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반응하다_2012.04.1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3.)

 

본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어떻게 시선처리를 하느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삼상 17:24, 개역)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삼상 17:42, 개역)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골리앗이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심한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3m짜리 골리앗 형을 봤기 때문.

 

한편,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고 업신여겼다. 왜냐하면 그가 이쁘장한 땅꼬마 다윗이 싸우러 나온 것을 봤기 때문.

 

See. 본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수단이며, 정보를 분석하기 위한 뛰어난 방법이다. 또한,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과 분석은 특별히 사람의 심리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이스라엘 군대나 골리앗이나 모두 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심리를 결정지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보는 것을 통한 정보의 취득이 정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심리적인 요인이 반드시 결과적인 요인인 것은 아니었다.

 

보는 것을 통해 얻었던 결론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 믿음의 증명을 보는 것으로부터 찾으시는지 모르겠다. 보는 것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보편적인 습관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믿음의 눈을 말씀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진영에서나 골리앗에게서나 보편의 절차를 따라 심리적인 결과와 반응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본다. 매우 친근한 현상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다윗은 역시 달랐다.

 

(삼상 17:45, 개역)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은 골리앗을 보자 놀라 자빠진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기 시작했다.

어쭈 저것 봐라. 3m짜리 인간도 아니고, 무슨 괴물 같은 놈이 하나님의 사시는 군대를 모독해? ? 감히, 뭐 저런 게 다 있어? 이 자식 오늘 잘 걸렸어. 내가 너 가만 안 두겠어!!!’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 앞에서 꼬마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다윗은 엄청나게 키 크고 힘 세 보이는 골리앗을 못 본게 아니었다. 정정당당하게 보았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심장은 믿음의 눈을 열어주었고, 전혀 그러한 외적인 공포가 문제 되질 않았다.

 

누가 환경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이다. 또는 성령이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다. 다윗은 감동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이었다. 믿음의 눈을 감고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든지, 믿음의 눈을 뜨고 환경을 우리가 물맷돌로 때려 눕히든지 둘 중 하나였다. 세상 속에서 옹졸한 그리스도인, 세상 앞에서 새 가슴이 되어버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많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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