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되는 실존_2012.07.0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7.)

 

(왕하 1:2-4, 개역)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3]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

 

아하시야왕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에게 묻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의 대조되는 신의 모습을 본다. 하나님의 일찍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마땅히 하나님은 만유의 신이시며, 천지의 주재시지만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직접 계시하시면서 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처하셨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아하시야왕이 다락 난간에서 실족하여 떨어져 다치게 되었다. 추락했기 때문에 분명 그것은 신체적으로 매우 큰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때, 분명 골격계통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뼈가 부러진다든지, 탈골되든지 골격쪽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몸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심장쇼크나 근육파열, 내장쪽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아무튼 왕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기간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태로 간호를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하시야왕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는 문제를 놓고 신에게 그 답을 구하기로 맘 먹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그 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아하시야왕의 그릇된 행동을 분노하시며, 죽이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왕에게 통탄스러운 불만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분명 하나님이 계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명백히 실존해 있었다. 그러나 철저히 하나님은 무시당했고, 에그론의 거짓 우상이 존대받았다. 우리는 두 가지의 빗나간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실존하고 계셨다. 그러나 망각되었다. 바알세붑은 실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받았다. 분명히 실존하시는 하나님은 망각된 신이 되어 버렸고, 조금도 실체하지 않는 바알세붑은 실존하는 신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주객이 전도된 엉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늘날의 하나님도 때로는 비슷한 경험에 놓이게 되는 것 같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 우연이 없다라고 말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간섭과 주권에 대해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생활의 많은 순간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하시야왕은 불신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실존을 망각하고 우상을 인정한 그릇된 대가로 인해 저주받아 죽었다. 그는 침상에 병들어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버림받았다. 아하시야는 특별한 불신자였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불신자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하시야와 같은 특별한 불신자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많은 구석에서 우리에게도 상습적으로 이뤄지는 불신앙적인 기질과 행습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불신자는 아니지만, 매우 불신자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능력에 걸림을 주는 찌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분명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님이라고 부르며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과 간섭을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다가오시고, 개입해주시길 원한다. 우리가 보다 나은 겸손과 순종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하나님은 실존하신다. 명백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우리는 그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아주 분명하게 망각해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계획에 너무 흥분될 때가 있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에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우리는 성급하다. 하나님께 묻고 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급해한다. 그러므로써 하나님은 망각된다. 적어도 그 찰나와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으로 인정받지 못하신다. 그러므로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초래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례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불거지게 되곤 한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자아또는 고집이라는 바알세붑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그 답을 기다리는 수고를 귀찮아하거나 꺼릴 때가 있음으로 해서 자기생각이라는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간다.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한다. 죽어야 될 자기생각, 버려야 될 자기주장이 버젓이 주장하고 우리를 주관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숭배한다. 그 신을 인정한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통탄스럽게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아하시야만 바알세붑에게 물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그 어디를 바알세붑은 없다. 그 바알세붑은 내 안에 있을 뿐이다. 실존하지만 사실은 망각되어져 버린 하나님. 실존하지 않지만 인정되고 있는 바알세붑. 그 놀라운 반전과 기괴한 변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그 행동의 습관들 속에서 종종 재현되고 있는 어두운 실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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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완전_2012.06.26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6.)

 

(왕상 22:43, 개역)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또한, 성경만큼 그리스도인에게 완전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명령도 없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완전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론, 어떤 기업이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완전에 대한 인간의 노력과 필요를 말하지만 그것 자체가 사람 자신의 완전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 본질을 겨냥해 완전에 대해 권면한다.

 

사실 성경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요구를 곰곰히 생각해볼 때, 그것은 매우 지나친 요구라 생각되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완전이 있음을 아울러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적어도 그 신분과 자격에 있어서는 말이다.

 

한낱 지옥 갈 죄인에 불과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죽으심과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완전한 의인으로 새로움을 덧입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 자체가 완전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말이다. 예수님의 완전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로를 덧입음으로 천국 갈 자격과 신분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완전을 동일하게 덧입음을 얻는다. 그 점에서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윤리와 도덕, 사회와 인격의 위치에서 조명해 볼 때 여전히 그리스도인도 불완전하고 형편없을 때도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연구하고 기도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를 재발견하고 따르는 것 그 모든 것 안에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걸맞는 완전의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게 된다.

 

성화되는 것이나 경건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곤란 중에 하나다. 우리는 생각보다도 경건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혹 우리가 이방인들과 같은 술, 담배, 간음, 사기, 도둑질과 같은 이런 류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마냥 오산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신분이 다르다는 최소한의 구심점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치열한 싸움이 날마다 매순간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히 12:4, 개역)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피 흘리는 듯한 싸움의 계속이라 할 수 있다. 악하고 음란한 것, 세속의 즐거움을 피하는 눈, 욕정이 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기도하는 것. 그 순간순간마다. 정직에 대해 갈망하고 고민하는 것.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비롯한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육신적인 즐거움에 대해 절제하고 삼가 취하는 것. 그 모든 것들 안에는 단편적으로 볼 때 극단적인 자기부인, 금욕주의에 가까운 생활의 양식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들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그러한 삶에 대해서 ‘그건 너무 엄격하지 않나요?’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경건의 위대함과 능력은 그러한 치열한 금욕과 자기절제, 자기부인 안에서 가장 강력해지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경험해 보았는가. 그리고 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완전에 대해서는 말할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그것은 거의 실제적인 경험이다.

 

본문에서 언급한 한 구절이 바로 이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여호사밧왕은 비교적 올바른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노라고 증거해준다. 그러나 열왕기의 많은 왕. 즉, 유다의 왕들 중 선한 왕들로 묘사된 많은 왕들 모두가 한결 같이 피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산당이었다.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하였기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당은 과거 우상숭배하던 왕들이 우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산당이었다. 선한 왕들 조차 사회를 개혁하는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당만큼은 폐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그곳에서 백성들의 일부는 우상숭배를 지속할 수 있었다.

 

잠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잠 25:4, 개역)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쓰기에 부족한 그릇인 이유는 단순하다. 여전히 찌끼가 있다. 누군가는 많이. 누군가는 적게. 누군가는 거의 옥의 티 처럼 작게. 그러나 어쨌든 완전한 사람이란 그토록 적은 것이다. 물론, 그 치열한 완전을 나 역시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정말 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을 반성해볼 따름이다.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때로는 뜨거운 가슴으로 타올라 주님을 더 완전히 섬기고 싶노라고 최선을 다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 켠에서는 숨은 우상숭배와 불경건과 나태함과 안일함이 또아리를 틀고 살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 그리스도인의 경건이 그토록 어려운 일이라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한다라면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습에 대해 그 어느 때라도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경건을 놓고 만족해 왔던 적이 많은지.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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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하는 그리스도인_2012.06.11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5.)

 

(왕상 20:40, 개역) 『종이 이리 저리 일 볼 동안에 저가 없어졌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아람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전세는 아람에게 기운 듯 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이스라엘은 아람의 상대가 되기엔 부족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과 그 나라의 신앙은 우상숭배로 인해 바닥에 있었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람의 벤하닷은 자신의 군대의 우월성을 믿고 전쟁에 임하기도 전 이미 이긴 것처럼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협박했다. 그때 아합왕은 아주 인상 깊은 말을 하였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버는 자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다.’

 

, 누가 이길 것은지는 싸워봐야 아는 것이란 말이다.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다 싸워서 이긴 군대가 갑옷을 벗는 것처럼 여유롭게 오만을 부리지 말란 말이다. 이 말처럼 하나님은 아합왕을 이기게 하셔서 아람군대를 정벌하고, 벤하닷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빼앗긴 땅을 다시 되돌려줄 것을 허락받았다. 예기치 않은 좋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에는 분명 남다른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결코 아합왕이 이뻐서 그렇게 해주신것이 아니었다.

 

승리한 아합왕은 벤하닷을 풀어주었다. 부친의 세대에 빼앗긴 땅을 돌려받기로 약조했기 때문에 선심을 베푼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합왕이 이기게 해준 것은 아람왕 벤하닷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아합왕이 얻은 전쟁의 승리는 벤하닷을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합왕은 그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말씀과 징조가 임했다. 선지자의 한 사람이 그에게 변장하고 나타났다.

 

왕이시여, 종이 전장 가운데 나갔더니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을 끌고 내게 오더니 이 사람을 지키되 만약 잃어버리면 생명을 대신할 것이고, 잘 지키면 은 한 달란트를 줄 것이라고 하더이다. 그래서 제가 흔쾌히 약조를 하고 그 사람을 지키는데, 제가 이리저리 일을 보고 있는 동안 사라졌나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아합왕은 짧고 단조롭게 대답했다. ‘네가 스스로 결정해서 한 약조이니 그대로 당하여야 할 것이다.’ (당연한 것 아냐??)

 

그 말은 들은 선진자는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고 아합왕에게 경고했다. ‘왕이시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멸하려고 한 벤하닷 왕을 당신이 살리셨으니 저의 목숨을 대신해 왕이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왕은 자신이 했던 말을 명백히 상기시키게 되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

 

인간은 결정하는 존재이다. 다른 의미에서 선택하는 존재이다. 선택 받는 것보다는 선택한다는 것이 자유의지와 자발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에게 더욱 적극적인 의미일 것이다. 인생은 선택하는 것의 연속이며, 반복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한다라는 의미는 더욱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에 의미 있는 연속적 행위이기도 하다. 세상, 육신, 정욕, 마귀. 그 모든 유혹과 선택의 시험 가운데서 영적인 것을 분별하여 취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이다. 그러나 큰 것에서부터 매우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깨어서 정직하지 못하다면 수없는 선택의 실수를 번복하기도 한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환경과 현상들. 세상과 신앙이라는 분명한 기로에 세워진 것들이 너무나 즐비하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너무나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삶의 수많은 모양들이 사실은 하나 하나 은밀히 상고해보면 영적인 분별과 의미부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기도 없이, 고민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쫓아 선택하기를 반복한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였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아합왕의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렸던 그 일례를 통해서 우리 역시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한 어떤 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말이다. 적어도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이 아합왕에게는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것이었겠지만, 그것에서부터 그에게 특별한 시험과 기로에 직면해 있었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릇된 선택을 함으로써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되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하심 아래에서 상식적인 선상에서 볼 때, 극단적인 결과를 빚는 선택이나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신중해질 수는 있다.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것들. 내가 현재 살피고 있고, 경험하며, 맞닥뜨린 현실 앞에서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내게 다가올 것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해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게 치명적인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되진 않을까? 우리의 질문은 바로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요구된다. 아합왕이 전쟁에 이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과 그 전쟁의 승리로부터, 이후의 일어난 벤하닷과의 접촉과 흥정으로부터 하나님의 뜻하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훗날의 파생될지 모를 어떤 위험들을 고민할 줄 알았더라면 그는 좋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런 걸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얻을 교훈을 위해 표현하자면.)

 

우리 앞에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다. 어떤 것은 위기스럽다. , 때로는 위기스러움을 잘 극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 후에 그리고 그 다음에 파생되는 현상들을 신중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작은 구석구석 하나하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길 구해야 한다.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들에서 착오가 최소한으로 제한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지라도 실수하는 우리의 습성은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라는 말씀의 공포로부터 보다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나온 발걸음과 그 자취들에서부터 자신의 경건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던 판단과 결정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감당해야 하는 시련과 어려움을 상고해본다면 분명 더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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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충분치 못하다_2012.06.05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4.)

 

( 1:4-5, 개역)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친히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증명하고, 증거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수많은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확신했다. 명백한 증거 앞에 탄성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충실한 증거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미 그들의 마음에 심기어진 확신은 명백했다. 그들은 얼마든지 뛰쳐나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흥분되었고, 격동되었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임마누엘의 분명한 현현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자제시키셨다.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제자들은 좀이 쑤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모든 이들에게 증명과 증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증언이라 할만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직도 미흡하다고 하셨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결핍이 있음을 일깨우셔야 했다.

 

성령세례가 필요했다. 성령세례로 덧입히어 질 때까지 좀이 쑤셔도 참고 기다려야 했다. 어째서? 성령세례가 없는 증거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명백한 확신, 분명한 논리, 확실한 증거 그 모든 것이 흠없이 충분할지라도 성령이 필요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성령을 덧입는 것이다. 좋은 수단과 방법, 훌륭한 기능과 준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별시켜주지 않는다. 모든 것의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루로 성령의 임재가 요구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만큼 성급함을 조심해야 할 사람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증거의 삶을 살고자 할 때 때로는 좀이 쑤시는 기다림이 필요할지 몰라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의 임하심이 아니고서는 우리 사역에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께 의탁하고, 성령께서 임하시고 나타나주시길 기다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급하게 나가고, 성급하게 액션을 취하는 것이 우선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날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충실히 준비하고, 격동되고 뛰쳐나가려는 것에만 비중을 두지 말고, 성령께서 나타나실 것을 구하고, 기다리라고 말이다. 그것만 결과를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완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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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해진 복음_2012.05.27

(Subject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나는 그리스도인인가43.)

 

( 28:18-20, 개역)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노방전도를 하고 왔다. 올해 들어 조별교제를 인도하며 시작한 노방전도가 청년회 차원에서 실행되고 있다. 노방전도는 어려운 일이다. 친목을 가지고 전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전혀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분명 더 곤란한 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나가서 전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주셨고, 말씀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영혼들을 보여주셨다. 실제로 베트남 황준옥씨가 말씀을 들었고, 진행중에 있다.

 

특별히 노방전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혹시 이 노방전도가 수고했던 만큼 결과가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분명한 정체성을 재확인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복음을 전한다는 모든 행위와 노력이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한 모습이다. 우리는 선교에 대해 듣고 배운다. 그 옛날 순교의 피를 흘린 선지자들의 고난을 보며 심장이 뛴다. 언젠가는 저 멀리 대양을 넘어 세계의 어딘가에서 선교하는 모습을 꿈꾸며 들뜨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의 여러 구석에서 만나는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상상은 하지 않는다. 상상 속에 있는 선교!. 그건 관념의 복음일 뿐이다. 안타까운 건 우리가 점점 상상 속에서 선교하는 꿈을 꾸면서 흥분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선교의 피는 뿌려져야 할 것이거늘 우리는 수백년 전 뿌려진 피를 보며 감동하는 이벤트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물론, 노방전도는 결과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에 앞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나가 전도할 수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그들 앞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선다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것을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상상하는 복음이 아닌.

 

오늘날 전도집회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무기력함을 보면서 솔직히 근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나부터가 일에 매여서 참석이 늦거나,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도집회 기간에 많은 분들의 자리가 비어 있다. 무엇인가 모르게 무기력함이 느껴진다. 복음의 능력이 생동감 있게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소위 이삭줍기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구심을 갖는다. 정말 그것은 사실일까? 이제는 더 이상 뜨거운 복음의 역사는 상상의 산물일까? 오히려 이젠 이삭줍기의 시대란 말로 애써 무기해진 우리의 열정을 위로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증명해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증명해줄 우리의 구세주. 다시 교회가 뜨거워지고 부흥되며,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 생동감 있는 성령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누구일까?!

 

그토록 많은 말씀이 전해지고, 성경의 많은 증거 자료들이 있으며, 언제든지 mp3를 다운받아 하나님의 배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교제가 있고, Q.T가 있고, 간증과 찬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복음은 왜 그토록 무기력한 것일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그 많은 외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진보적이지 못한 것일까? 사실은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일 것이다. 새로운 영혼들이 더 많이 탄생하고, 교회가 복음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 필연이어야 함에도. 많은 성도들이 오히려 복음전도에 있어서는 건성이고, 교제와 Q.T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것은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도적으로라도 노방전도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무지한 이방인 앞에 서는 최소한의 시도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끼리만 모여 즐거워하며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지식을 늘려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최후 보루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전도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실적인 노력이 거듭 반복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방전도는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교회를 사랑해주시길 기도한다. 차갑게 말해 오늘날 거듭난 성도라고 말하는 우리들에게서 조차 너무나 시시해져 버린 복음이 되어진 것은 아닌지 우리는 신중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깨닫게 되길 원한다. 우리가 속아왔던 사실을 올바로 보게 되길 원한다. 여전히 교회와 복음은 이삭줍기의 시대가 아니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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