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_2012.04.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7.)

 

(삼상 24:17-19, 개역)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복수는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복수는 어떤 것일까? 상대방이 나에게 서운하게 대했을 때 나도 그 사람에게 서운하게 대하고 싶어진다. 그게 복수다. 누군가 내 배려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라든지. 내가 배려하는 그 사람은 나를 배려해주지 않을 때, 동일하게 배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복수다.

복수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복수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습관이다.

 

사울의 외침처럼 다윗은 학대를 당했다. 복수를 위한다면 다윗은 마땅히 사울을 들이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사울은 왕이었고,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이 충분히 자기를 죽이고 복수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굳은 양심의 사울이 그거라도 알았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랫사람을 그렇게 학대하면서도 자신을 선대하는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잔인하다는 말은 그럴 때를 위함 일거다. 하나님은 복수 금지주의를 표방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중에 하나는 복수하지 말고, 심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좋은 모형이셨다. 당하셨지만 복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셨다. 사울의 외침처럼 사람이 자기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 만나 반 죽음에 이른 유대인을 치료해주었다. 친히 자기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셨다. 선한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은 친히 화목제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해 앙갚음하지 않으시고, 보복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스도인은 복수금지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살면서도 종종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복수할 때 화가 임한다. 이스라엘에서 한 레위인이 그 아내가 베냐민 비류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12덩이로 몸을 잘라 12지파에 보내어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래서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싸웠다. 그러나 그 첫 전투에서 11지파가 비참히 패배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이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 싸웠다. 나중에 승리는 하였지만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이즈러져서 낭패에 봉착했다. 이처럼 복수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쓰라린 것이고, 이후에도 큰 낭패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몰라도 교회 안에 날 홀대하는 한 자매님이 계시다. 꽤 시간이 되었다. 내가 작년까지 부장교사를 할 때 교사 여러 명에게 나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교사도 거기에 동조를 안 해줬다고 한다. ‘아니예요. 병훈 형제님. 알고 보면 전혀 달라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형제님은 그러셨단다. ‘자매님이나 잘 하세요. 쓸데 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고.’ 만약, 동조해주는 교사가 있었다면 내가 더 곤란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3자를 통해 들려오는 그 자매님의 행실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어느 날은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넌 부장교사 하느라고 그렇게 고생하고 힘드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그 자매님이 어머니께도 대놓고 몇 번 타박을 줬다고 한다. 그때마다 얘기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니 제가 정직하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 분의 집념도 대단하다.

 

얼마 전까진 몇 번 마주칠 때 마다 요즘 안 좋은 일 없냐고 친히 물어봐 주셨다. 그 질문의 의도는 단순했다. 뭐 좀 안 좋은 일 있다는 소식 듣고 싶은데 없냐는 거다. 어느 날 가정모임을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주차공간이 전혀 없는데 많이 늦어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그 자매님을 만났다. 보자마자 대뜸 얘기하셨다.

누가 싸가지 없이 주차하나 싶었더니 형제님이였군요!’

, 다시 내려가서 바로 주차해야죠

그리고 집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와 주차를 옮겼었다. 씁쓸했지만 아무 대면할 말이 없었다. 다 내 부덕의 소치일 뿐.

 

다윗은 인신공격하는 시므이를 놓고 말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저주하라 하심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그러나 다윗도 화가 날 때는 있었다. 나발이 다윗의 공덕을 알아주지 않고, 무시했을 때 격노했었다.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걸 보면 다윗도 상황에 따라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들 처럼. 나발정도는 쳐 죽일 수 있었다. 아마,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고 권력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격노한 다윗의 군대 앞에 나발의 총명한 아내가 나아왔다. 그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그 노중에서 다윗을 중재하고 다스리는 그녀의 이 한 마디에서 드러난다.

 

(삼상 25:31, 개역)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정확히 상기시켰다.

지금 너무 흥분해서 굳이 살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했다가는 나중에서야 무죄한 피를 흘리고 복수를 일삼았구나 싶어 슬퍼하고 낙심하실 겁니다. 지금 참으면 나중에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이 온전하실 겁니다.’

 

아비가일의 위대한 총명함과 중재에 감탄이 난다. 그렇다. 격노하고 흥분할 때 우리는 복수하려고 한다.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항상 그 뒤에는 슬픔과 마음에 걸림이 남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심판하심으로써 정녕 다윗은 그 칼을 쓰지 않고도 복수할 수 있었다.

 

(삼상 25:39, 개역)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격노하고 흥분해서 복수하고 싶을 그 때 참을 수 있다면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을 말이다. 이 날의 교훈은 다윗의 평생에 큰 교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후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십 황무지에서 조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칼을 거두며 다음과 같이 말했고, 그 말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삼상 26:10, 개역)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나발에 대한 복수심을 거뒀던 그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는 것을 보면서 사울에 대한 복수심도 계속해서 거둘 수 있었다. 하나님이 사울을 치실 것을 더 확고히 믿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말처럼 실제로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패전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윗왕이 된 이후에도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시므이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확실한 경험을 했던 다윗은 복수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우리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수해주길 바래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복수할 수 있을 때 자신을 삼가한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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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일까? 시험일까?_2012.04.22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6.)

 

(삼상 24:4-6, 개역)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 처음은 엔게디 황무지에 다윗이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들염소 바위 인근의 굴 속에 은신하던 다윗과 그 일행은 굴 입구에서 매복하기 위해 들어온 사울의 군대를 만났다. 사울 일행이 잠이 들자 다윗의 사람들이 말했다.

 

올커니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다윗 당신에게 붙인다고 했는데 오늘이 그 기회가 온 듯 합니다. 사울 일행이 잠들었으니 지금 가서 칼로 찌르면 두 번 찌를 것 없이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칼을 들고 잠든 사울왕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사용해 사울왕의 옷자락을 잘랐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았다. 다윗이 말했다.

 

아니다.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다윗의 견고한 중심과 올바른 판단을 통해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유형 같다.

 

다윗은 분명 사울로 인해 심히 군급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했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가 쫓아다닌다고 할 때, 그리고 끝없이 피해 다녀야 할 때 그 정신적인 긴장과 압박, 스트레스. 부담감이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건 오직 다윗의 경험이었다. 그 와중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 그러나 다윗은 버젓이 그 황금의 기회를 뻥 차버렸다. 허허그러나 증명되었다. 다윗이 기회를 차버린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회일까? 시험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오해일까?’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타이밍을 상고해보자. 다윗의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분명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 떠올렸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그때가 되면 원하는 대로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앤게디 황무지의 어느 동굴에서 사울을 만났을 때 다윗의 일행들은 바로 예전의 계시를 본능적으로 상기시키며 바로 오늘이 사울왕을 죽이는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명백했다. 미리 받은 암시도 있었을 뿐더러 절묘하게 사울의 일행이 같은 동굴의 입구로 들어와 거기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를 놓친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보.

 

그러나 놀라운 다윗은 그 기회를 천운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모두가 시험에 빠져들고 있을 때, 다윗이 그 허황된 착각을 뻥 터트렸다.아니다. 오늘은 그 기회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주를 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오늘 복수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험이 온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연속성 안에는 수많은 사건과 징조들이 있다. 우리는 그 징조를 잘 보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상황들 앞에서 이것이 징조라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으로 드러난 것이 많이 있었다. , 우리는 기회인지 시험인지 잘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백한 답을 주신다고 단정해버림으로써 보여지는 현상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고, 시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남은 건 쓰라린 좌절감.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문제를 유발한다.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마치 다윗과 사울처럼. 누군가를 미워할 때. 또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고 싶지 않을 때, 어떤 힘의 대치와 힘의 논리가 견제될 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버티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어떤 징조를 붙잡으려다 낭패를 당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참 어렵지만. 정리해보면 분명 그리스도인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겪는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것이 기회인냥 행동했다가, 기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기회가 아닌 것을 기회로 오해하는 것이다. 오직 정직한 양심만이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그의 일행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누군들 그 상황에서 계시된 암시도 있었는데 이것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오직 단 하나의 명백한 진리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치는 것은 죄다.’라는 중심을 갖고 있음으로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여전히 정직하지 못하다. 이기적이고 겸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다양한 장면들에서 분명히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를 반복해서 보고 배우면서도 그것을 내 행동의 분명한 기준과 근거로 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럼으로 시험이 왔을 때 그것을 기회인 줄 착각하고 그릇된 우를 범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참 그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두렵다. 얼마나 무지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들. 세상의 것들을 분별해서 취하고, 삼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의 참된 윤리를 명백히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탕발림에 불과한 세상이 주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처럼 착각하고 덥석 물어버린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분명히 생각해야 할 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소멸된다고 했다. 영원한 것에 관계되지 않는 모든 것이 사실은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기회와 징조들. 정말 이는 기회일까? 아니면 시험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한 양심을 주셔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기를!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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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_2012.04.1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5.)

 

(삼상 20:37, 개역)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고난이다. 가끔 나는 현재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지나온 발걸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눈물의 흔적들을 떠올릴 때 깊은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왜 그렇게 많은 흔적들이 있는지. 둘러서 가야 했고, 치여서 가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내가 가장 많이 힘들어했던 것은 왜 나는 무난하지 못할까?’ 그런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별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질문이 가장 피곤한 질문이란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원망한적도 있었지만 모짐과 교만함을 벗지 못해서이다.

 

사울이 수 차례에 걸쳐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져 가자 요나단은 다윗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정말 사울이 다윗을 죽일 의도가 있는지 시험해보고 정녕 그러하다면 활을 쏘아서 암시해주겠노라고 말이다. 만약에 활을 쏘아서 수종 드는 소년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면 다윗 너도 올 것이고. 오히려 네 앞편에 활이 있어서 나아가야 한다면 너 역시 네 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에셀 바위 곁에 다윗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슬픔에 가득 찬 요나단은 힘껏 활시위를 당겨 멀리 저 멀리 아이의 머문 자리를 훌쩍 넘겨 활을 쏘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자 저기 보라. 화살이 네 앞편에 떨어졌도다. 어서 가서 주워오라!’

 

그렇게 요나단은 외치고 눈물을 훔쳐 흐느꼈다. 다윗도 울었다. ‘그렇구나! 정녕 사울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가야만 하는구나!’

 

이때부터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대적 사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험난한 고난의 여정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아마도 고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성경 속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들마다 험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는 것을. 보라. 다윗과 모세, 아브라함과 요셉.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누구 하나 고난에 치를 떨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왔다. 그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종노릇하던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홍해를 건넜던 그들. 그러나 그들이 만난 것은 젖과 꿀의 가나안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였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삶의 축복이 아니었다. 우리는 반드시 광야를 지나야만 했다. 그러므로 광야를 만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서글픈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 마냥 행복해하지 마시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신앙생활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광야는 비롯된다. 우리는 요나단의 외침을 동일하게 들어야 될 것이다.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이제 영광을 얻으며 왕궁에 거하던 그 사치와 호화로움과 연락하는 기쁨이 문을 닫는다. 고난의 길을 떠나야 할 그 시간이 왔다.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를 그 막막함을 벗삼아 그저 가야 한다. 피하지 말고 가야 한다.

 

다윗이 가장 먼저 떠났던 곳이 블레셋 지경의 가드였다. 사울의 영향력일 벗어나가 위한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을 만났다.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이다.

 

아니, 저 자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할 때 그 다윗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생명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추태를 부려야 했다. 침을 흘려 수염에 침 범벅이 되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냈다. 천지 다윗의 모습 좀 구경해보자. 그리고 다윗은 도망쳐 모압 왕에게로 갔다. 그리고 선지자 갓을 만났다. 다윗이 들은 대답은 단 하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안타깝게도 화살은 쏘아졌다. 나를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채 말이다. 고난의 길을 시작해야 할 때 우리는 그만큼 소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직 고난을 통과할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안전을 위해 적은 고난을 위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이방의 땅으로 갔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와 추태를 벌이는 자신을 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기 들을 대답은 유일하다. 사울왕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그 유대로 들어가는 것. , 고난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을 때 그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이 온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사실 그건 한 번이 아니었다. 14년이라는 신앙의 세월이 오면서 몇 번이나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흐느꼈다.

 

, 그 외로움이라니! 정말 힘들어. 이젠 정말 지친다구. 지겹다구.’

 

그렇게 말했었다. 할 수 있다면 고난을 적게 받아보려고 가드왕을 찾아갔다. 그래서 나 역시 추태를 부렸다. 모압왕에게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유대로 되돌아가렴!’ 고난 받을 때, 고난 받는 그 땅에서 너무나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유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고난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곤 한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소심하게는 교회를 옮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답은 유일했다. 도망치고 싶을 때, 신앙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바로 그 때, 머물러야 된다는 것.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노라고 울부짖을 그때부터가 참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제 내 뒷편이 아닌 나의 앞편에 쏘여진 화살을 다시금 바라보자. ‘화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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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성령과 소유_2012.04.1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4.)

 

(삼상 16:13-14, 개역) [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14]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다윗은 성령을 소유했고, 사울은 성령을 잃어버렸다. 익숙한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3위이시다. 마땅히 성령님 역시 하나님이시다. 은혜의 시기 아직은 성령님께서 이 땅위에서 사역하신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육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이제 성령님께서 이 땅에 사역하신다. , 하나님은 여전히 성령님의 모습으로 동서고금 현재 이곳에서도 일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 어디로 부는지 알 수 없듯이 성령께서도 그렇게 사역하신다고. 성령님은 자유롭다. 또한, 굉장히 다양한 방법과 특별하고 예기치 않은 섭리 안에서 영혼을 인도하신다. 우리 가운데 행하신다. 우리는 어떤 모양이든지 단정지어 가둘 수 없다. 위대하신 성령님.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그는 40년을 통치했다. 그러나 오늘 성령님은 사울을 떠나셨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왕권과 왕좌의 사람에게서 떠나셨다. 그렇다고 해서 사울이 바로 왕좌를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울 여전히 육신의 왕이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지는 않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방랑자의 신세로 비참한 몰골로 도망다녀야 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성령님께서 어디로 이동하셨는지 보게 된다. 마땅히 왕에게 있어야 할 성령님께서 도망자 다윗에게로 옮기셨다.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았지만 그러했다. 그렇다. 성령님은 왕이든 목동이든 그런 육신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은 자신의 위대한 권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권위에 귀속되어 운행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 성령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떠나실 수도 있다. 그가 지옥을 간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떠나실 수는 있다. 그 역사하심과 권세와 능력과 신성이 떠난다.

 

시험에 든 그리스도인들. 거짓 교리와 이단에 미혹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성령께서 그들을 떠나신다. 왕보다도 목동이 될 수 있었다. 왕 같은 제사장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성령은 떠나실 수 있다. 내가 비록 목동처럼 초라한 모습일지라도 성령께서 머문다면 그의 정체성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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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반응하다_2012.04.1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3.)

 

본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떻게 시선처리를 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삼상 17:24, 개역)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삼상 17:42, 개역)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심한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3m짜리 골리앗 형을 봤기 때문.

 

한편,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고 업신여겼다. 왜냐하면 그가 이쁘장한 땅꼬마 다윗이 싸우러 나온 것을 봤기 때문.

 

See. 본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수단이며, 정보를 분석하기 위한 뛰어난 방법이다. 또한,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과 분석은 특별히 사람의 심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이스라엘 군대나 골리앗이나 모두 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심리를 결정지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이 정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심리적인 요인이 반드시 결과적인 요인인 것은 아니었다.

 

보는 것을 통해 얻었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 믿음의 증명을 보는 것으로부터 찾으시는지 모르겠다. 보는 것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보편적인 습관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의 눈을 말씀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영에서나 골리앗에게서나 보편의 절차를 따라 심리적인 결과와 반응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본다. 매우 친근한 현상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역시 달랐다.

 

(삼상 17:45, 개역)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은 골리앗을 보자 놀라 자빠진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기 시작했다.

어쭈 저것 봐라. 3m짜리 인간도 아니고, 무슨 괴물 같은 놈이 하나님의 사시는 군대를 모독해? ? 감히,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 자식 오늘 잘 걸렸어. 내가 너 가만 안 두겠어!!!’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 앞에서 꼬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다윗은 엄청나게 키 크고 힘 세 보이는 골리앗을 못 본게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보았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심장은 믿음의 눈을 열어주었고, 전혀 그러한 외적인 공포가 문제 되질 않았다.

 

누가 환경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이다. 또는 성령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다. 다윗은 감동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었다. 믿음의 눈을 감고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든지, 믿음의 눈을 뜨고 환경을 우리가 물맷돌로 때려 눕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세상 속에서 옹졸한 그리스도인, 세상 앞에서 새 가슴이 되어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많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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