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일까? 시험일까?_2012.04.22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6.)

 

(삼상 24:4-6, 개역)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다. 그 처음은 엔게디 황무지에 다윗이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들염소 바위 인근의 굴 속에 은신하던 다윗과 그 일행은 굴 입구에서 매복하기 위해 들어온 사울의 군대를 만났다. 사울 일행이 잠이 들자 다윗의 사람들이 말했다.

 

올커니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를 다윗 당신에게 붙인다고 했는데 오늘이 그 기회가 온 듯 합니다. 사울 일행이 잠들었으니 지금 가서 칼로 찌르면 두 번 찌를 것 없이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칼을 들고 잠든 사울왕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칼을 사용해 사울왕의 옷자락을 잘랐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았다. 다윗이 말했다.

 

아니다.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다.’

 

다윗의 견고한 중심과 올바른 판단을 통해 다윗의 위대함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반복되어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유형 같다.

 

다윗은 분명 사울로 인해 심히 군급하고 곤란한 지경에 처했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가 쫓아다닌다고 할 때, 그리고 끝없이 피해 다녀야 할 때 그 정신적인 긴장과 압박, 스트레스. 부담감이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건 오직 다윗의 경험이었다. 그 와중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 그러나 다윗은 버젓이 그 황금의 기회를 뻥 차버렸다. 허허그러나 증명되었다. 다윗이 기회를 차버린 것이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기회일까? 시험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오해일까?’

 

다윗이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타이밍을 상고해보자. 다윗의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분명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분명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즉각 떠올렸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언제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다윗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며 그때가 되면 원하는 대로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앤게디 황무지의 어느 동굴에서 사울을 만났을 때 다윗의 일행들은 바로 예전의 계시를 본능적으로 상기시키며 바로 오늘이 사울왕을 죽이는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명백했다. 미리 받은 암시도 있었을 뿐더러 절묘하게 사울의 일행이 같은 동굴의 입구로 들어와 거기서 잠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를 놓친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보.

 

그러나 놀라운 다윗은 그 기회를 천운의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모두가 시험에 빠져들고 있을 때, 다윗이 그 허황된 착각을 뻥 터트렸다.아니다. 오늘은 그 기회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주를 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오늘 복수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천운의 기회가 온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시험이 온 것이다. 오해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연속성 안에는 수많은 사건과 징조들이 있다. 우리는 그 징조를 잘 보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상황들 앞에서 이것이 징조라고 생각하지만 아닌 것으로 드러난 것이 많이 있었다. , 우리는 기회인지 시험인지 잘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백한 답을 주신다고 단정해버림으로써 보여지는 현상을 섣불리 하나님의 징조로 받아들이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고, 시험에 불과하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기도 한다. 남은 건 쓰라린 좌절감.

 

때로는 우리의 감정이 문제를 유발한다. 누군가와 갈등이 있을 때, 마치 다윗과 사울처럼. 누군가를 미워할 때. 또는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고 싶지 않을 때, 어떤 힘의 대치와 힘의 논리가 견제될 때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버티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어떤 징조를 붙잡으려다 낭패를 당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참 어렵지만. 정리해보면 분명 그리스도인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겪는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것이 기회인냥 행동했다가, 기회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들을 경험한다. 기회가 아닌 것을 기회로 오해하는 것이다. 오직 정직한 양심만이 그것을 구별할 수 있다. 다윗이 처한 상황에서 그의 일행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누군들 그 상황에서 계시된 암시도 있었는데 이것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오직 단 하나의 명백한 진리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치는 것은 죄다.’라는 중심을 갖고 있음으로 모두가 오해하고 있을 때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사실 많은 부분에서 아직도 여전히 정직하지 못하다. 이기적이고 겸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다양한 장면들에서 분명히 발견하고 배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를 반복해서 보고 배우면서도 그것을 내 행동의 분명한 기준과 근거로 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럼으로 시험이 왔을 때 그것을 기회인 줄 착각하고 그릇된 우를 범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참 그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두렵다. 얼마나 무지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들. 세상의 것들을 분별해서 취하고, 삼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정말 그리스도인의 참된 윤리를 명백히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탕발림에 불과한 세상이 주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처럼 착각하고 덥석 물어버린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와 기준을 분명히 생각해야 할 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소멸된다고 했다. 영원한 것에 관계되지 않는 모든 것이 사실은 불에 타서 사라지는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기회와 징조들. 정말 이는 기회일까? 아니면 시험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직한 양심을 주셔서 우리의 눈을 밝히시기를!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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