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_2012.04.19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5.)

 

(삼상 20:37, 개역)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분명 고난이다. 가끔 나는 현재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지나온 발걸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눈물의 흔적들을 떠올릴 때 깊은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왜 그렇게 많은 흔적들이 있는지. 둘러서 가야 했고, 치여서 가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내가 가장 많이 힘들어했던 것은 왜 나는 무난하지 못할까?’ 그런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별로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질문이 가장 피곤한 질문이란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원망한적도 있었지만 모짐과 교만함을 벗지 못해서이다.

 

사울이 수 차례에 걸쳐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져 가자 요나단은 다윗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정말 사울이 다윗을 죽일 의도가 있는지 시험해보고 정녕 그러하다면 활을 쏘아서 암시해주겠노라고 말이다. 만약에 활을 쏘아서 수종 드는 소년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면 다윗 너도 올 것이고. 오히려 네 앞편에 활이 있어서 나아가야 한다면 너 역시 네 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약속한 날이 되었다. 에셀 바위 곁에 다윗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슬픔에 가득 찬 요나단은 힘껏 활시위를 당겨 멀리 저 멀리 아이의 머문 자리를 훌쩍 넘겨 활을 쏘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자 저기 보라. 화살이 네 앞편에 떨어졌도다. 어서 가서 주워오라!’

 

그렇게 요나단은 외치고 눈물을 훔쳐 흐느꼈다. 다윗도 울었다. ‘그렇구나! 정녕 사울왕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가야만 하는구나!’

 

이때부터 다윗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대적 사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험난한 고난의 여정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아마도 고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성경 속에서 축복을 받은 사람들마다 험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는 것을. 보라. 다윗과 모세, 아브라함과 요셉.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 누구 하나 고난에 치를 떨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왔다. 그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종노릇하던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그 보라빛 미래를 꿈꾸며 홍해를 건넜던 그들. 그러나 그들이 만난 것은 젖과 꿀의 가나안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였다. 그렇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 삶의 축복이 아니었다. 우리는 반드시 광야를 지나야만 했다. 그러므로 광야를 만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서글픈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그는 웃을 수는 있을 것이다. 마냥 행복해하지 마시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신앙생활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광야는 비롯된다. 우리는 요나단의 외침을 동일하게 들어야 될 것이다.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이제 영광을 얻으며 왕궁에 거하던 그 사치와 호화로움과 연락하는 기쁨이 문을 닫는다. 고난의 길을 떠나야 할 그 시간이 왔다.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를 그 막막함을 벗삼아 그저 가야 한다. 피하지 말고 가야 한다.

 

다윗이 가장 먼저 떠났던 곳이 블레셋 지경의 가드였다. 사울의 영향력일 벗어나가 위한 가장 현명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생명의 직접적인 위협을 만났다.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이다.

 

아니, 저 자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할 때 그 다윗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생명의 위험을 느낀 다윗은 추태를 부려야 했다. 침을 흘려 수염에 침 범벅이 되면서 미치광이 흉내를 냈다. 천지 다윗의 모습 좀 구경해보자. 그리고 다윗은 도망쳐 모압 왕에게로 갔다. 그리고 선지자 갓을 만났다. 다윗이 들은 대답은 단 하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안타깝게도 화살은 쏘아졌다. 나를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채 말이다. 고난의 길을 시작해야 할 때 우리는 그만큼 소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직 고난을 통과할 마음의 준비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안전을 위해 적은 고난을 위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이방의 땅으로 갔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와 추태를 벌이는 자신을 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기 들을 대답은 유일하다. 사울왕이 칼을 들고 서 있는 그 유대로 들어가는 것. , 고난의 자리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도망치고 싶을 때 그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건이 온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사실 그건 한 번이 아니었다. 14년이라는 신앙의 세월이 오면서 몇 번이나 그 화살이 내 앞편에 떨어진 것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흐느꼈다.

 

, 그 외로움이라니! 정말 힘들어. 이젠 정말 지친다구. 지겹다구.’

 

그렇게 말했었다. 할 수 있다면 고난을 적게 받아보려고 가드왕을 찾아갔다. 그래서 나 역시 추태를 부렸다. 모압왕에게로 가려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유대로 되돌아가렴!’ 고난 받을 때, 고난 받는 그 땅에서 너무나 떠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맴돌았다. 그러나 결국 유대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고난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나곤 한다. 나 역시 그러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다. 소심하게는 교회를 옮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답은 유일했다. 도망치고 싶을 때, 신앙을 포기해버리고 싶을 바로 그 때, 머물러야 된다는 것. 더 이상 참을 수 없겠노라고 울부짖을 그때부터가 참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에.

 

이제 내 뒷편이 아닌 나의 앞편에 쏘여진 화살을 다시금 바라보자. ‘화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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