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츄럴 요한

(막 1:6, 개역)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세례 요한의 별을 지어보자면 아마 ‘내츄럴 요한’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은 요한의 외모를 알기 쉽게 설명해줌과 동시에 여기서 요한의 인상착의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일으켜 우리를 붙잡아두는 매우 이상 야릇하면서도 무서운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놓고 전에 서도석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성경 구절은 단순히 세례 요한이 심플한 삶을 살았다. 내츄럴하게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옮겼는지 모르겠지만…ㅎ) 그래서 저도 이 구절을 그냥 넘어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덧붙여보고 싶었습니다.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대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나 일러준 말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 묘사하길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와전된 것인지,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엘리야의 재림을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 9:11, 개역)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런데 이 엘리야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왕하 1:8, 개역)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당시 사람들이 허리에 가죽 띠를 많이 착용했을 것 같긴 한데, 털이 많다는 점은 엘리야가 지닌 특징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더불어 왠지 모르게 세례 요한의 이미지와도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우연일까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고 메시야의 앞에 온 세례 요한은 그 내츄럴한 모습마저도 어쩌면 엘리야와 친숙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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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의 세례

(막 1:4, 개역)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보통 개신교에서 가장 중요한 성례전은 성찬식과 세례입니다. 특별히 세례는 구약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홍해 바다 아래로 지나온 사건, 나아만 장군의 침수 후 완치 등.

세례 요한의 세례는 가장 일반적 모형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특별히, 요한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의 세례는 어째서 ‘회개의 세례’라고 불렸을까요?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러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말하길 예수님께서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앞서 그는 물세례이자 회개의 세례를 주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세례는 누가 받을 수 있을까요? 바로,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막 1:15, 개역)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누구든지 생판 처음부터 복음,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참된 복음의 씨앗은 바로 회개하는 사람의 밭 갈아진 양심 안에 심기워집니다. 세례 요한이 행한 ‘회개의 세례’는 그 자체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실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적인 세례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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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외치는 소리.

(막 1:3, 개역)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은 글로 그리스도를 예비하지 않았습니다. 글은 아예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는 ‘소리’라는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예비했습니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등장을 알리기에는 틀어박혀 장문의 글을 쓰고 있는 것보다 소리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구약의 오래 전 선지자 중 한 명 이었다면 그도 글을 써서 후대에 남겼겠지만 말입니다.

한편, 세례 요한이 소리친 곳은 어디었습니까? 그곳은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외치자의 소리’에 대해 너무 익숙함으로 이 사실이 지니는 모순을 쉽게 망각해버립니다. 쉽게 말해, 어떤 장사꾼이 물건을 팔고 싶다면 그는 광야로 가지 않고 시내나 시장으로 갔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우리 누구나가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저 광야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아올 때까지 거기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순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째서 그는 ‘중심가의 외치는 소리’가 되지 않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된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머물 장소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아무 영광도, 인간의 즐거움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군중들 속에 머물렀지만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며 타협할 수 없는 저 언덕 넘어 광야에 머문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머물면서도 끝없이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투명의 거리감을 두고 광야에 머물 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야는 그리스도가 지나간 고난의 길이었고, 우리가 지나가야 할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먼저 광야를 통과해 약속의 땅을 들어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고 증거했습니다. 결코 그 분이 이 세상의 중심가나 인간의 중심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영웅으로 환대 받고 추앙 받을 분이 아니심을 자신의 허름한 모습과 ‘광야의 외치는 소리’란 유무형의 방식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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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된 그리스도

(막 1:2-3, 개역)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이 사회는 혜성처럼 나타난 영웅에 대한 신드롬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수 중에 ‘혜성’이라고 있는데, 그 이름 역시 가요계의 혜성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은 예명이라고 합니다. 또한, 정치와 경제, 경영, 스포츠와 문학, 영화계 등등 거의 전분야에서 어떤 탁월한 두각을 나타내는 영웅이 등장할 때 여론은 ‘혜성처럼 나타난…’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는 조금도 혜성처럼, 영웅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영웅들도 혜성처럼 등장해 활약을 펼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영웅답지 못하며, 혜성처럼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방식을 거스른다는 보편의 진리에 걸맞게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획되었고, 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정됨이 3500년 전, 그리스도 나심으로 부터는 1600년 전부터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예비함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는 글을 통해 예비되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사람을 통해 예비되었습니다.
3. 세례요한은 소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비를 소리친 장소는 광야였습니다.

문자는 인간고유의 의사소통방식이며, 문자야 말로 시대를 초월한 전달방식입니다. 그것은 증거하고 증명하며, 전달하고 가르치는데 매우 탁월한 수단입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한 정점에 이르러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 세례요한을 등장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증거를 통해 글로 예비된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받아드리기 용이해진 것입니다.(그럼에도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현실세계가 모든 이론과 이상과 가지는 괴리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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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시작 2.

(막 1:1, 개역)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란 구절의 영문성경은 이와 같습니다.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우리말 성경과 동일하게 시작, 출발, 기원의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앞서 복음의 시작이란 의미를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시작으로부터 완성과 확장까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한편, ‘시작’이란 의미를 생명활동의 개시에 접목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이 실체하고 시작할 수 있도록 했던 씨앗(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복음의 씨앗

씨앗은 식물의 생명현상을 유발시키는 최초의 원인자입니다. 그러나 이 원인자인 씨앗에도 죽은 씨앗이 있고, 살아 있는 씨앗이 있는 법입니다. 복음의 최초 원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씨앗입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 되신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과 완성과 확장을 유발시키는 복음의 최초 원인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요 1:4, 개역)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 5:26, 개역)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씨앗(생명) - 싹/성장/나무 – 곡식
시작 – 완성 - 확장
예수(생명) – 대속적죽음 -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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