신다. 미워하는 것도 동일하게 살인에 불과하다라고 하시면서. 그러므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는 마음의 미움을 버리고, 행위에서도 살인하지 않는 것이 살인치 말라는 계명에 대한 준수였던 것이다. 마음과 행동이 모두 율법을 지킨다는 관점이야 말로 율법의 완전한 준수이자, 율법의 완성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은 율법에 대한 접근을 제시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이다.

 

, 그렇다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떠한가. 십계명을 지킨다는 문제는 행위로 의를 얻는다는 무지한 유대인의 습관을 상기시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문제에서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대신 우리가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표준을 위해 십계명은 여전히 소중하며, 선하며 우리 행동의 정당한 표준양식이 되어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의로워졌기 때문에 십계명을 진정한 의미에서 따르고, 지키면서 생활해가야 한다. 참된 의의 실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양심의 문제에서와 더불어 행동의 방식에서조차 십계명에 준해서 생활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지한 유대교적 습관이라고 치부해버릴 것인가?

 

다시금 십계명을 들여다 보자.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아닌 세상의 많은 것을 사랑하면서 행동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속이는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문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방의 우상을 마음에 섬기면서도 겉으로는 우상숭배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속이는가. 살인과 간음, 도둑질의 문제. 우리는 얼마나 경건치 못한 내 양심의 실체를 경험하는가. 우리의 위선과 부정을 십계명 앞에서 비춰볼 때 우리기 비록 이신칭의는 이루었다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정직하지 못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십계명 앞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내 양심과 행동의 문제를 십계명 앞에서 재조명하는 가운데 회개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란 이유로 얼마나 십계명의 참된 필요와 가치를 외면해 왔던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무모한 무지였던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십계명 앞으로 가자. 오히려 십계명을 지켜 의롭다함을 얻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