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사랑이란 혹사_2011.11.25

(고후 11:23-28, 개역)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그리스도인을 잡아 죽이는 일을 자신의 최대 사명인냥 받아들이고 외국의 성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몰살시키는데 주력했다. 신약성경에서 비록 바울의 등장이 매우 잔혹하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한 특별한 뜻과 목적을 갖고 그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시작했다.

다메섹 도상에 일어난 그의 회심은 아마, 기독교 역사사상에서도 가장 극적인 회심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지독한 박해자처럼 등장했지만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통해 전적으로 회심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더불어 그 이후 그의 삶의 전향 또한, 놀라울 정도로 극적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고, 가장 엄격한 파를 쫓았다. 정통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의 박해자였다. 그런 그가 회심한 이후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고 오히려 박해 받음을 자처하며 그의 태생이 지니는 모든 부귀영광을 포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다메섹 전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다.

거짓 사도의 농락당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그의 울분석인 항변에서 바울의 수난을 엿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해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다.’라고 말한다. 감옥에서의 생활, 수없는 구타와 폭행을 당했다. 심지어 그는 돌에 맞아 기절하기도 했다.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세 번씩이나 풍랑으로 인한 파선으로 생명을 잃을 뻔했다. 그의 여정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의 그는 알몸으로 오지에 내몰린 모험가처럼 살았다. 강, 시내, 광야, 바다의 위험, 강도와 동족,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등등 그가 직면한 모든 환경과 인간관계에서 조차 그는 위험천만한 곡예의 줄을 탔다. 심히 피곤한 인생이었다. 또한, 그는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많았다. 굶주리며 갈증에 허덕이며, 추위와 헐벗음과도 다퉜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위인이기보다 사지에 내몰린 저주받은 인간 같았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의 삶은 거의 불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도대체 그에게 예수가 무엇이었기에 그의 삶은 그토록 처참해진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던 바울. 다른 모든 것이 그저 배설물이 되어버린 해괴망측한 사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아무도 바울을 제정신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의 수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완전히 혹사를 당한 사람이구나!’ 분명, 바울은 특별히 훈련 받고 연단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의 훈련을 생각할 때 사실상 그가 훈련이기보다 완전히 혹사를 당한 사람이란 것을 재차 발견할 따름이다. 정통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파의 가문의 촉망 받는 청년 바울은 극적인 회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한 후 지나칠 정도로 혹사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것이 정당한 사랑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더 놀라운 사실이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바울은 후회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 혹사당하는 삶에 대해 조금도.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어진다. 사랑은 이토록 다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백하게 된다. 나는 정직한 의미에서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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