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에 눈 멀 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입성에 앞서 요단과 여리고 맞은 편 모압에 진을 쳤습니다. 이에 미디안왕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려워해 발람 선지자를 매수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에 발람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았기에 하나님께 묻고 그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옳은 결심이었고, 올바른 출발이었습니다.

(민 22:8, 개역)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하니라』

결과 하나님은 허락지 않았고, 발람도 그들과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발락이 더 큰 재물과 명예를 줄 것을 약속하며 재차 저주를 부탁할 때부터였습니다. 욕심은 반복되는 유혹 속에서 커집니다.

(민 22:19, 개역)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 보리라』

여기서 발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묻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발람이 유혹됐다는 증거였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신 것을 다시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욕심이 발동하자 재차 물어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십일조에 대해 연속된 묵상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념, 십일조의 정신과 의무, 이제는 적용의 순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자연히 십일조에 대한 의무감과 필요성을 더욱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기엔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욕심입니다. 우리는 마치 발람처럼 다시 의구심을 품는 것입니다. ‘꼭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만 하는가.’ ‘아직은 내 형편이 여유롭지 못한데…’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십일조 낼 이 돈이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 욕심에 이끌리는 미혹된 마음이 우리 안에 역사함으로 우리는 여전히 십일조에 대한 순종을 절름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발람이 다시 묻자 미혹된 욕심대로 행하게 내버려두셨습니다.

(민 22:20-22, 개역) 『[20]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행하니 [22] 그가 행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하나님이 가라고 해놓고 가려고 하자 진노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욕심에 이끌려 행동하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 하나님이 바란 건 그들을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람이 욕심에 미혹되어 가고 싶어 하니까 그냥 가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나 진짜 가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종종 자기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릇된 행동의 보응을 받게 하십니다.

(롬 1:26-27, 개역)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죄의 유혹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잘못을 피하고 싶어하면서도 마음의 미혹이 반복될 때 그 욕심을 쫓아 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피해 우리 자신을 욕심에 내던집니다. 그 결과 그릇된 상당한 보응을 자신 스스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이 반영되곤 합니다. 우리는 욕심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우리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도 명백합니다. 그것이 당장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경각간에 음부로 내려갔다는 말씀처럼 예기치 않은 때에 예기치 않은 방법을 통해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한편, 발람은 어떠한 보응을 받았습니까?

(민 22:23-27, 개역) 『[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 지라

그의 가는 길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서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해 행동하려 할 때 말씀은 그 행동을 막기 위해 징계란 칼을 들고 서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발람에게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가리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피해 담벼락에 붙어 걸어감으로써 발람의 발이 긁혀 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불순종의 길은 결국 자기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히3: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순종치 않을 때 안식이 깨집니다. 그리고 징계가 있습니다. 발람이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처럼 나귀는 발람이 볼 때 불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로써 발람의 안식은 깨졌고, 격노하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불순종하는 수단과 방법. 곧, 나귀를 통해 평안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나귀를 통해 징계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질의 순종이 잘 안 될 때면 종종 물질의 징계가 따릅니다. 때로는 도둑을 당하거나, 고가품을 잃어버리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물질적인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곤 합니다. 이로 인해 안식이 깨져버립니다. 혹 당장 그렇지 않더라도 경각간에 손해를 보는 일을 당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징계를 후 하나님은 발람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미혹되었고, 기여히 따라가고자 다시 묻고, 욕심을 부린 마음부터 이미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다음과 같이 회개했습니다.

(민22:34)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이렇게 발람은 회개하였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았으며, 뒤에 읽어보면 그들을 따라가서 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세 번의 축복을 하였습니다. 자, 이제 발람은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 잘 살았을까요? 발람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민 31:8, 개역)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후에 이스라엘이 진격하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미디안을 하나님께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이 발람 역시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어째서 회개하고 하나님 명령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한 발람이 칼로 죽임을 당했을까요?

(민 14:18, 개역)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회개란 것은 자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위를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참된 행동을 가져오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있어 순종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징계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불순종한 대가에 있어서 만큼은 그 공의성과 불순종에 대한 매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물질적으로 갚을 수 있다면 보다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의 무게를 덜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발람이 욕심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했고, 징계를 받아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다뤄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의 헌금생활에 적용해 볼 때, 어쩌면 하나님은 물질의 순종을 하지 않는 우리 앞에서 말씀의 칼을 들고 서 있을지 모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나아가다 해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발람처럼 욕심에 눈이 가리워져 경고는 보지 못하고 애꿎은 나귀만 때립니다. ‘내 쓸 용돈도 얼마 안 되는데…’란 불평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다리만 긁고 상하게 하는 것이 될 뿐임을 생각해야 됩니다. 혹 용돈이 적더라도 십일조는 그 적은 것의 고작 1/10일 뿐임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작은 것조차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의 적은 것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완악한 이기심인지 두려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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