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지위인(朝鮮之偉人)》은 일제강점기인 1922년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한 단행본으로, 조선 역사상의 위인들을 망라해 소개한 책입니다.당시 천도교계 잡지사였던 개벽사는 192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조선 위인 투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의 인물들을 정리하여 이듬해인 1922년에 책으로 출간하였습니다.이 책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조선의 위인'이라는 근대적 개념과 목록을 형성하는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조선지위인의 주요 특징은 당시 독자들이 직접 참여한 투표 결과를 바탕으로 위인 목록이 구성되었으며 당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들이 수록되었고 일제의 식민 지배 속에서 조선의 역사와 영웅들을 조명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재 조선지위인의 발행부수나 판매현황을 알기 쉽지 않은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출판물에 대한 총독부의 검열과 압수, 기록 말살 등으로 인해 개별 단행본의 상세한 판매 데이터가 온전히 전해지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책을 기획 출판한 개벽의 잡지가 매호 8~9천부를 발행하고 약 7천부가 판매되었으며 개벽잡지의 조서위인 투표에 최소 2,300명이 직접 엽서 투표를 했다는 점에서 유추해 보건대 상당하 많은 판매가 이루어 졌을 거라고 추측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담으면 전량 압수 및 폐기 처지 당하기 일쑤였던 상황속에서 조선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책이었던 조선지위인은  유통과 지속적인 재판(再版) 인쇄에 많은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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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에도 헌책방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편이죠.과거 헌책방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구도심에 자리 잡은 오래된 헌책방들은 노후화와 재개발·재건축 바람을 겪으며, 낮은 마진으로는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운데다가 독서 인구의 감소로 헌책방 포함 서점 자체 운영이 어려워지는 것이 가장 컸었죠.

하지만 알라딘 중고서점이 등장하면서 체계적인 재고 관리나 디지털화 없이 주인의 기억이나 주관적 방식에 의존하다 보니 젊은 세대의 수요를 맞추기 어려운 기존의 헌책방 대신에 소비자들이 집에서 편하게 검색하고 주문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과 모바일 플랫폼을 주로 이용하고 전국 단위의 대형 인터넷 서점 직활의 중고서점이 늘어나면서 깔끔한 시설과 편리한 시스템으로 소규모 헌책방 자리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결국 높은 임대료와 헌책방 주인장들의 은퇴 그리고 독서인구의 감소라는 기존 원인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전국적으로 늘어나면서 결국 MZ세대와 맞지않는 기조의 아날로그형 헌책방들은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현재 운영중인 헌책방들도 나름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자체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든지 아님면 알라딘이나 예스24 온라인 중고판매사이트를 적극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일이 있어 낙성대역 부근에 갔다가 낙성대 헌책방을 찾아 갔습니다.(인근에 있던 흙서점의 경우 건물 재건축으로 철수한 것으로 보임)

책을 구경하는 중에 보니 지하에 있는 헌책방에 손님은 나 하나 밖에 없어 보이는데 직원이 연신 택배 보낼 물건을 위로 나르는 것이 보이는데 대부분 알라딘 포장박스더군요.대충만 봐도 근 100개의 포장박스(책 1~2개용)을 택배차에 올리는 것 같은데 판매의 상당수를 알라딘 중고서점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인근 흙서점이 찾아오는 손님들 위주로 판매한 것과는 거의 정바대라고 할 수 있지요.

인근 달마 서점 역시 지하에 매장이 있으나 한 번도 문이 열린것을 본 기억이 없는데 아마도 알라딘 중고서점과 자체 사이트를 이용해서 판매하면서 지하매장은 거의 창고로 쓰는 것 같습니다.

(실제 청계천에서 몇십녀간 운영하던 상현서점도 아들이 인계하고 장위동으로 매장을 옮기면서 알라딘등 인터넷 서점 위주로 판매하며서 매장은 창고식으로 운영중이더군요)


현재 운영중인 헌책방들이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지금은 헌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이 줄어 들었기에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구매자 입장에서도 헌책방을 일부러 찾아가 서가에서 책을 찾는 수고를 덜 수 있기에 알라딘 온라인 중고판매가 편하긴 한데 이 경우 필연적으로 헌책 가격이 상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헌책방의 경우 알라딘측에 판매 수수료를 10%를 제공해야되고 기존 헌책방 운영시 신경쓰지 않았던 10% 부가세 납부 역시 세금 납부(알라딘 전산망 이용의 결과)해야 되기 떄문에 과거와 달리 최소 20%의 가겨인상이 있을 수 밖에 없기 떄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과거부터 헌책방을 이용하던 분들 입장에서는 헌책방의 책 가격이 많이 올랐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교통비와 시간을 투자하면서 헌책방에 가도 헌책값이 생각보나 높으니 굳이 가두 헌책방을 이용하느니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하는 것이 더 편히하단 생각을 갖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알라딘은 중고매장을 open하면서 가두 상권의 헌책방의 입지를 압박하고 그 결과 헌책방들이 알라딘 온라인 중고판매의 이용에 따라 수수료 10%를 챙김으로써 일거 양득을 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알라딘이 온라인 중고 판매를 시작한 후 일정 궤도에 오르자 중고서점을 open했는데 원칙적으로 온라인 중고판매를 허용했으면 오프라인 중고서점은 막는 것이 맞단 생각이 듭니다.하지만 대형 쇼핑몰이 입점시 주변 상권에 강력 반발한 것과 달리 헌책방의 경우 지역에 1~2개 밖에 없다보니 알라딘 중고서점의 open에 대한 반발도 크게 없었고 이용자들 역시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알라딘 중고 온라인 판매와 중고서점이 활성화 되면서 점차 헌책 판매의 주도권은 알라딘으로 옮겨가는 것 같으며 헌책 가격 역시 차츰 상승하는 것이 눈이 보입니다.경쟁해야 될 기존의 헌책방들이 알라딘 온라인 판매에 주력하고 그 결과 책 가격이 이론상 20%(알라딘 수수료 10%+부가세 10%)가 오르게 되면서 헌책방 이용 고객들이 급감하게 되니 어쩔수 없이 알라딘 판매에 더 주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그러다 경쟁력이 떨어지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알라딘과 헌책방의 동거는 앞으로 일정기간 지속되겠지만 결국 향후에는 헌책방은 알라딘 중고서점만 남지 않을까 싶네요.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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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6-09-06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 알라딘 서점(종로, 대학로, 가로수길, 신림)과 대구에 생긴 알라딘 서점 4곳을 자주 갑니다. 매장에 갈 때마다 판매 진열을 유심히 보는 편인데, 확실히 예전보다 판매되는 굿즈가 많아졌어요. 책과 굿즈를 같이 구매하는 손님과 굿즈만 구매하는 젊은 손님들은 늘어나고, 반대로 헌책만 있는 서점에 가는 손님들의 발길은 더 줄어들 것입니다. 헌책방 단골의 연세가 중장년층인데, 고령과 건강 문제로 이분들의 발길마저 줄어들고 있어요.

올해에 처음으로 동묘시장 안 헌책방 가게들을 방문했어요. 제 취향에 맞는 책들을 5권이나 찾아서 구매했을 정도로 좋은 곳이었어요. 서울에 남아 있는 헌책방들이 폐업하기 전에 찾아가 봐야겠어요.

카스피 2026-09-07 09:15   좋아요 0 | URL
알라딘 중고서점과 기존 헌책방을 비교해보면 극단적으로 알라딘 중고서점의 경우 출간된지 10년이 안된 책들의 압도적으로 비율이 높지요.그러다보니 요즘 2030세대들은알라딘 중고서점을 여러모로 찾을 수 밖에 없지요.
기존 헌책방의 장점이라면 오래된 중고도서를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과연 이를 찾을 분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둉묘 헌책방을 가셨군요.이곳도 예전에는 주변에 한 5~6군데 헌책방이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아마 가보신 3곳 정도만 남아 있을 거에요.자주 올라오셔서 찾아 가보시길 바랍니다.
 

앞서 미국의  OSS 첩보원으로 일제 시대 조선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에 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지요.


유일한 박사는 첩보원 지원 당시 50대의 나이에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국 광복의 초석이 되기위해 앞장선 독립 운동가셨지요.

하지만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비밀 작전이었던 냅코 프로젝트는 폐기되고 유일한 박사 역시 살아 생전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가족을 포함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아서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90년대에 미국의 비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일한 박사의 일생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드라마틱한 일생이었는데 의외로 그의 일대기나 첩보 활동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없는 것이 무척 의아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또다는 냅코 프로젝트의 첩보원이었던 박순동은 1965년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수기를 공모해서 당선 되었습니다.박순동이 유일한 박사와 달리 비밀 작전이었던 냅코 프로젝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일본 학병을 탈출하여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 요원이 되었으나 일제가 갑작스럽게 항복하자, 미국은 제네바 협약 위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공로를 은폐하고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격리하여 '패전국 포로'로 취급했습니다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 요원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일제가 갑작스럽게 항복하자, 미국은 제네바 협약 위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공로를 은폐하고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격리하여 '패전국 포로'로 취급했고 국가가 없는 약소국의 청년이라는 이유로 미국과 연합군에게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진 분노와 수치심, 즉 ‘역사적 모멸감’을 세상에 고발하고자 수기를 공표했다고 합니다.


박순동의 일생 역시 매우 드라마틱 했습니다.1944년 일본 유학시절 학병을 차출되어 버마 전선에 투입(박순동은 모멸의 시대에서 버마 전선에 있던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기록을 거의 최초로 기술했다고 알려져 있음)되었는데 동료학병 3명과 일본군을 탈출하여 버마의 영국군에게 항복 이후 뉴델리로 이동하여 심문을 받은 뒤 미국 OSS의 눈에 띠어서 냅코 프로젝트 첩보 요원으로 차출 됩니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을 냅코 프로젝트가 폐기되자 박순동은 한인 전쟁포로(일본군출신임)들을 전쟁에 동원하지 말라는 제네바 협약 위반을 의식한 미군측에 의히 갑작스레 하와이 전쟁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고 맙니다.이런 갑작스런 포로 대우에 박순동은 분노하지만 동료 2명과 더불어 하와이 포로 수형소에 수감된 2,700명의 한일 포로들을 위해 수용소내에서 자유 한인보를 발간하면서 한인 포로 지위 향상을 위해 동분 서주 합니다.

이후 박순동은 한국으로 송환되어 53년까지 영어 교사를 역임하고 53년부터 64년까지 직장인(제지회사 근무)으로 일했으며 65~67년까지 다시 영어 교사로 근무하다 67년에 49세에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냅코 프로젝트 비밀이 해제된 이후인 1999년에박순동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게 됩니다.그의 사후 25년 뒤에 그의 독립 운동이 인정된 셈이니 만시 지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박순동의 일생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모멸의 시대를 쓴 이유는 강대국에게 당한 배신과 '모멸'의 폭로하고 잊힌 역사적 진실의 발굴과 증언(냅코 프레적트 한국인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주체적으로 참여/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에 자행된 조선인 위안부의 피해를 고발),그리고 학벼으로 강제 동원되었던 수 많은 조선인들 중에 살아왔다는 부채의식이 함께 맞물려서 ‘우리 민족이 왜 이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가’에 대한 답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저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이런 생생한 후기가 후손들에게는 이미 잊혀져서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말로만 독립 투사들을 떠받들고 있는 후손들을 참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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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초기에 서울및 경기지역 헌책방 리스트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인터넷을 보다보면 제가 올린 리스트가 가끔 돌아다니는 것을 본 재미난 기억이 있네요.


근데 지금 보면 당시에 올렸던 리스트의 헌책방들중 다수가 문을 닫았더군요.그런데 거기에 얼마전 방문했던 낙성대 흙서점까지 문을 닫었으니 서울에 있는 헌책방들은 계속 문을 닫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전국적으로 헌책방들이 다수 있지만 과거처럼 유명했던 청계천이나 부산 보수동, 인천 배다리 등에 성행했던 헌책방 거리중에서 부산 보수동(안가본지 오래되서 현상황을 잘 모름)을 제외하고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10개점내외 인천 배다리등은 5~6개점 정도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럼 과거와 달리 헌책방이 폐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잦은 교육과정의 개정이 아닌가 싶습니다.과거 헌책방의 주된 수입원은 바로 중고등학생의 참고서였습니다.그러다보니 학기초는 참고서를 찾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던 대목이었지만 잦은 교과개정으로 참고서들이 팔리지 않게 된 것이 판매부진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특히 대학가나 중고등하교 주변에 있던 헌책방들이 많이 사라지는 주된 요인임)


둘째는 알란딘 중고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운영하는 온라인의 등장으로 골목 헌책방들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과거 헌책방들이 쾌쾌한 책 냄새를 풍기는 동굴같은 느낌이었다면 요즘 알라딘 중고서점을 보면 깔끔한 인테리어, 도서 검색대, 카페 공간을 갖춘 대형 매장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2030세대들의 발길을 잡고 있는것이 현실이지요.

게다가 대형 서점들이 체계적인 모바일 앱과 전국 매장을 통해 개인들의 중고책 매입을 싹쓸이하면서, 영세 헌책방들은 좋은 책(양서)을 공급받기조차 어려워졌습니다.


셋째는 구도시에 있던 헌책방들의 경우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헌책방들이 문을 닫고 임대료 상승등으로 헌책을 팔아서는 임대료도 부담하기 힘들어 졌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는 헌책방을 포함 서점들이 문을 닫는 주요 이유인데 유튜브와 OTT발전으로 독서인구가 매년 감소하는데다가 종이책 대신 태블릿이나 e-book을 이용하는 독자가 늘어나면서 헌책을 포함한 종이책 수요 자체가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 이유로 기존의 개인의 운영하던 노포 중심의 헌책방들은 차츰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다만 일전에 글을 올린 것처럼 헌책방 쥔장들도 자구책을 강구하는 편인데 예를 들면 커피와 차를 함께 파는 헌책방 카페라든가 카테고리를 전문화시켜 특정 장르만 판매하는 독립중고서점으로 변신하는 중이지요.

아무튼 과거 추억의 향수를 자극하는 노포 형식의 헌책방들이 계속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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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디너 분들 중에서 헌책방을 자주 찾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헌책방을 자주 찾으시는 분들이라면 흔히 말하는 가두 헌책방이 과거와 달리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실수 있으실 겁니다.

서울의 대표적인 헌책방 거리였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경우 과거의 명성에 비해 현재는 약 10개 정도의 헌책방만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할 정도니까요.


자주는 아니지만 병원에 갈적에 한번씩 들리던 헌책방이 바로 낙성대역 인극에 있는 흙서점 입니다.흙서점은 최소 그 자리에서 30년 이상 운영을 하던 헌책방이었는데 얼마저 치료차 병원에 들렸다가 좀 돌아서 방문했더니 문을 닫았더군요.

살펴보니 건물을 부수고 재 건축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이유로 매장 문을 닫은 것으로 보입니다.요즘 헌책방들이 재개발 재건축 이유로 문을 닫는 경우가 있는데 흙서점도 있던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이 건물을 짓느라 철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서 관악구에 있었던 오랜된 헌책방중의 하나가 또 문을 닫았네요.관악구에는 2천년 이전부터 운영하던 삼우서적,봉천서점,책상을 책상이다등 많은 헌책방들이 있었는데 거의 문을 다 닫았습니다.이제 정말 헌책방 운영이 어려운 시대가 왔나 보네요.

혹시 흙서점을 방문하실 분들이라면 인근에 달마 서점(근데 문을 잘 안 열음)과 인헌중고 정류장 인근에 헌책방이 하나 있으니 이곳을 이용하심 되겠습니다.

by cas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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