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눈 멀 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에 앞서 요단과 여리고 맞은 편 모압에 진을 쳤습니다. 이에 미디안왕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해 발람 선지자를 매수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발람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결심이었고, 올바른 출발이었습니다.

(민 22:8, 개역)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

결과 하나님은 허락지 않았고, 발람도 그들과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발락이 더 큰 재물과 명예를 줄 것을 약속하며 재차 저주를 부탁할 때부터였습니다. 욕심은 반복되는 유혹 속에서 커집니다.

(민 22:19, 개역)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

여기서 발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묻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발람이 유혹됐다는 증거였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신 것을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욕심이 발동하자 재차 물어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십일조에 대해 연속된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념, 십일조의 정신과 의무, 이제는 적용의 순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자연히 십일조에 대한 의무감과 필요성을 더욱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기엔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우리는 마치 발람처럼 다시 의구심을 품는 것입니다. ‘꼭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만 하는가.’ ‘아직은 내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데…’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십일조 낼 이 돈이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욕심에 이끌리는 미혹된 마음이 우리 안에 역사함으로 우리는 여전히 십일조에 대한 순종을 절름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발람이 다시 묻자 미혹된 욕심대로 행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민 22:20-22, 개역)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하나님이 가라고 해놓고 가려고 하자 진노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욕심에 이끌려 행동하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 하나님이 바란 건 그들을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람이 욕심에 미혹되어 가고 싶어 하니까 그냥 가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진짜 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종 자기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릇된 행동의 보응을 받게 하십니다.

(롬 1:26-27, 개역)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의 유혹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잘못을 피하고 싶어하면서도 마음의 미혹이 반복될 때 그 욕심을 쫓아 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피해 우리 자신을 욕심에 내던집니다. 그 결과 그릇된 상당한 보응을 자신 스스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이 반영되곤 합니다. 우리는 욕심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우리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도 명백합니다. 그것이 당장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경각간에 음부로 내려갔다는 말씀처럼 예기치 않은 때에 예기치 않은 방법을 통해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한편, 발람은 어떠한 보응을 받았습니까?

(민 22:23-27, 개역)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지라

그의 가는 길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서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해 행동하려 할 때 말씀은 그 행동을 막기 위해 징계란 칼을 들고 서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발람에게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 담벼락에 붙어 걸어감으로써 발람의 발이 긁혀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순종의 길은 결국 자기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히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순종치 않을 때 안식이 깨집니다. 그리고 징계가 있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처럼 나귀는 발람이 볼 때 불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로써 발람의 안식은 깨졌고, 격노하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불순종하는 수단과 방법. 곧, 나귀를 통해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나귀를 통해 징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의 순종이 잘 안 될 때면 종종 물질의 징계가 따릅니다. 때로는 도둑을 당하거나, 고가품을 잃어버리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물질적인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이로 인해 안식이 깨져버립니다. 혹 당장 그렇지 않더라도 경각간에 손해를 보는 일을 당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징계를 후 하나님은 발람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혹되었고, 기여히 따라가고자 다시 묻고, 욕심을 부린 마음부터 이미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다음과 같이 회개했습니다.

(민22:34)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이렇게 발람은 회개하였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으며, 뒤에 읽어보면 그들을 따라가서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세 번의 축복을 하였습니다. 자, 이제 발람은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 잘 살았을까요? 발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 31:8, 개역)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후에 이스라엘이 진격하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미디안을 하나님께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이 발람 역시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어째서 회개하고 하나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이 칼로 죽임을 당했을까요?

(민 14:18, 개역)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란 것은 자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를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참된 행동을 가져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있어 순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징계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불순종한 대가에 있어서 만큼은 그 공의성과 불순종에 대한 매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물질적으로 갚을 수 있다면 보다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발람이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했고, 징계를 받아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다뤄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의 헌금생활에 적용해 볼 때, 어쩌면 하나님은 물질의 순종을 하지 않는 우리 앞에서 말씀의 칼을 들고 서 있을지 모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 해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발람처럼 욕심에 눈이 가리워져 경고는 보지 못하고 애꿎은 나귀만 때립니다. ‘내 쓸 용돈도 얼마 안 되는데…’란 불평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다리만 긁고 상하게 하는 것이 될 뿐임을 생각해야 됩니다. 혹 용돈이 적더라도 십일조는 그 적은 것의 고작 1/10일 뿐임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작은 것조차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의 적은 것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완악한 이기심인지 두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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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간이 진정 훔친 것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요단을 건너 그 첫 성 여리고를 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여리고성의 모든 물건을 여호와께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수 6:16-18)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여리고성을 정복한 여호수아의 군대는 의기양양하게 아이성을 공격했습니다. 아이성은 작은 성이었고, 그들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패배에 크게 낙심했고, 그 이유가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훔친 물건들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간을 처형한 후, 그들은 아이성을 정복할 수 있었고 하나님은 아이성의 모든 것을 그들이 스스로 취할 수 있게 허락하셨습니다.

(수 8: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간이 어디서 무엇을 훔쳤는지 상고해보아야 합니다. 아간이 훔친 것은 다음 세 가지였다고 말합니다. 시날의 좋은 외투 한 벌, 금덩이, 은덩이. 그리고 그것을 훔친 곳은 여리고성 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여리고성이 가나안 정복의 첫 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첫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출 23: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여리고성은 가나안 정복의 첫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리고성의 모든 탈취물도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더불어 십일조는 내 소산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계산할 때도 제일 먼저 계산해서 드리는 것이지 내 생활비 계산하고 맨 뒤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훔친 것은 개념적 의미에서 십일조를 훔친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것을 훔쳤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도둑질하는 것은 아간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훔친 것을 자신의 장막 땅 속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우리의 행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마땅히 드려야 할 하나님의 십일조가 우리의 장막 안에 있지 않은지 말입니다. 혹, 우리의 십일조가 시날의 외투처럼 옷으로 환원되어 내 장롱 속에 들어있진 않습니까? 그 옷을 입고 찬양을 부르고, 봉사를 하며, 말씀 앞에 앉아있진 않았습니까? 혹, 금덩이와 은덩이처럼 내 장신구나 보석, 또는 내가 소중히 여겨 구입한 어떤 다양한 물리적 형태로 있진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실제 오늘날 자행되고 있는 우상숭배의 실례입니다.

한편, 아간의 안타까움도 생각해봅시다. 그가 여리고성에서의 도벽만 참았더라도 패전 없이 아이성을 정복하고,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물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도 시날의 외투와 금덩이, 은덩이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렇게 까지 하나님의 것을 훔쳐야 됐었느냐고. 아간은 얼마나 무모한 도벽으로 자신과 가족들, 동료마저 파멸로 이끌었는지요!

또, 생각해봅시다. 무엇보다 아간의 잘못은 제비가 뽑힐 때까지 절대 자기 죄를 자백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수 7:16-18) 『[16]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17]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18]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제비뽑기가 시작되었을 때, 아간은 얼마든지 회개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 할 기회를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명예를 생각했고, 또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제비뽑기가 일단의 패착으로 끝나길 소원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불신자였습니다. 십일조를 포기하는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아간의 어리석음을 배워선 안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의도적으로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면 할 수만 있다면 미뤄진 십일조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남의 돈을 훔친 사람이 들켜서 죄송하다고 한다면 그는 돈도 다시 돌려줘서 갚아야 합니다.

(민 5:7)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본주인에게 1/5을 더 갚아주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정신적 보상의 의미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갚을 때 더 줬으면 더 줬지 모자라지 않게 다 갚아주란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십일조를 떼먹었다면 저금통 깨서라도 갚을 수 있으면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의 합당한 열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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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 적

(갈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좋지 못한 흔적이 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사 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거듭난 우리 역시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우리 삶 모든 곳에 있어야 합니다.

(겔 45:1-4)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장은 이만 오천 척 이요 광은 일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에스겔은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새 성전의 건축과 함께 다시 임재 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업으로 얻는 땅의 한 구역을 특별히 거룩한 땅으로 구별해 하나님께 드릴 것을 요구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삶을 요구하십니다. 심지어 제비뽑아 나눈 그 땅에서 조차도 거룩히 구별된 한 구역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 언제나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을 섬기는 흔적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어떤 공간과 시간, 정성과 노력 등등.

특별히 우리는 기도와 찬양, 교제를 나누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공간에 하나님의 흔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시간에도 하나님의 흔적은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서 언제나 신령한 흔적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물질에 있어서도 신령한 흔적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땅을 구별할 때 그 구역의 땅은 범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물질에도 범위가 정해진 거룩한 구역을 구별해 드려야 됩니다. 십일조는 1/10이라는 특별한 범위가 있는 만큼 저는 물질의 범위를 특별히 십일조로 견줘보고 싶습니다. 내 삶의 모든 곳에 신령한 흔적이 있음에도 불구 유독 물질에선 십일조의 흔적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는, 신령한 흔적이 아닌 잘못된 흔적이 있어선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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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받으심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예수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마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을 마땅한 겸손과 예물로 섬겼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소정의 감사 정도를 표현하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신성을 상징하는 유향, 고난을 상징하는 몰약까지 깊은 의미를 지닌 모두 귀하고 가치 있는 예물이었습니다.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받으셨습니다. 향유 중에서도 가장 값진 향유 같습니다. 이 향유의 가치는 1년치 연봉에 준한 것이라 합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을 섬긴 사례는 많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난하셨지만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받으시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창 14:17-20)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롯을 구하고 돌아오던 아브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람을 축복해 주었고 아브람은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이 멜기세덱이란 인물에 주의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멜기세덱이 바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살렘(평강)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마중 나온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7:1-3참조) 다시 말해, 아브람이 만난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평범한 왕이 아니라 실제 예수님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실제 예수님께 십일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시초였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실로 큽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예수님께서 실제 우리의 십일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신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 2:9)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편벽되이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도는 잊어버렸고, 이 연유로 편벽되었다 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십일조를 하나의 의무적인 행위로만 생각하고 그 이상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드릴 뿐이라면 우리는 실제로 십일조의 정신과 참된 가치를 잊은 편벽됨에 처한 것입니다. 그것은 균형의 상실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릴 때 실제로 예수님께 드리고 있다는 것을 매번 되새겨야 합니다.

(마 14:16-18, 개역)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을 때, 굶주린 군중을 위해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은 식사를 위해 200데나리온이 필요하고, 그만큼의 많은 식량을 사와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이 너희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제자들 조차 빵 한 조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한 아이가 내놓은 빵 5조각과 물고기 2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어른들은 먹을 것이 있어도 내놓지 않았지만 이 아이는 내놓았고, 예수님은 그 아이를 축복할 뿐 아니라 모든 군중을 위해 그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도 아닌 아이의 것을, 그 헌신을 기념하고 군중을 위해 그 작은 것 조차 내게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면 명백한 소유권을 가지신 십일조에 대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십일조를 떼먹는 것은 도적질이라고 까지 하심을 생각할 때 분명 십일조를 놓고도 그것을 내게 가져 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정당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사실상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를 축사하셨듯 우리의 십일조도 축사하실 것입니다. 내가 복을 쌓을 곳이 없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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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분배와 그 소유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최초 교회의 핍박자였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에 대해 잘 모르면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희년과 토지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 희년은 안식년이라 불리는 7년이 7번 반복된 그 다음해 곧, 50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이 희년이 되면 모든 기업(보통 땅)을 처음 상태로 원상복귀 시켜야 했습니다. 재산이 없어 노예가 된 사람은 풀어주고, 땅을 팔거나 산 사람은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했습니다. 즉, 땅의 경우 최초 가나안 땅 분배를 했던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각 지파의 기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회는 질서와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토지는 가장 중요한 기업이었습니다. 넓은 땅을 소유하면 많은 소출을 거두고 거부가 됩니다. 땅을 잃어버린 사람은 소작농(노예)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누군가 개인 파산으로 인해 땅을 팔아야 했다면 그 근족이 그 땅을 다시 사주도록 했습니다.(레25:25)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희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이런 규례가 단순히 지파의 기업을 유지하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습니다.

(레 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잠 22:28)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궁극적인 목적은 토지의 소유주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땅을 선민에게 분배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생활의 터전을 삼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유권마저 그들에게 양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의 소유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분배된 땅에 대한 권리를 남용해서 맘껏 사고 파는 것은 월권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의 소산물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땅을 분배 받은 모든 지파는 사실상 하나님의 소작농이었던 것입니다.

(신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출 23:19)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땅에 대한 소유 개념과 희년, 안식년에 대한 규례가 모두 흐려졌습니다. 자기 동족으로 노예를 삼고, 희년에 되어도 풀어주지 않았습니다. 땅을 맘대로 사고 팔고, 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개념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소유를 침범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일조와 헌물을 요구하십니다. 십일조는 모든 소득의 실제 소유권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직장에서 청지기처럼 일합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기에 소작농은 아니지만 소득의 원천이자 참 소유주가 하나님이심을 정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을 때 곧, 십일조를 떼먹을 때 하나님은 도둑질이라 말씀하십니다.

(말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한편, 여기서 도둑질이란 개념을 좀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보통 십일조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소득에서 1/10을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자선단체에서 어느 기업가에게 가서 기부금을 요구했습니다. 이 돈 많은 기업가는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럼 이 기업가는 도둑놈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인색할 뿐입니다. 반면, 이 기업가가 회계부서에 회사 공금을 은행에 보관해둘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회계팀장이 그 공금을 횡령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회계팀장은 도둑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치를 적용해봅시다. 만약, 우리의 소득이 우리의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로 십일조만큼을 떼서 드린다면 십일조는 하나의 기부금이나 헌금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은 혹 떼먹더라도 결코 도둑질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소유권을 준 소득에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미에서 십일조를 떼먹는 것이 도둑질이 되기 위해서는 내 모든 소득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무엇보다 십일조는 처음부터 내 소득이 된 적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란 것은 그 자체로 처음부터 내 소유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만원을 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 월급은 100만원이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내 소득은 90만원이다라고 말해야 됩니다. 10만원은 처음부터 자신의 소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소득이었다면 거기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헌금이며, 그것을 떼먹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십일조는 은밀한 의미에서 헌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는 하나의 순종적 행위이며, 의무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100만원을 벌면 그것을 모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득이라 생각하며, 그 소득을 주신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행위로 1/10을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코 십일조를 떼먹는 것은 인색하게 구는 것일 뿐이지 도둑질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 돌려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물리적은 실체로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100만원을 벌 때 10만원을 받으러 오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를 통해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리인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입니다. 마치, 기업가가 회계팀장에게 자신의 돈을 은행에 맡겨두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십일조를 떼먹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엄연히 도둑질입니다.

(겔 45:10)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

그럼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월급에서 세금을 제외하고 십일조 계산을 해선 안 됩니다. 연봉이 내 소득입니다. 연봉이란 소득에서 세금을 제하고 받은 것일 뿐입니다. 연봉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기타의 모든 소득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차량유지비, 자기계발비 등 또는 어떤 물품을 공급받는 것에서도 할 수 있는 대로 십일조는 드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짜로 무엇을 얻는 것은 마냥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공짜를 바래서도 안 됩니다. 또, 할 수 있는 대로 십일조 외 헌물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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