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세대에 대한 자각_2012.01.1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
(벧후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자연인(非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이 구절을 좀 진중하게 바라본다라면 성경은
확신할 수 없는 묵시록의 하나로 밖에 다가오지 않을 거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말씀이지만
사실 이 구절은 우리가 매일 같이 숨쉬고, 발을 디디며, 생존하고
사람들과 엮여서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한줄기 소망 없는 사망을 선포하고 있다. 생존과 평화, 안정과 번영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갈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미래상을 단언하는 성경은 아주 배은망덕하게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어지간하지
않고서는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의사도 말기암 환자에게 ‘며칠
뒤에 죽을테니 묘자리 알아보시죠.’라고 말하진 않는다. 조심스레
돌려 말한다. ‘준비하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그에 반해
성경은 너무 잔인하다. 뭐 거의 막말수준이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도 이 말씀이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지 생각해보자. 너무 익숙한 말씀이라고? 무지한 자각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연인과 살아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다라는 일반성을 재검토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비로소 자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요약하면 이와 같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 세면을 하고 식사를 한다. 출근이나 학교를 간다.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자가용이나 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 버스 안에는 그리스도인도 있고, 자연인도
있다. 모두 아침의 졸음이 아직 덜 가신 모습들이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나 자연인이나 패딩이나 코트를 입고 있다. 주로 대부분은 이어폰을 끼고 있다. 누가 자연인이고 그리스도인인지 육안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부분에 있어서도 자연인은 그리스도인의 친구가 되며, 그리스도인은 자연인의 동료가 된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한다. 여유 시간이 되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식사한다. 어떤 반찬이 맛있고 없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할 수 있다.
살아가는
문제나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에 대해 함께 고민한다. 앞으로의 장래에 대한 문제, 10년 뒤 사회적인 기반이 어떨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불투명한 미래이다.
우리는 같이
호흡한다. 그가 마시는 공기를 그리스도인도 마신다. 현대나
기아, 삼성이나 쉐보레 중에 보통 차를 고른다. 생활 필수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자연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인이 피서를 즐기는 곳은 그리스도인도
여유가 된다면 찾는 곳이다.
그리스도인도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사며, 사적인 만남을 위해 카페베네에 앉는다.
GS편의점이나 홈플러스에서 쇼핑하고, 자판기를 이용한다.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적성의 문제라든지 직장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도덕적으로 죄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현실적인 문제나 고민에 있어서 자연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이다. 다만, 가치관의 차이이다. 비중의 차이이다. 그 차이가 주는 삶의 다름은 자연인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종교적 행동에 국한될 뿐이다.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있어 그리스도인과 자연인이 다른 것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전적으로 다르지만, 육체의 모습으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에 있어서 거의 동일하다. 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스스로 구별된 삶을 산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오히려 우리는 상당부분 자연인과
흡사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아파도 기도만 하고 병원에 가지 않을 것인가?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을 것인가? 자가용이나 집을 마련하지 않을 것인가? 학교에 가지 않고, 직장에 가지 않을 것인가? 돈을 벌지 않을 것인가?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그리스도인은 자연인과
공유되고 오버랩 되는 삶을 사실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환경, 사회적 기반과 배경이 이 모든 나를 둘러싼 현상들은 자연인 못지 않게 우리 생존
문제의 견고한 기반이자 터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학생들도 진로나 적성, 직장에 대해 고민하고 기도한다. 직장을 가진 그리스도인도 직장생활의
미래에 대한 준비나 구상을 한다. 이 세상은 사실 우리에게조차 얼마나 친밀한 것이며, 의미 깊은 주제인가.
그러나 베드로후서 3장을 보라. 바로 이것이 다 불탄다고 잘라 말한다.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당신에게 묻는다. 그게 불탄단 말이다. 학교생활, 학점, 졸업, 취업, 아르바이트. 그게
풀어지고 형체조차 없어진단 말이다. 정말 그걸 믿을 수 있는가. 이
놀라운 도시문명을 보자. 높은 빌딩과 잘 건축된 도시들, 집과
도로와 항만들, 녹지와 공원들, 쇼핑과 오락 및 문화의 공간들, 조명과 자동차들(누구는 베츠와 아우디), 잘 정비된 도로와 교통체계. 그것들이 잿더미가 된다. 아무 형체가 없다. 모든 화려한 문명의 이기들이 동일하게 한 줌의
재로 통일된다. 상상해보지 못한 변신이다. 단 한가지 남는
것은 숨겨져 있었던 모든 무형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 심각하게 공포스럽고 두려운 진실 아닌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획일화된 관념만 지닌 채,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자연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미진한 자각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곡을 찌르시는 한 마디를 보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미래가 어떤 것이었나.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최첨단의 시대와 광속의 세대 앞에 놓인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니. 우리는 쉽사리 인정하고 자각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라는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각오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우리는 TV라는 바보상자 앞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다가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진리를 대해왔다. 우리의 미래가 한 줌의 재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이 진리이자 현실이다. 더 이상 미화시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연이어 던지시는 하나님의 촌철살인 같은 말씀을 보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도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내가 되고 싶다는 분명한 자아상은 이 말씀에 부합하는가? 바로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의 피만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정말 다가올 세대의 공포를 직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은 팁을 주신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결코 잊어서는
안될 진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말이다. 너 역시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문명과
사회적 관계와 기반을 더불어 생존하고 있단다. 그러므로 해서 너희들은 종종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자각과
정체성을 망각해버리곤 한단다. 넌 교회를 오고,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하지. 기도도하고 봉사도 한단다. 그러나 그건 말이다. 상당부분 교회 안에서 네 생활이란다. 주중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간의 많은 부분에서 너는 거의 자연인과 다르지 않은 활동을 하며 시간을 쓰고 있단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미 자연인과 같이 동화되어 가지. 그러므로 다가올 세대의 비극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구나. 마치, 성경을 모르는 자연인처럼 말이다. 얘, 그리스도인아. 곧
다가올 미래는 내가 의지하는 생존세계의 모든 기반이 잿더미가 될 거란다. 그러므로 너는 분명히 생각해야만
한단다. 도대체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될 것인지 말이다. 그저
예수님의 공로로 복음 안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만족하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란다. 그리스도인은
그 다운 자각과 자아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목적의식, 자아정체성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란다. 바로 그것은 말이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거룩한 행실이란다. 또, 경건함이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도덕적인 죄는 물론이거니와 내 행동과 삶의 가치관가 기준점에 있어 그것은 동인이 되어야 한단다. 정직과
진실함, 회개와 자아성찰, 검소함과 절제, 인내와 온유 그 모든 것들이 바로 거룩이며, 경건이란다. 그러므로 너여. 거룩함과 경건함을 구비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아와
정체성을 정립하고, 잿더미가 될 미래로 인해 지금 올무에 걸리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길 간절히 바라보고 사모하려무나. 올무에 거는
현상은 다가올 미래에 그저 잿더미에 불과할 테지만 숨은 모든 일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란다. 그것이
정녕 두려운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