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_2012.04.2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7.)

 

(삼상 24:17-19, 개역)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복수는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복수는 어떤 것일까? 상대방이 나에게 서운하게 대했을 때 나도 그 사람에게 서운하게 대하고 싶어진다. 그게 복수다. 누군가 내 배려를 받아주지 않았을 때라든지. 내가 배려하는 그 사람은 나를 배려해주지 않을 때, 동일하게 배려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게 복수다.

복수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복수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습관이다.

 

사울의 외침처럼 다윗은 학대를 당했다. 복수를 위한다면 다윗은 마땅히 사울을 들이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그리하지 않았다. 사울은 왕이었고,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이 충분히 자기를 죽이고 복수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을 보면서 감탄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굳은 양심의 사울이 그거라도 알았으니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랫사람을 그렇게 학대하면서도 자신을 선대하는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잔인하다는 말은 그럴 때를 위함 일거다. 하나님은 복수 금지주의를 표방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중에 하나는 복수하지 말고, 심판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수는 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좋은 모형이셨다. 당하셨지만 복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셨다. 사울의 외침처럼 사람이 자기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도 강도 만나 반 죽음에 이른 유대인을 치료해주었다. 친히 자기 비용을 들여서 말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셨다. 선한 이웃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예수님은 친히 화목제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해 앙갚음하지 않으시고, 보복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셨다.

 

그리스도인은 복수금지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살면서도 종종 복수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러나 복수할 때 화가 임한다. 이스라엘에서 한 레위인이 그 아내가 베냐민 비류들에게 강간당하고 죽임을 당하자 12덩이로 몸을 잘라 12지파에 보내어 베냐민 지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래서 11지파가 베냐민 지파와 싸웠다. 그러나 그 첫 전투에서 11지파가 비참히 패배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이 스스로 심판하기 위해 싸웠다. 나중에 승리는 하였지만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이즈러져서 낭패에 봉착했다. 이처럼 복수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쓰라린 것이고, 이후에도 큰 낭패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몰라도 교회 안에 날 홀대하는 한 자매님이 계시다. 꽤 시간이 되었다. 내가 작년까지 부장교사를 할 때 교사 여러 명에게 나에 대해 안 좋게 말하곤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교사도 거기에 동조를 안 해줬다고 한다. ‘아니예요. 병훈 형제님. 알고 보면 전혀 달라요. 그렇지 않아요.’ 어떤 형제님은 그러셨단다. ‘자매님이나 잘 하세요. 쓸데 없는 소리 하고 다니지 말고.’ 만약, 동조해주는 교사가 있었다면 내가 더 곤란해졌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3자를 통해 들려오는 그 자매님의 행실에 대해 일절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어느 날은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넌 부장교사 하느라고 그렇게 고생하고 힘드는데, 그런 얘기를 듣고…’ 그 자매님이 어머니께도 대놓고 몇 번 타박을 줬다고 한다. 그때마다 얘기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니 제가 정직하면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 분의 집념도 대단하다.

 

얼마 전까진 몇 번 마주칠 때 마다 요즘 안 좋은 일 없냐고 친히 물어봐 주셨다. 그 질문의 의도는 단순했다. 뭐 좀 안 좋은 일 있다는 소식 듣고 싶은데 없냐는 거다. 어느 날 가정모임을 가기 위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주차공간이 전혀 없는데 많이 늦어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그 자매님을 만났다. 보자마자 대뜸 얘기하셨다.

누가 싸가지 없이 주차하나 싶었더니 형제님이였군요!’

, 다시 내려가서 바로 주차해야죠

그리고 집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와 주차를 옮겼었다. 씁쓸했지만 아무 대면할 말이 없었다. 다 내 부덕의 소치일 뿐.

 

다윗은 인신공격하는 시므이를 놓고 말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저주하라 하심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그러나 다윗도 화가 날 때는 있었다. 나발이 다윗의 공덕을 알아주지 않고, 무시했을 때 격노했었다.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기 위해 나아갔다. 그걸 보면 다윗도 상황에 따라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들 처럼. 나발정도는 쳐 죽일 수 있었다. 아마,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고 권력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격노한 다윗의 군대 앞에 나발의 총명한 아내가 나아왔다. 그녀가 얼마나 지혜로운지는 그 노중에서 다윗을 중재하고 다스리는 그녀의 이 한 마디에서 드러난다.

 

(삼상 25:31, 개역)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정확히 상기시켰다.

지금 너무 흥분해서 굳이 살인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려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했다가는 나중에서야 무죄한 피를 흘리고 복수를 일삼았구나 싶어 슬퍼하고 낙심하실 겁니다. 지금 참으면 나중에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이 온전하실 겁니다.’

 

아비가일의 위대한 총명함과 중재에 감탄이 난다. 그렇다. 격노하고 흥분할 때 우리는 복수하려고 한다.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항상 그 뒤에는 슬픔과 마음에 걸림이 남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 촌철살인 같은 한 마디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발을 심판하심으로써 정녕 다윗은 그 칼을 쓰지 않고도 복수할 수 있었다.

 

(삼상 25:39, 개역)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격노하고 흥분해서 복수하고 싶을 그 때 참을 수 있다면 우리는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을 말이다. 이 날의 교훈은 다윗의 평생에 큰 교훈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후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이 십 황무지에서 조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칼을 거두며 다음과 같이 말했고, 그 말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삼상 26:10, 개역)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나발에 대한 복수심을 거뒀던 그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는 것을 보면서 사울에 대한 복수심도 계속해서 거둘 수 있었다. 하나님이 사울을 치실 것을 더 확고히 믿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의 말처럼 실제로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패전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윗왕이 된 이후에도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 시므이에게 복수하지 않았다. 확실한 경험을 했던 다윗은 복수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우리가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복수해주길 바래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복수할 수 있을 때 자신을 삼가한다면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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