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순종하는 삶_2012.05.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2.)

 

(열왕기상 9:2-7, 개역)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솔로몬의 시대에 웅장한 성전이 완성되었다. 지난 긴 세월을 그저 성막에서 임재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완성된 통일국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제대로 건축된 성전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시게 되었다. 거대한 낙성식과 번제가 아울러 드려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구름으로 나타나셨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처소이자,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는 곳. 무엇보다 하나님과 인간의 거룩한 사랑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훗날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말씀하시면서 참된 성전이 예루살렘의 건물이 아닌 구원받는 성도 각자가 될 것임을 암시해주셨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해 말씀하셨다.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그렇다.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은 성전을 향했다. 이는 곳 구원받은 성도를 향하는 하나님의 눈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항상 감찰하신다. 침 삼키는 그 찰나도 보신다. 늘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바라보신다. 그만큼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냥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성전이 완성되었지만 조건을 말씀하셨다. 온전한 마음.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것.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율례를 지키는 것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거룩히 구별된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린다고 했다. , 성전을 완성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는게 아니었다. 비록 성전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기 위한 최상의 조건으로 완성될지라도 예배하는 정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이 정상적으로 수반되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 성도가 되었다는 것. 그것이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전히 변치 않는 경외와 순종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비록 우리가 구별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던져버리심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경각시킨다.

 

성도라는 것. 거룩히 구별된 무리.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이 아니며,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완성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의무와 조건이 수반된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 율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 오히려 그렇지 못했다는 회개하는 삶. 하나님께서 받길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다. 멸망은 없지만 유기하심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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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태도_2012.05.14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1.)

 

(삼하 13:20-21, 개역) [20] 그 오라비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되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 이에 다말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21]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다윗에게는 많은 처와 그 소생된 자녀들이 있었다. 한날은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을 연애함으로 부정을 저지르고 말았다. 암논은 간교한 친구를 둔 덕분에 거짓 병든 체하다가 다말을 불러들이도록 요청한 후 성폭행했다. 그리고 그녀를 버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왕은 심히 노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뿐이었다.

 

신명기 27 22절에 따르면,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고 했다. , 암논은 누이 다말을 범함으로써 율법상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다윗왕은 암논의 그런 극단적인 죄악에도 불구하고 심히 노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아무런 후속조치, 정당한 대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다말의 친동생 압살롬으로 하여금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복수심을 키우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이 훗날의 더 큰 비극을 초래하는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어째서 다윗은 암논의 죄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미온적으로 대처해버리고 말았던 걸까? 다윗의 우유부단한 처신에 대해 생각해볼 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있다. 다윗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던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명백하다. 다윗은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황하고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과거에 자신이 밧세바를 범했던 그 과오를 떠올렸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과오는 다윗에게는 하나의 핸디캡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암논의 죄에 대해 보다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한켠에서 그는 암논의 젊은 혈기와 욕망에 대해 헤아렸던 것이다.

 

또한,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의 허물에 대해 애틋함이 남달랐을지 모른다. 긁어 부스럼된다고 암논의 죄가 참혹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순화시켜 마무리 짓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그는 지나친 관용을 허락했다. 뿐 아니라 그의 왕가의 체면이나 명예. 평탄한 왕가에 소란이 일거나 명예가 실추되기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다윗은 좀 더 냉철하지 못했다. 그럼으로 그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훗날을 어지럽게 만들어 놓았다. 만약, 다윗이 근실히 암논을 징계했더라면 압살롬의 분노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극한 복수심까지는 싹트지 않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 이처럼 우리 역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할 때를 알고 있을까? , 그렇게 하고 있을까? 사람의 감정은 매우 간교해서 감정만큼 사람을 기만시키는 것이 없다. 불행히도 사람이 감정적인 피조물이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것은 종종 비극의 이유가 되곤 한다. 때로는 지나친 배려가 마땅히 경계시켜야 할 것을 방종해버릴 수 있다. 예수님도 분명한 태도를 강조하셨다.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그렇다.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언젠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으면서 그의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들이 실려 있다. 그 편지의 한 글귀에 이런 조언이 있다.

만약, 남편이 그릇된 결정을 하고 양심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려고 할 때는 이혼을 각오해서라도 남편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반대할 줄 알아야 된다. 그런 아내는 남편의 존경을 받는다.’

 

그렇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두려운 일이다. 부부가 이혼을 각오하면서까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 보자. 어떤 부부는 남편이 교회의 뜻에 대항해 그 신앙을 저버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남편을 제어하지 않고,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 아내는 존경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이 흔들릴 때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교회의 편에 서서 남편을 다시 회개하도록 이끄는 아내가 있다. 존경 받게 된다.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에는 정녕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간편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 고난이 따르는 것이란 의미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겪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권위가 서게 되는 것이다. 고난 없이 질서는 없으며, 고난 없이 말씀의 권위는 견고해지지 않는다.

 

(삼하 14:32, 개역)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 사람을 보내어 너를 이리로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어 고하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함이로다 이제는 네가 나로 왕의 얼굴을 보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다윗의 미온적인 태도가 기어이 불행을 자초했다. 압살롬이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다윗왕은 압살롬을 대면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다윗이 압살롬에게 행했던 유일한 징계였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 역시 현명하지 못했다. 암논은 다윗왕의 징계를 받지 않았지만 자기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압살롬의 칼날에 피 흘려 죽었다. 그리고 압살롬이 대가를 치뤄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역시 압살롬에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제 압살롬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 새로운 복수극을 꿈꾸고 있었다. 이후 다윗이 다시금 압살롬의 칼 날을 피해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는 참혹함을 겪게 된다. 도망친다는 것만큼 다윗에게 몸서리치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죽음보다도 더 싫은 것이었다. 정말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살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다윗이 사람의 손은 피하겠다고 했겠는가.

 

압살롬은 암논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타는 복수심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 , 그는 전혀 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비록 그의 외모가 그 누구보다도 출중하고, 뛰어났는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윗왕과 대면하지 못하는 그의 불평을 들어보자.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

 

그는 다윗왕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복수심에 불타 형을 죽인 것에 대해 슬퍼하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의 얼굴을 보지도 못할 거면서 대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라 하긴 왜 했냐는 것이다. , 못마땅하다 이것이다. 또한, 만일 죄가 있으면 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복수심과 형을 살해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죄악임을 인정치 않았다. 그에게 암논을 쳐 죽인 사건은 마땅한 응징이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정당했다. 다윗은 분명, 이러한 회개치 않는 압살롬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그를 징계해야 했고, 철저히 회개하도록 함으로써 압살롬이 재기할 수 있도록 훈육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암논에게와 마찬가지로 압살롬에게 조차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충분히 그를 근신시키지 않은 채 용납해버림으로써 화를 좌초했던 것이다.(압살롬의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압살롬과 대면해 그에게 입맞춤.)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한다. 관용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물론, 심판이나 징계와 같은 조치는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되고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군가를 근실히 징계한다는 것이 쉽게 이뤄져야 할 일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 심판보다는 긍휼이 더 우리에게 가까운 의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동일한 잘못을 할 수 있고, 모든 허물에 대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너그러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분명한 태도조차 무시해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할 때 마땅히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는 마음가짐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 용서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기 위해 징계도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 만큼 탁월하신 분은 없다. 증명해보자. 하나님께서 얼마나 다윗을 사랑하셨는가. 하나님은 다윗의 정직함과 그의 양심적인 면, 영적감수성을 특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다윗이 범죄했을 때 철저히 징계하심으로써 흠 없이 회복되고, 재기하도록 도우셨던 것이다. 다윗을 다스리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하나님의 태도는 매우 혹독했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에서 연유된 것이었음은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하기에 분명한 태도를 취하셨다. 그리고 원하는 정직함을 재발견했을 때는 아낌없이 긍휼과 사랑을 베푸심으로 다윗을 감동시키셨다. 더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다. 우리 역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명한 태도에 대해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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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져 버린 외식_2012.05.13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0.)

 

(삼하 12:9-10, 개역) [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다윗은 그러했다. 그것은 다윗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언이었다. 위대한 다윗왕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증언이 적잖이 다윗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단 사실이다.

 

다윗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감수성이 있었다. 그는 시인이면서 노래 잘하는 자였다. 그는 영적 감수성도 매우 뛰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이었다. 그가 사울의 칼 아래 도망칠 때 굴 속에서 사울의 겉옷만 살짝 베었을 뿐임에도 가슴 아파했다. 그가 왕이 되어 백향목 궁에 거할 때 성막에 거하시는 언약궤를 보면서 슬퍼했다. 그만큼 그는 정직하고 양심적인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송구스러운 마음을 늘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책망이 네가 나를 업신여겼다.’였다.

 

사실 다윗은 충분히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절대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건 다윗 스스로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다윗 편에 설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 앞에 섰을 때 아무런 변명이 필요 없었다. 다윗은 인정하고 회개해야만 했다. 업신여기고 비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대상을 향한 마음 속에만 있는 경멸일까? 그 상대를 향해 표현해내는 무시를 말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 누구든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군요. 하나님을 비웃고 조롱하지 마세요.’라고 말한다면 얼굴이 붉어질지 모른다. 교만하군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다뇨? 가당치도 않아요.’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을. 성경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여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분명 그것이었다. 어째서?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그릇 범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범함으로써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고의적으로 죽게 함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겼다. , 다윗은 그의 이기심을 위해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바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다윗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비웃거나 업신여겼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유념치 않았던 것. 그것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책망 앞에서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자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 우리는 우리 삶의 어느 부분에서는 거의 습관적으로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 물론, 그것은 두드러지게 띄는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서글픈 것이다. 우리의 무지한 눈이 여전히 그 잘못을 방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전히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되어 있다.

 

우리의 입술에는 찬양이 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다. 교훈을 받으며, 기도하는 삶을 산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한 켠에서는 말씀을 어겨버린다. 그것도 익숙하게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방금 전 너는 또 나를 업신여겼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게 네 습관이구나.’

 

앞에서 대 놓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이다. 그러나 그만큼 그 죄가 쉽게 드러나고 명백해지기 때문에 회개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숨은 죄가 너무 많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외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거짓의 모습이 우리 뒤에 숨어 있곤 하다. 익숙해져 버린 외식.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가장 위험한 세력 중에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서 그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우리도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우리기 말씀을 어길 때마다 상기시켜야 한다. 우리가 어길 수 있는 이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내가 율법을 어길 마다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지 않고 있구나. 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구나. 그것을 모른다는 것부터가 자기기만이구나. 나는 나를 속이고 모두를 속이며, 하나님을 속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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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무서운 교만_2012.05.8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9.)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다윗이 언약궤를 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다윗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에 북받쳐 춤을 추고 뛰놀았다. 정말 다윗이 누렸을 감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조금도 상상되지 않는다. 수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 10년 동안 왕의 칼을 피했던 도망자. 배신과 무시. 조롱. 고통의 숱한 세월을 지나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이다. 모두가 기뻤다. 그러나 정녕 모두는 아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미갈이었다.

 

결코 익숙치 않다. 미갈은 다윗의 처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금의환향을. 재기를. 성공을.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왕비라니. 그러나 그럴만도 했다. 다윗이 도망자 신세가 되었던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갈은 다른 남자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 긴 공백의 시간들이 미갈로 하여금 다윗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미갈이 다윗의 수난을 함께 겪지 않았으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리스도의 삶에 함께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공감한다.

 

아무튼 미갈은 다윗을 창밖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다윗을 맞으러, 언약궤를 맞이러 나오지도 않았다. 창밖으로 서커스를 구경하듯 수많은 인파와 언약궤의 입성과 베옷을 입은 채 기뻐 날뛰는 다윗의 천박한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앙의 구경꾼들 역시 신앙의 일꾼들을 바라보며 비웃곤 한다. 초라하고, 째째하고 소인배들 보듯이 한다.

 

미갈이 마음에서 다윗을 비웃었다고 했다. 무서운 표현이다. 그리고 익숙한 표현이다. 다윗이 겉옷도 아닌 베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 미갈의 눈에는 심히 상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왕의 체통이 아니었다. 그 날 언약궤의 입성과 수많은 인파의 찬양과 행렬, 다윗의 기쁨과 감동 그 모든 것들이 미갈에게는 꼴불견 같은 것이었다. 비틀어진 마음.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참다 못한 미갈이 비꼬아 말했다. 마음에서 비웃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보란듯이 비꼬아 쏘아붙였다. 그러나 다윗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양심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에 감동되어 춤을 추고 희락하였기 때문이다.

 

미갈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 악한 마음이 종종 내게도 있음을 발견한다. 때때로 나 역시 좀 더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삐딱하게 보기도 하고, 남의 기쁨과 영광을 공감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리고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을 때도 있었다.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길 자격이 있었을까? 비웃고 비꼬아 말할 자격이 있었을까? 감히 왕을.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업신여기고, 비웃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 내 곁에 있는 형제, 자매님이다. 그러나 그들을 대할 때 정직하지 못한 마음일 때가 있음을 자백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비꼬아 말하는 것을 겪기도 한다.

 

미갈의 그 비웃음. 그 심중의 업신여김은 명백히 교만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교만! 그래서 그녀의 태를 하나님은 닫아버리시고 죽는 날 까지 자식이 없었다. , 여성이라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상실당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우리가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형제, 자매 개개인을. 그리스도인을 심중에서 업신여기고, 비웃고, 질투한다라면 그것은 명백한 교만이다. 그 거짓된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 슬퍼하고 자백해야 한다. 내어놓아야 한다.

 

미갈의 그 마음 속 뿌리 깊은 교만에서부터 불거진 오만과 결과를 다시 보자. 그리고 내 마음을 살피고 두려워하자. 그리스도인에게 교만은 귀신보다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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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확 드네_2012.04.2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38.)

 

(삼하 6:3, 개역) [3]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다윗왕이 통일 이스라엘의 국왕으로 공식 즉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진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이끌어 오고자 했다. 아마,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는 오랜 세월 자신의 집에 모셔져 있었던 궤를 수레에 싣고 이동을 시작했다.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누군가 친숙은 경멸을 낳는다고 했던가.’ 어떤 영문에서인지 잠잠히 수레를 이끌던 소들이 날뛰었다. 놀랐던 것 같다. 그래서 수레에 실린 언약궤가 떨어질 뻔하였다. 즉시 웃사는 손을 내밀어 궤를 붙잡았고, 거룩한 궤에 손을 댄 웃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언약궤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속죄제사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 그래서 기름을 부어 성결케 했고, 아무도 만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의 위대한 상징이었다. 이동을 해야 할 때는 양쪽에 금을 도금한 긴 채를 연결시켜 그 채를 잡고 사람이 직접 인력으로 운반해야 했다. 그러나 웃사와 아효는 채를 걸어 들지도 않고 수레에 싣고 소의 힘으로 그것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웃사는 궤를 만지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집안에 보관하던 언약궤가 차츰 웃사의 마음에서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무뎌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언약궤를 옮길 때 조차 그것을 채로 연결해 들고 옮기는 것조차 귀찮아진 것이다. 신앙이 오래되고 익숙해지다보면 자칫 안일과 나태에 빠진다. 매너리즘.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에 대해 무뎌져 간다. 그럼으로 신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윤리조차 퇴색되기도 한다. 마땅히 짊어져야 할 궤를 수레에 맡겨버린다. 그만큼 신앙에 대한 깨어 있고, 성실하고 두려워하는 심령이 경솔하고 안일해져버린다.

 

소가 왜 나곤 타작마당에서 뛰었던 것일까? 그것은 웃사의 그러한 퇴색되어 버린 신앙과 예배의 안일한 정신을 때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리고 웃사의 그러한 어두운 정신은 곧 언약궤를 바라보는 모든 이스라엘의 퇴색된 신앙의 거울이기도 했다.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지성소에 대제사장만 1년에 1차씩 들어갈 때만해도 언약궤보다 더 신령하고 엄위하고,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언약궤의 명성과 권위는 실추되었다. 모두에게서. 그래서 고작 사람들이 모셔서 들지도 않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려 덜거럭 거리며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병자를 태운 앰블런스처럼. 그러니 하나님께서 노하실만 했다.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언약궤를 만진 웃사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을 보고 들었다. 다윗왕도 심히 두려워졌다. 그래서 다윗성으로 옮기려던 것을 돌이켜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냈다. 석달 뒤 하나님의 노가 풀리자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언약궤를 채로 연결해 메고 옮기기 시작했다.

 

마치 잠들어 버린 언약궤가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실추된 언약궤의 권위와 명성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 언약궤가 권능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 임재의 현현임을 재확인했다. 정신이 확 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예배의 정신과 태도로 언약궤를 모시기 시작했다.

 

신앙에 익숙해지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정신, 예배의 태도와 삶의 윤리가 퇴색되고 희미해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삶의 윤리와 태도가 변질되기 시작한다. 고난에 참예하고, 마땅히 주어진 의무를 짊어져서 메고 살아가야 할 것이거늘 수레에 맡겨 버린다. 고작 소 몇 마리들을 고용해 편안하게 고난 없이 예배드리려 한다. 그렇게 얼마쯤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소들을 날 뛰게 하실 때가 온다. 우리 신앙의 그릇된 예배방식과 형식에 제동을 거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당황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궤에 함부로 손을 댄다. 객기이다. 신앙의 오류와 신앙의 객기를 부릴 때가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의 따끔한 매질을 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차! 잃어버린 예배의 정신. 너무나 미혹되어버린 어두운 영적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한다. 정신이 확 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언약궤를 맨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권위를 재확인한다. 한동안 죽었던 예배의 정신이 되살아난다.

 

웃사의 무뎌짐과 매너리즘. 객기와 경솔함. 하나님의 다시 나타나심과 징계. 회복.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과 신앙의 섬세한 감수성에 대해 어두워져 가는 현재의 내 영혼과 무뎌진 예배의 삶과 태도에 대해 교훈을 던져준다. 이제라도 수레에 실었던 궤를 다시 메야 된다. 얼마 못 가서 소가 날 뛸 것이고, 그러면 무사안일한 내가 즉각적으로 손을 뻗치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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