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반중 혐중 정서가 높다고 막연하게들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가 있었습니다.

막연히 한국의 반중 정서는 국민의 80%가 넘는다는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았지만 한국 리서치에서 전국의 성인남녀 천명을 대상으로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여론조사가 2025년 1월달에 있었네요.

[2025 대중인식조사] 중국 이미지와 한중 역량 비교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년령별 성별 한국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반중 정서가 심해져서 내년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무척 궁금해 집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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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에 노 차이나 존 행동지침이란 글이 떠돌아 다닌다.


이 것만 보더라도 2030세대들이 얼마나 중국과 중국인을 싫어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재 MZ세대들의 반중 감정은 단순히 중국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할 정도로 수위가 높아졌다.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거부터 중국과 중국인들을 혐오한 것은 절대 아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청년들의 대중(對中) 인식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중국발 호황 덕분이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들의 중간재 수요가 폭발했다. 그중 적지 않은 몫이 우리에게 떨어졌다. 세계 무역의 확장은 상업용 선박 수요 또한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때 가장 큰 수혜를 본 게 우리나라 조선사들이었다. 중국 덕분에 기업 실적이 확대되고 일자리가 늘어났으니 청년들이 호감을 갖는 건 당연했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건 2010년대부터다. 2010년 중국의 GDP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로 올라섰다. 명실공히 G2로 발돋움한 중국은 '늑대 전사(전랑외교)' 같은 자세로 주변국을 위협했다. 2017년 사드 배치가 촉발한 중국 정부의 한한령과 관광 통제는 여전히 많은 이에게 위협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다. 중국에서 1994년부터 시행된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 이른바 소분홍들이 청년이 되면서 한복·김치 등의 유래를 놓고 온라인상에서 우리 청년들과 끊임없이 충돌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2030세대들이 중국을 싫어하는 이유는 과거 흑인이나 아랍인(무슬림)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가 익숙하지 않은 점에서 생겨났다면 중국인의 경우는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탈이 난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번 성수동 카페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은 자국내에서 하는 것처럼 무개념 무매너 민폐행동을 한국에서도 당연스레 하기에 이를 참아내는 한국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난 것이다.

특히 2030세대들은 과거 대학 등록금 통제로 대학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중국 유학생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중국인들과 부대끼면서 많은 고충을 안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민주당 정부의 중국에 대한 저자세가 가장 크다.국민이 중국으로 인해 일상에서 겪는 여러 불편에 대해, 정부가 중국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인식은 반중 정서를 더욱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중국발 미세문제나 한한령 중국인 관광객의 민폐행동등에 대해 그간 정부는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못했다.

오히려 중국은 한국의 반중정서에 대해 한국 언론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혐중논란을 부추긴다면서 오히려 한국측을 힐난하고 있음에도 아무런 대꾸 한마디 못하더니 정말 친중주의자인지 민주당에서는 반중 데모나 발언을 한다면 처벌하는 법률을 만들겠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짓까지 하는 실정이다.

이재명 정부나 민주당이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 제대로 말 하나 못하는 병X같은 짓거리를 하기에 MZ세대들은 더더욱 중국을 혐오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정부는 중국과 제대로 된 협상을 통해서 할 말을 하는 당당한 자세를 보이고 이에 중국이 화답해야 중국을 바라보는 여론이 바뀔것이라고 생각된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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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1층에는 보통 명품 매장들이 들어와 있습니다.뭐 백화점에 따라 2층에 입점한 곳도 있지만 아무튼 명품 브랜드의 1층 입점은 거의 국룰이라고 보시면 되지요.


그런데 특이하게 대전의 롯데 백화점 1층의 가장 큰 공간에 다른 백화점에는 있는 명품매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층 매장의 매출이 무척 높다고 하네요.대체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대전 롯데 백화점 1층에는 이 매장이 있기 떄문이죠.

성심당 시그니처 스토어가 입점해 있는데 성심당 명성을 생각한다며 1층을 통째로 써도 놀랄 일은 아니죠.

롯데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아예 전용 출입구까지 만들어 주었네요.


하긴 성심당 이 세글자가 한국에서는 명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그나저나 성심당이 있는 대전분들 넘 부럽습니다.근데 빵을 좋아하는데 왜 대전을 방문할떄 성심당을 안들렸는지 당최 알수가 없네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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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03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심당이 대전에서 그렇게나 유명한가요? 빵을 별로 좋아하지 얺아 성심당 빵은 못 먹어봤은데...명성은 들어알았지만 저정도 일줄은 몰랐네요..ㅎㅎ

카스피 2025-12-13 17:35   좋아요 0 | URL
ㅎㅎ 성심당은 대전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에요.대전에만 매장이 있어 사람들이 빵사러 대전으로 갈 정도니까요.
실제 대전에만 한 5~6군데 지점이 있는 성심당의 순이익이 전국에 매장이 있는 파바나 뚜레쥬르보다 순이익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하지요^^

서니데이 2025-12-1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심당 빵이 맛있는데, 대전에서만 매장이 있어서 조금 아쉬워요. 성심당 같은 브랜드가 백화점 1층에 있으면 방문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카스피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카스피 2025-12-13 17:37   좋아요 1 | URL
네,원래 성심당 창업자의 아들 두분중 동생이 성심당 프렌차이즈화를 계획하디 실패한 후 형님이 대전에서만 성심당을 운영하겠다고 결심하셧다고 하더군요.그러니 대전이 아닌곳에서 성심당 빵을 먹으려면 대전으로 가야 하지요ㅜ.ㅜ
 

작가의 고국에서보다 타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들이 있지요.뭐 여러 작가들이 있겠지만 아마 가장 대표적인 작가라고 한다면 곤충기 작가로 유명한 프랑스의 파브르와 역시나 같은 프랑스 작가로 개미로 유명한 베르ㅏ르 베르베르를 들 수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인 파브르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한국에서의 인지도와 인기에 비해서 본국인 프랑스에서는 한국처럼 인기가 그닥 많지 않다고 하는군요.


특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은 거의 한국어로 다 번역된 것 같은데 사실 작가의 대부분 작품이 번역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베르베르의 작품을 한동안 많이 읽었는데 그의 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구는 소설 잠에 나오는 글귀 입니다.


약한 사람은 복수를 하고

강한 사람은 용서를 하지만

더 강한 사람은 무시를 한다.


영화 ‘짝패’의 장필호(이범수 역)가 이런 말을 했다.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게 아니라 오래 가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명언이네요.


ㅎㅎ 저도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최소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듭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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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촌간 결혼식 글을 올리면서 과연 6촌은 어떤 촌수일까 궁금해 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가족 가계도를 올려봅니다.

나를 기준으로 4촌까지만 나와있는 가계도 입니다.요즘은 보통 4촌까지만 아는 편이죠.


하지만 6촌 결혼이 문제가 되었으니 가계도를 좀 더 넓혀 보겠습니다.

흔히 사돈의 팔촌이란 말이 있는데 먼 촌수를 나타내는 말이죠.나를 기준으로 8촌은 증조부 형제(종증조)의 증손자녀들 입니다.정말 먼 촌수라 솔직히 우연찮게 사귄다고 해도 서로 모를 수 있는 관계이긴 하네요.

ㅎㅎ 그런면에서 10촌 친촉의 결혼식에 참석한 제가 좀 유별난 것 같긴 합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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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02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때부터 삼촌이라 불렀던 친척 어른들이 사실은 오촌 당숙님들이셨고, 사촌동생들이라 여겼던 아이들이 사실 육촌동생들이었다는 것을 사춘기 무렵에 알게 되었어요. 그때쯤 생각이 들었죠. 어릴때부터 명절때마다 내가 다 돌보아야 했던 10명이 넘는 동생들 중 실제 사촌동생 은 절반 정도고, 나머지 절반은 육촌이었구나.

그러고보니 명절 아침에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큰집으로 가서 또 제사를 지내고, 그 다음에 삼촌집으로 가서 다시 제사를 지낸 후에야 밥을 먹고 놀았는데, 왜 세 번씩이나 장소를 옮기며 제사를 지내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어른들이 하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였죠.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동생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그 자식들을 같이 키웠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도 아버지가 아직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니 우리 할머니 혼자 아들 셋, 딸 둘을 키우면서 조카들 넷을(아마도) 함께 키웠던 것 같아요. 다들 함께 자라서 친형제처럼 지냈을 거라 추측이 되고, 그 자식들인 우리도 삼촌이라 부르고, 사촌이라 부르며 자랐던 것이죠.

불과 두 세대 전의 일인데 그 할아버지들은 왜 그리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는지, 할머니는 그 많은 아이들을 어찌 혼자 키우셨는지 전혀 아는 것이 없네요.

사실 제가 군대가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되지도 않는 유산 때문에 형제들 간에 다툼이 있었고, 제대한 후부터는 명절에도 큰집을 안 가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왕래가 끊겨서 어릴때 늘 제가 돌봐주었던 10명이 넘던 동생들을 못 보고 긴 시간이 지났네요. 지금은 길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볼거예요. 어린시절 얼굴도 이젠 가물가물해서.

카스피 2025-12-03 12:32   좋아요 0 | URL
아마 60년대 즈음 지방의 경우에는 지금과 달리 친인척간의 왕래가 아주 잦았다고 합니다.대부분 사는 곳이 근처 였기에 더욱 그랬다고 하네요.하지만 그러다보니 감은빛님 할머님처럼 친척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키우던 어르신들이 많으셨답니다.
하지만 70년대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서울로 지방 대도시로 이동하면서 과거와 달리 친 인척간의 왕래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특히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더더욱 친인척 얼굴 보기가 힘들어 졌다고 합니다.
저 역시도 어릴적에는 이종 사촌들고 자주 만났지만 나이가 들면서 왕래가 뜸해져서 이젠 길거리를 지나쳐도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것 같네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